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6) 수산성조(首山城操)

김창집 2002. 12. 4. 10:32

 

* 이 글은 '제주시정소식'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 탐라순력도의 그림 중 '수산성조'

 

 

▲ 미풍양속을 고이 간직한 수산리(水山里)

 

 송강 정철은 그의 가사 '관동별곡'에서 절효정문(節孝旌門)이 늘어서 있는 강릉 대도호부의  풍속을 예찬했다. 우리가 찾은 11월 4일의 수산리가 그런 마을이었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논어 옹야편(雍也篇)의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따다 이름을 지었다는 마을. 노랗게 익은 감귤이 빛나는 오후, 거리에 들어서자 이곳저곳에 오래된 비석들이 우리를 맞는다.

 

 홍달한을 비롯한 충효비, 열녀비, 효자비, 선정비, 그리고 마을에 치적을 남긴 여러분들의 뜻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어 도의(道義)가 땅에 떨어지고,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해지는 요즘의 세태에 경종을 울려준다. 홍달한(洪達漢, 1666∼1749)은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가 하면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자 3년의 시묘를 하였고, 어려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을 다시 모셨다.

 

 1720년 숙종이 승하했을 때에는 다랑쉬오름에 올라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충성심을 나타내었는데, 이러한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1746년(영조22)에 왕명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교지를 내렸고, 그 후 가의대부(嘉義大夫)의 교지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관직을 내렸다. 이 정려비는 1749년(영조25)에 세운 것을1992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외에도 영조∼순조간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어머니를 살린 효자 현유경(玄胤慶)의 비가 빛난다.

 

 백성들을 구휼하여 1724년에 세워진 별견어사 황구하(黃龜河) 선정비, 역시 1817년에 구휼로 선정을 베푼 윤구동(尹久東) 목사 선정비, 정연(鄭淵) 선정비, 1880년 강우진(康祐鎭)군수 선정비 등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청상으로 시부모를 끝까지 훌륭히 모심으로서 1843년 5월에 내려졌다는 효열고씨지려(孝烈高氏之閭)는 볼 수 없어 안타깝다. 마을에 치적을 남긴 남양홍씨, 채은일, 김원두의 공덕을 기려 이에 보답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정성도 빛난다.

 

 

▲ 수산초등학교로 변한 수산진성 자리

 

 차를 세우고 학교 정문에 이르렀을 때 눈에 확 띄는 글이 있었다. '1992년 소년조선일보 주최 제3회 아름다운 학교 뽑기 대회 수상'.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교정은 그대로 잘 꾸민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오른쪽 성 밖에 둘러싸인 감귤 과수원이 이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정문 왼쪽 동백나무 아래로 곱게 피어 있는 털머위가 눈인사를 하고 양쪽에 늘어선 팽나무는 고개를 숙여 아는 체한다.

 

 동문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자리가 출입구가 된 셈이고, 성담엔 능소화, 계요등, 하늘타리, 칡, 송악, 담쟁이 등이 엉켜 자란다. 곱게 깔려 있는 운동장의 잔디를 바라보고 나서 오른쪽 울타리로 도는데, 성안을 둘러 심어놓은 참식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스레피나무, 굴거리나무, 아왜나무, 까마귀쪽나무 같은 상록수가 무성하다. 마당 북동쪽 커다란 팽나무를 중심으로 정글짐, 썰매 등 어린이 놀이시설이 늘어섰는데, 이쯤에 군기고가 들어섰으리라.

 

 운동장 동쪽과 남쪽으로 성담을 의지하여 4∼5단의 응원석 계단을 만들어 놓은 점이 특이하다. 정문으로부터 성밖 서쪽 울타리에는 1993년에 조성된 총면적 6,831㎡의 감귤원이 있어 아이들의 학습원 역할을 하고 있다. 과수원으로 들어가 진안 할망당을 찾았다. 당에 조금 못 미쳐 성을 의지하여 자라던 커다란 팽나무와 식나무가 지난 태풍 때 함께 넘어져 감귤나무를 덮친 채 그대로 있고, 뿌리가 뽑힌 곳 성의 일부도 무너져 내렸다.

 

 성을 쌓을 때 자주 무너져 애를 태우다, 13세 소녀를 묻고 그 위에 성을 쌓으면 된다고 해서 그 말을 쫓아 성을 완성했는데, 소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당을 꾸민 것이 이곳 주민들의 신당(神堂)이 되었다. 지금도 군 입대나 입시, 취직 시험 등을 앞둔 사람들에게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이 찾는다. 오래된 누룩나무 아래 차려진 제단 위 돌담에는 지전물색이 걸리고, 어젯밤에 다녀갔는지 참식나무 아래로 고수레한 쌀밥 덩이와 밀감이 나뒹굴고 있었다.
 


▲ 순력시 군사를 점검하는 그림 '수산성조(首山城操)'

 

 1702년 음력 11월 2일, 별방진을 출발하여 정의현성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들른 목사 일행은 점심을 먹고 부대를 점검한다. 정의현감인 박상하(朴尙夏)를 대동하고 유효갑(兪孝甲) 조방장 이하 80명 군사의 훈련 상태와 군기 집물을 점검하는 그림이 '수산성조'다. 성밖에는 목사 일행이 타고 온 말이 쉬고, 성을 둘러 군기가 펄럭이며 군사들이 성을 삼엄하게 호위하는 가운데, 성안 샘물과 부대 주건물을 기준으로 양쪽에 늘어서서 점검을 받고 있는 뒤편에는 활을 든 병사들이 대기해 있다.

 

 오른쪽 아래 그려진 조그만 조점 그림에 비해 성밖 주변 상황이 유달리 크게 그려졌다. 관심을 끄는 것이 비교적 중심부에 그려진 구수산 고성(古城)의 모습이다. 1416년(태종16)에 3읍으로 나뉠 당시, 그곳 옛 수산(首山)이 정의현의 소재지였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이곳은 현청 소재지로서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1423년(세종5)에 지금의 성읍리로 옮겨졌다.

 

 그 외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식산악(食山岳), 오조포(五照浦), 성산(城山), 협재포(俠才浦)와 협재연대, 수산망(首山望)이 나와 있다. 수산진성은 1439년(세종21)에 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이 쌓았는데, 이때의 성의 둘레는 1,164척, 높이 16척, 마병과 보병은 175명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1597년(선조30)에 이경록(李慶祿) 목사에 의해 군기와 창고를 이곳으로 옮겼으며, 1599년 성윤문(成允文) 목사 때 성산진을 철수해 방어 중심을 이곳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림 속의 건물이 있던 자리엔 학교 교실이 들어섰고 건물 뒤 성담에는 대나무가 우거졌다. 학교 건물 남쪽으로 돌아가며 독서실, 급식소, 유치원이 들어서 있어 공간이 빠듯하다. 학교 건물 뒤로 유치원 놀이시설을 거쳐 운동장으로 나오는데, 서너 명의 아이들이 샘물이 있었음 직한 자리에서 종이 비행기 날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