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5) 별방시사(別防試射)

김창집 2002. 12. 18. 13:17
                        (김남길이 그린 '별방시사' 그림 부분)
 ▲ 새로 복원된 별방진성 위에 올라서 
 보강 취재를 위하여 별방진성을 다시 찾은 것은 추석 전날인 9월 20일이었다. 이번 찾았던 8월 30일에 제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제15호 태풍 루사는 전국적으로 184명의 인명 피해와 5조 4,696억 원이라는 엄청난 재산 피해를 내고 사라졌는데, 이곳에도 그 횡포의 흔적이 역력하다. 코스모스가 하나둘 피기 시작하던 길섶엔 꽃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잎을 다 떨구어버린 아카시아, 멀구슬나무, 팽나무에다 새살처럼 연한 잎사귀를 달아놓았다.
 전국체전을 유치한 당국에서 코스모스 대신 메밀꽃을 옮겨 심는다던데, 글쎄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할는지? 진드르 도로변에 잎사귀를 다 떨군 벚나무가 별처럼 드문드문 꽃을 피웠다. 그런데도 김녕 못 미쳐 오른쪽 동산에 서 있는 소나무 다섯 그루는 그 바람을 몸으로 다 이겨내고 의연히 서 있다.『용비어천가』제2장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가 많으니….'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저 나무에서 바람을 이기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차를 세우고 당근 밭을 살펴보았으나 침수 흔적이 있는 몇 군데를 제외하곤 피해가 크지 않아 보인다. 멀리 행원리에는 지난번 폭풍경보로 멈췄던 풍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안도로를 통해 하도리에 도착하여 조심스레 복원된 별방진성 위로 오른다. 성 위에 도요새 몇 마리가 앉아 쉬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날아간다.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며 300년 전을 떠올린다. 바로 눈앞 객사에서 이형상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교사장이 시범으로 활솜씨를 보이고, 아래에서는 사원들이 실력을 겨루고 있다. 이 날 시사에는 각면 교사장 10명과 사원 208명이 참가했다. 그 너머 남문 안에는 소와 말을 점검하기 위해 목책과 울타리를 설치해 놓고 말을 끌어들이고 있다. 동문 밖에 대기해 있는 검은 소 중 하나가 눈을 흘기자 옆 소가 발끈 성을 내며 싸울 자세를 취한다.  

  (새로 복원된 별방진성 모습)

▲ 세화리에서 성산읍으로 이어진 해안도로
 아무리 성을 둘러봐도 뭔가 허전하다. 게다가 새로 복원된 성 주변은 정리가 안된 채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쓰다 버린 농기구나 가제도구가 뒹굴고 두 개의 샘물은 스티로폼 같은 쓰레기가 물위에 가득하다.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예산을 써가며 성을 복원하였는가?
이왕 시작한 사업, 창고나 병기고는 그만 두고라도 객사와 동문을 복원하고 호수를 아담하게 꾸며 찾아오는 사람에게 진성(鎭城)의 참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한쪽에 전시관을 조그맣게 지어 객사 발굴 때 나온 유물들과 당시 있었던 무기의 모조품이라도 전시하면 좋을 것이다. 내려서 유난히 해안선이 길고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달린다.
 곳곳에 잠녀들의 원활한 작업을 위해 시멘트 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1월 7일에 일어났던 잠수항쟁의 터전이다.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제주어장을 약탈해 왔고,  강점 후에는 어업조합, 해녀조합 등의 관제조합을 통하여 한층 더 약탈을 자행했다. 이 같은 수탈행위와 인권침해에 대해 세화 잠녀 30인이 앞장서
생존 투쟁에 나섰고, 1월 12일에는 세화·하도·종달·연평 등지에서 모인 잠녀 700여명이 세화 장터에서 일대 시위를 벌였다.
            (석다원에서 괴석을 모아 세운 석상)
 처음 해안도로를 개설한다고 했을 때, 환경 보호 단체를 위시한 뜻 있는 도민들은 이를 반대했다. 길이 뚫리게 되면 자연히 관광업소가 생겨 날 것이고,  거기서 나오는 오폐수는 바다를 오염시키게 될 것이라고. 이제 염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도로변 곳곳에 리조트가 생겨나고 음식점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차가 몇 대 세워져 있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어 내려 본 즉, 괴석으로 몸체를 괴여 사람 얼굴 형상의 돌을 올려놓은 석상들이 서 있다. '석다원'에서 세운 것인데, 그곳에선 전복죽과 손칼국수, 전통차를 팔고 있다.
석물을 좀 더 손질하고 주위를 말끔히 정리했으면 좋으련만….
▲ 지미봉 정상에 올라 봉수대를 살피며
 환해장성 잔해를 살핀 뒤, 밀물 때문에 길이 끊겨 문주란 자생지 토끼섬은 가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린다. 바다로 돌출한 곶에 이어서 조그만 모래사장이 나타난다. 구석에 지난여름 이 해수욕장의 샤워장 역할을 했던 구조물이 보인다. '1,000원'이라고만 투박하게 쓰고, 페인트조차 칠하지 아니한 합판이 엉성하게 서 있다. 
 눈앞에 지미봉이 그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왼쪽으로 우도와 성산(城山)이 나타난다. 바다 위에 놓은 다리를 지나며 철새 도래지를 살폈으나 오늘은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겨울이 되어야 새들이 모여들 것이다.
'고망난 돌 쉼터'도 괜찮게 조성해 놓았다.
 종달리 포구를 거쳐 일주도로에 통하는 길로 나가다가 '두문포 가든'을 넘어 오른쪽으로 들어서 컨테이너 야적장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따라 50m쯤 걸어가니, 지미오름 표지석이 서 있다. 오름 입구에는 닭의장풀과 며느리밑씻개, 이질풀이 꽃을 피워 나그네를 맞는다.
억새와 띠가 우거진 산길엔 깨끗하게 벌초한 무덤들이 무릇꽃을 피워대고 있었다.50년 정도 되었을 우묵사스레피나무의 인사를 받으며 조금 더 오르니, 오른쪽으로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 나온다. 치매에 효과가 있는 물질을 추출해낸다는 병풀을 보며 15분을 소요해 정상에 다다랐다.

사방으로 탁 트인 봉우리 바로 밑에 산불방지 초소가 서 있고 순력도에 나오는 지미망 봉수대의 모습이 뚜렷하다.
 다만 삼나무와 소나무, 우묵사스레피나무, 보리수나무, 섬쥐똥나무 등의 잡목과 억새, 수크렁 등의 잡초에 가려 세인의 눈에는 잘 안 보일 뿐이다. 이곳에다 잔디를 입히고 간단히 복원해 놓는다면 좋은 역사 교육장 역할을 하리라. 성산봉수와 왕가봉수와 교신했던 이 봉수대에선 바로 눈 아래로 종달연대가 보인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바다와 섬, 촌락과 논밭, 해수욕장과 호수,
그리고 한라산을 정점으로 크고 작은 오름들이 사방에 둘러 있어 제주의 풍광을 다 보는 듯하다.
 

  (강부언이 그린 별방진성과 그 주변 모습)


♠ 2002년 10월 15일자 <제주시정소식지>에 실렸던 것으로 그만 빼먹고 순서가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