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일부터 격주로 발행되는 <제주시정소식>지에 40회에 걸쳐 연재될 글을 발표 되는 대로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제주시청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는 꼭 300년 전인 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이 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로 제주도를 순력하면서 김남길 화공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지금에 와서 제주의 옛 모습과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조천조점'은 조천성 진영에 가서 여러 가지 상태를 점검하는 그림입니다.
* 탐라순력도의 그림 중 '조천조점'
▲ 절제사의 순력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사람들
첫날 화북성을 점검한 목사 일행은 점심을 먹고 조천진으로 향한다. 옛 기록에 조천관이 동으로 30리라니, 갈 길을 따지면 20리 거리다. 차를 타고 가면서 시간을 가늠해본다. 마을로 접어드는 길 양쪽에 세워놓은 차량이 우리를 맞는다. 대섬 앞에서 지금의 조천초등학교 뒷길을 통해 조천포구까지 이어지는 마을길은 조금 넓지만, 그림에는 해안을 따라 통하는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통하여 순력 행렬이 이어져 있다. 이런 식으로라면 서너 시간은 더 걸렸으리라.
"물렀거라! 물렀거라! 절제사의 행차시다!" 태평소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북이 둥둥 울리면 마침 농한기를 맞은 마을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몰려나와 1년에 한번 보나마나한 이런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오색찬란한 각종 깃발들과 독특한 군복을 입은 병사들, 말등에 걸어놓은 목사의 가마, 앞뒤로 이를 호위하며 눈을 부라리는 보졸(步卒)들과 총을 맨 사수(射手)들. 그리고, 성문을 둘러 내걸어 놓은 군기들까지….
철없는 아이들은 오랜만의 눈요기가 즐거워 야단이었겠지만 정작 점검을 받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조방장(助防將) 김삼중(金三重)과 그 휘하 병졸, 또 이들에게 저녁과 아침 식사를 지원해야 하는 마을 어른들은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으리라. 이들 일행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밤새 보초를 서야 하는 병사들과 이 조점 행사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그림 뒤에 숨은 많은 사람들의 수심에 찬 모습이 떠오른다.
* 동쪽 옆에서 본 연북정의 모습
▲ 잘못 알려진 연북정(戀北亭)에 대한 기록들
연북정에 올라 그림을 펴놓고 사방을 둘러본다. 다행히 이곳 성을 비롯한 주변 환경은 거의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건너편에 바다를 매립, 독특한 모양으로 지은 양진선원(養眞禪院) 외에는 주택가와 상가가 대부분 남쪽 일주도로변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어 조천조점의 옛 모습을 살피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더욱이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정자가 세워져 있어 이곳에 오르면 연북정을 축으로 사방을 둘러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제주도유형문화재 제3호 연북정은 조천성문 옆에 남동향을 하고 있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평범한 제주 민가형 건물로 지붕의 모습과 그 물매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연북정은 객사(客舍)로, 원래 조천성 밖에 있었다고 하나 1590년(선조 23)에 이옥(李沃) 절제사가 성의 남쪽으로 옮겨 세워 '쌍벽정(雙碧亭)'이라 하였고, 1599년(선조 32)에는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그 건물을 중수하며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했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경찰관 주재소로 사용되었다니 혀가 내둘린다.
* 연북정 현판
그런데 요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새 자료집을 보면, 연북정은 '제주에 사는 백성들의 북쪽의 한양을 바라보며 임금님을 사모하는 정을 기리는 정자', '조선 중엽 제주도에 유배되어 온 선비들이 올라 임금을 연모하여 살았던 곳'이라는 웃지 못할 견강부회의 해설을 달고 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럼 유배 온 선비들은 유람 다니듯 섬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단 말인가?
제주에 왔다 가는 관리들이 동풍이 불기를 기다리며 아침에 일어나 이곳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에 배례를 올리고,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눈 뒤 하늘을 바라보며 일기를 예측하거나 혹 들어오는 배가 있으면 한양의 소식을 듣던 곳이다. 지금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했다면 제주읍성 안에서 기거하다가 당장 달려와도 될 것을, 그렇지 못하던 시절이기에 언제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을 기다리며 무작정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 조천 비석거리의 비석들
▲ 현무암 쌓기의 예술, 조천진성의 울타리
성 울타리를 한 바퀴 돌며 조점 당시를 회상한다. 사방을 두른 군기(軍旗)가 펄럭이고 삼엄한 경계 아래 성정군 423명의 점검이 끝나 각종 군기(軍器)와 집물의 수입 상태와 보존 상태, 숫자를 확인한다. "왜 이렇게 녹이 슬었는가? 이걸 가지고 싸움할 수 있겠는가?" 검사관의 추상같은 호령에 기죽은 병사가 우물쭈물 대답한다. "예, 시정하겠습니다." 순력도에 따르면, 이 날 중산간에 있는 조천진 소속의 목장인 2소장(二所場)에도 검사관을 보내어 목자(牧子)와 보인(保人) 합쳐 87명과 말 505필을 점검하기도 했다.
그림에는 동서로 길게 지은 군기고, 그 뒤로 동쪽 구석에 자리한 객사, 오른쪽에 마구간으로 보이는 집과 북쪽으로 바짝 붙여 지은 막사들이 뚜렷하나 지금은 풀만 무성하다. 성 위에는 잔디를 입혔는데, 별같이 노란 꽃을 피운 돌나물과 자줏빛의 등심붓꽃이 피어 반긴다. 가만히 앉아서 돌 쌓은 솜씨를 살폈다. 높이 9척, 둘레 428척이었다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다. 특히 바다에 면한 동쪽 성벽은 예술품이다. 둥근 면이 많은 부정형의 현무암을 가지고 몇 백년 동안 몰아치는 파도와 비바람에도 끄덕 없게 쌓아 놓은 저 솜씨.
* 새로 복원한 관곶연대
한 바퀴 돌아 성문 쪽으로 내려 왔다. 연북정 축대에 기대어 정주먹이 부러진 채로 서 있다. 성밖에는 병사들이 사용했음직한 우물이 있고, 아주머니 두 분이 고무로 된 잠수복을 입은 채로 우뭇가사리 널기에 바쁘다. 선착장 양쪽에는 가건물을 지어 놓았는데 어부들이 어구 손질이 한창이고, 전함과 객선을 세워놓았던 관포(館浦)에는 줄줄이 어선이 매어져 있어 이제 어업 전진기지로 바뀌었음을 알린다. 조천 선적의 동진호, 진흥호, 일진호, 성광호, 청해진호, 외항 방파제 쪽으로 여수 선적의 영덕호, 동현호, 희망호….
배부른동산에 서 있는 관곶연대(館串煙臺)에는 작년 한라문화제 때 불의 축제를 하면서 쌓아놓은 타다 만 나무가 무너진 채로 을씨년스럽다. 혹 어린 학생들이 찾아와 보면 오인하기 쉽겠다. 오래된 기와집을 찾았더니, 150여년 전 김행임(金幸任) 씨가 지었다는 그의 종가(宗家)와 고풍스런 김세혁(金世革) 씨의 집이 돋보였다. 제주도기념물 제31호 비석거리엔 옛 비석에 이어 대책 없이 새 비석을 세워 놓았다. 골목길에서 폐허가 돼버린 물통을 보았는데 치수기념비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수도가 없을 당시에 그 것을 시설해 놓은 분의 덕을 기렸던 것일 터. 그래,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조천조점 그림에 나오는 바다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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