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제주시정소식'에 실렸던 글입니다.
* '탐라순력도' 중 '김녕관굴' 부분
▲ 매장문화의 현주소, 입산봉의 무덤들
김녕사굴로 가는 길에 입산봉(笠山峰)을 먼저 찾았다. 탐라순력도 김녕관굴 아래편에 나지막한 오름을 그려놓고 봉수대 그림과 함께 입산망(笠山望)이라 적혀 있기 때문이다. 서쪽 진입로로 들어서서 '입산봉 공동묘지' 표석과 함께 처음 마주친 것은 박씨 가문의 위령실. 산비탈에 잘 다듬은 돌들을 수직으로 세우고 '숭조(崇祖)·애종(愛宗)·육영(育英)'이라는 글 아래로 석실문을 달아 양쪽에 박혁거세 이후 중시조까지, 또 중시조부터 지금까지의 가계도를 새기고 있다. 1999년에 세운 납골당으로 옛 무덤에 세웠던 석물들을 옮겨놓았는데, 앞에 세운 동자석의 미소가 곱다.
제주도 무덤의 역사는 고인돌로 시작된다. 지금까지 본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대체로 90여기 정도 되는데, 그 중 상당수가 아직 확인되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곽지1식의 적갈색경질토기가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기원을 전후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천년 동안의 무덤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제주지방기념물 제38호인 12세기 중엽의 고조기묘(高兆基墓)나 탐라왕자묘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하원동의 제주지방기념물 제54호인 3기의 무덤 등이 확인될 뿐이다. 이로 보아 지금과 같은 제주도의 매장문화는 15세기 중엽에 부임했던 기건(奇虔) 목사 이후에 퍼졌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들어가 금산농장으로 난 길을 오르니, 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산등성이 주변과 동쪽, 남쪽사면은 빼곡이 들이찼다. 다른 공동묘지에는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는데, 이곳은 무질서하긴 마찬가진데 돌로 경계를 표시해 놓은 것이 다르다. 산담을 번듯하게 두르고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으로부터 어린아이 무덤인 듯 보이는 작고 낮은 것도 있다. 간혹 천주교의 무덤 양식을 띤 직사각형의 석곽 위에 잔디를 입힌 것, 유골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멘트 구조물 위에 표석을 세운 것도 보여, 예의 박씨 가문 납골당과 함께 매장문화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정상 봉수대가 있었음직한 곳엔 크고 작은 무덤 3기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삼각점 표지도 아예 산담 위로 올라가 있었다. 내려오면서 살펴보니 가족묘지로 옮겼는지 파헤친 묘터가 여럿 눈에 띈다.
* 무덤이 매우 많은 입산봉 전경
▲ 김녕사굴은 폐쇄되고 만장굴만 개방
김녕사굴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는 협죽도(夾竹桃)가 심어져 지금 막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다. 잎이 얼추 버드나무 모양이고 꽃은 복숭아꽃을 닮았다고 하여 유도화(柳桃花)라고도 불리며 인도 원산으로 따뜻한 곳이면 아무 데서나 잘 자라 1920년경에 수입되었다고 한다. 그림에는 노송들이 많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은 3∼40년생 소나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만장굴 주변엔 쉼터가 조성되면서 소나무 사이사이에 멀구슬나무, 후박나무, 동백, 구실잣밤나무, 노가리, 우묵사스레피, 식나무, 돈나무 등 향토 수종을 심어 잘 가꾸어 놓았으나 가끔은 외래수종이 섞여 아쉬움이 남는다.
조천관에서 첫날밤을 보낸 목사 일행은 10월 30일 별방진성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쉬게 된다. 양력 12월 18일의 날씨로 미루어 말이 과참(過站, 이동 중에 장소를 정해놓고 쉬는 일)이지 김녕사굴을 보기 위해 만든 일정인 듯하다. 그림에는 말고삐와 군기를 잡고 앉아 쉬고 있는 군사들, 횃불을 밝히고 굴 입구로 들어가는 목사 일행, 경계를 위하여 몇 명의 군사가 미리 제2굴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 제주에는 많은 동굴들이 발견되어 더러는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동굴이었고, 게다가 서련(徐憐) 판관의 전설적인 무용담이 전해지고 있어 그냥은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중학교 3학년(1962) 당시만 해도 아무 시설도 안 해놓아 그냥 횃불을 들고 들어갈 수 있었던 사굴은 낙반사고가 우려돼 폐쇄되었고, 대신 그 후에 발견된 만장굴(萬丈窟)만 단장하여 일반인들에 개방하고 있다. 공개 관람지역인 제2굴 안으로 들어서는데, 안개가 피어올라 주위 숲에 어리면서 서늘한 기운이 엄습한다. 마치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연중 11∼21℃를 유지한다니까 피서지로는 그만이겠다. 비가 온지 얼마 안 되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굴속을 걸으며, 겉은 차차 식어져 굳어버리고 속은 용암이 흐르면서 생긴 용암조흔에서 자연의 신비를 느낀다. 돌기둥 앞에서 되돌아 나오다 등불 아래에 낀 파란 이끼를 보며 인위적인 시설로 생긴 생태계의 변화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 김녕사굴 입구 모습
▲ 기념품 가게와 향토 음식점에 들러
요즘의 관광은 보고 듣는 것은 물론 즐기는 쪽으로 가고 있다. 즐긴다고 함은 체험에서부터 놀고먹고 쇼핑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굴을 나와 휴게소 가운데 자리한 기념품점으로 향했다. '제주특산품 매장' 앞에는 돌 화분에 심은 춘란과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다. 입구 전시대에 선인들이 사용했던 민구(民具)들이 전시돼 있어, 혹시 파는 건가 물어보았더니 전시용이란다. 물론 이곳 기념품점만 지적하는 건 아니지만 도내 관광지 곳곳에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조잡한 상품들을 팔고 있다. 그나마 한쪽에 진열된 갈옷, 돌하르방, 흑산호, 유채꿀, 오미자차, 고소리술 등이 명맥을 지킨다고나 할까.
옆에 있는 향토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쑥막걸리와 좁쌀막걸리가 있다기에 한 병 시켜놓고 차림표를 본다. 돈까스, 비빔밥, 김치찌개, 해물탕, 매운탕, 갈비탕, 제육볶음, 멸치국수, 생선묵, 냉면, 해물파전이 있고, 향토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옥돔구이, 우럭구이, 성게국, 옥돔국, 만장굴정식이 있다. 점심 때였으면 만장굴 정식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름이어서 막걸리가 좀 실 거라고 하는데 심하진 않았지만 예전에 마시던 좁쌀술 맛은 아니다. 올 2월 경남 산청군에 있는 문익점 면화시배지에서 마셨던 이른바 조껍데기술과 흡사하다.
나오면서 제주판관 서련공 사적비가 있는 김녕사굴 앞으로 들어가 보았다. 1972년에 세운 비석에 의하면,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마을 처녀들을 제물로 바치게 하던 민폐를 과감히 해결한 서련공은 1494년에 태어나 18세에 무과급제하고 19세에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여 22세가 되는 해인 1515년에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의 훼손 방지 및 국가유산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2011년까지 통행을 제한한다는 간판을 바라보며, 가시덤불 저편 굴 아가리 속에서 다시 커다란 구렁이가 자라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 앞선다.
* 일주도로변 김녕사굴 입구에 서 있는 일붕 서경보 선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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