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돔)
▲ 현해탄(玄海灘)은 알고 있다
마지막 날 우리가 묵을 곳은 큐슈섬의 북쪽에 위치한 겐가이 로얄 호텔이었다.
아소산을 나온 우리는 호텔까지 이동하는 긴 시간을 이용해서
이번 답사에서 느낀 점을 돌아가면서 이야기했다.
그래야 자기 자신의 여행을 정리하고 집에 가서 얘기할 걸 미리 생각해 보게
되기 때문에 나는 그런 시간을 꼭 가지게 만든다.
1호 차에는 걸쭉한 입담을 가진 한 분이 있어 시종일관 Y담으로
배꼽을 쥐게 했다는데, 우리 2호 차는 일본 역사와 지리에 해박한 가이드
유한숙 씨가 시간 나는 대로 얘기하다가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 전문적인
얘기를 하도록 주문했다. 예를 들면 도자기의 역사라든지 임진왜란,
화산(火山), 성(城)에 대한 이야기 등등.
때문에 한쪽은 아카데믹한 분위기인 반면,
한쪽은 짜릿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여기서도 해당되나?
우리가 가는 곳의 앞 바다는 한국에서는 '현해탄(玄海灘)'이라 하지만
일본에서는 '겐카이나다(玄界灘)'라 하는 해역으로 동쪽의 오시마섬(大島)에서
서쪽의 이키섬(壹岐島)에 이르는 수심 50∼60m의 얕은 바다인데,
많은 섬과 암초가 산재한다.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을 강하게 받아 파도가
거세기로 유명하며, 예로부터 일본에서 대륙 왕래의 주요 통로가 되어 왔고,
13세기말에는 원(元)나라의 일본 침입로가 되었다.
또 8·15광복 전에는 부산∼시모노세키(下關) 간 연락선이
이 해역을 왕래하면서 한민족이 품었던 애환을 말없이 지켜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안 일대에는 명승지와 사적이 많으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갑자기 어렸을 적 보았던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가 생각난다.
1961년에 한운사(韓雲史)의 원작을 김기영(金綺泳)이 감독, 공미도리,
김운하, 이상사와 이예춘이 출연하고 한국예술영화사가 제작한 영화로,
전쟁 중에 학병으로 끌려간 한국 청년과 일본 여인의 사랑 이야기로 기억된다.
아로운 역의 김운하가 기합을 받고 전쟁을 치르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히데꼬와 끝까지 아름다운 사랑을 펼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또 하나는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일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던 중 검거되어
마루타로 희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시인 윤동주)
저녁을 끝내자마자 몇 사람이 모여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가로등이 켜진 쪽으로 걷다보니 분명히 주택가인데도 길이 끊어져 있다.
할 수 없이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먼저 나갔던 일행이 왼쪽으로 갔더니 조그만 마을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길래 우리는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가도가도 끝이 안 보여
그냥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온천이나 실컷 하기로 한다.
우리가 묵었던 겐까이(玄海) 로얄 사쯔키 온천은, 호텔 공사 때 발견된
이 마을 최초의 온천이다. 약알칼리성 단순천으로, 신경통, 근육통,
관절염, 오십견, 운동마비, 치질, 만성소화기병, 냉한 체질, 피로회복 등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 후쿠오카(福岡)에서 볼만한 곳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운동화를 빌어 신고 조깅을 나섰다.
어젯밤에 가다가 돌아온 곳을 더 가보고 싶은 유혹이 일었기 때문이다.
소나무 우거진 길을 내달으며 주위를 보니 식물 분포가
우리 제주도와 다름이 없다. 소나무 사이에 청미래덩굴 섞인 거 하며
억새가 피어 있는 것이…. 어제 갔던 곳에서 얼마 안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은 우리 나라 농촌처럼 집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골프 연습장이 보이고 유리공예 하는 집이 있고, 일식집 식당이 있었다.
어제 조금 더 걸어 이곳까지 왔더라면 일본 음식과 술을 마실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는데 아쉬웠다.
이곳이 목재의 집산지라고 하더니 나무백화점까지 들어섰다.
돌아와 뒤늦게 온천욕을 하고 나서 아침식사는 뷔페식으로 했다.
자리돔 구운 것과 전갱이 새끼 구운 것이 눈에 들어와 가져다가 먹어본다.
옆에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되었지 싶은 아들과 유치원생 정도 된 딸을 데리고
여행 온 젊은 부부가 앉아 있다.
나중에 공항에서도 보았지만 이곳까지 쉽게 여행 다니는 걸 보니 부러웠다.
12시에 제주 직행 비행기를 타는 60명과 함께 공항 가는 길에 면세점을 들렀다.
은행이 매달린 은행나무가 늘어선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면세점에서
디지털 카메라와 이틀 동안 수업을 대신 해달라고 부탁한 두 선생님을 위해서
차를 두 통 샀다.

(신사에 걸어놓은 소원을 적은 쪽지들)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는데 커다란 가방 두 개가 없다.
물어본 즉 호텔 로비에 내놨는데 안 실었다는 것이다.
이곳 일본의 보통 호텔은 종사원들이 적기 때문에 자기대로 싣고 내려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그만 깜빡 한 것이다.
인건비가 많이 드는 일본에서는 사람을 적게 쓰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서비스를 받을 수 없어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때문에 팁도 필요 없다. 전화를 해보니 그대로 짐은 거기에 있다고 한다.
비행기 시간은 아직도 두어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호텔 차나 콜택시를
부르면 되겠다 싶어, 나머지 오후 2시에 부산으로 갈 14명은
공항을 빠져 나와 다자이후(太宰府)로 달린다.
이곳 후쿠오카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장이니 만큼 볼거리들도 많다.
시내와 근교로 나누어 시내는 하카타 역 주변과 덴진(天神), 나카스(中洲),
하코자키하치만(崎八幡宮), 오호리 코엔(大濠公園),
겐카이코쿠테이 코엔(玄海國定公園), 후쿠오카 돔과 후쿠오카 타워,
세이후쿠지(聖福寺), 스미요시 진자(佳吉神社), 구시다 진자(櫛田神社),
시카노시마(知賀島) 등이 가 볼만하다. 근교에는 다자이후덴만구(太宰府天滿宮),
다자이후 세이초아토(政廳跡), 아라히토 진자(現人神社),
가즈가 진자(春日神社) 등이 있다. 이밖에도 시간만 있다면
여러 신사와 공원, 절, 성터 등이 산재해 있다. 신라군의 침입에 대비해서
쌓았다는 대야성터와 미즈키 유적지도 있다는 설명이다.
▲ 일본의 신사(神社)와 다자이후덴만구(太宰府天滿宮)
일본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은 신사(神社)다.
새를 상징하는 '하늘 천(天)'자 모양의 신사 문을 보고 있노라면
일제 강점기 때 우리를 못 살게 굴었던 '신사 참배'가 생각난다.
혹 신사 참배를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오해다. 신사 문화는 천황과 관련된 것이 아닌 만큼
이를 이해하려면 일본의 종교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국교라고 특별히 정한 것도 없고, 신토(神道)가 일본의 대표적인
종교가 되는 셈이다. 불교도 전통 종교로서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 신토(神道)쪽에 가깝다. 신토는 유교와 불교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일본인의 생활과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다자이후 궁)
신사(神社)는 우리 나라의 신당(神堂)과 비슷하게 신(神)을 모셔둔 곳이다.
여기서 신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과 같은 절대, 유일의 존재가 아닌
그냥 평범한 신들이다. 신격의 대상은 일반 사람인 경우도 많다.
이곳에 모신 신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인간의 행위나 윤리 도덕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호신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다.
곳곳에 수호신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신격화해서 만들어진 것이 신사인 것이다.
따라서 각 신사의 주인, 즉 다시 말하면 그 신사에 모셔진 사람은
역사상 유명한 사람이거나 천황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빌 때마다 그 해당하는 신사에 가서 빌게 된다.
그러나, 신사가 다 평등한 것은 아니고 모시고 있는 신들의 종류에 따라
사격(즉 등급)이 정해진다. 일본 신사의 종묘(宗廟)이자 최대의 신사는
그들의 전설적인 시조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을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미내현(三重縣)의 이세신궁(伊勢神宮)이며 제2의 신사가 이즈모의 개척신
오오쿠니누시노오오카미(大國主大神)을 모시고 있는 이즈모 대사(出雲大社)다.
그렇다고 일본의 신사들이 그들의 개국 신화와 관련된 신들만을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을 모시는
신사도 무려 2,000여 곳이나 되고, 최근 정치인들의 참배로 문제가 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는 2천만의 죄 없는 아시아인들을 잔혹하고 처참하게 살해했던
246만 전범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신사 정원 나무에 소원 쪽지가 새하얗게 붙어 있는 모양)
그렇다면 일본인에게 있어 신사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일본에는 대형건물이나 조그만 구조물은 물론이고 웬만한 집에도
소형 신단을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신사는 그들 생활의 일부분이다.
특징적인 것은 여타 종교와는 다르게 신사에는 내세관이 없다는 점이다.
매일 아침 신사에 참배하며 기원하는 내용은 주로 가정의 무사안녕이나
사업의 번창, 자녀의 명문대 합격 같은 것이다. 집집마다 신을 하나씩
모시고 자기가 빌고 싶은 것을 비는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신사가 일본에는 전국에 10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905년에 창건된 다자이후 덴만구는 '학문의 신'으로 추앙 받는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제사 지내는 곳이다. 다자이후에 좌천되어
있던 미치자네는 903년 가난과 병고로 죽게 되었는데,
시체를 싣고 가던 마차가 이곳에서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곳에 매장하고 안락사(安樂寺)를 건립하였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이 마을에서는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사람들은
미치자네의 벌로 믿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정일위(正一位)를 하사하고
덴만구(天滿宮)로 모시게 되었다. 들어가는 길 양쪽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고 신사 문을 지나자 오래된 녹나무와 매화나무가 가득하다.
마침 제일(祭日)이어서 제를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1100년을 맞는 보물 전시회가 있어 관람했다.
이곳은 팔공산 갓바위처럼 입시에 신통하다고 참배객들이 몰려들며,
그러다 보니 전국 여러 곳에 미치자네를 모시는 덴만구를 세웠다고 한다.
▲ 마지막 점심으로 먹은 우동
우리 부산을 거쳐가는 14명을 위하여 가이드는 일본 정통 우동을 먹을
기회를 마련했다. 인원이 적기 때문에 공항으로 가는 도중 한 우동집에
예약을 해놓았던 것이다. 일본에는 우동 전문점도 많다.
전철역 한 귀퉁이에 있는 서서 먹는 간이 우동집부터
조그만 온천 마을에서 몇 대째 대물림으로 전수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동집에 이르기까지, 그만큼 종류도 다양하고 찾는 사람들이 많다.
라면집도 많아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곳을 찾아다니며 먹는 미식가
관광객도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하우를 살려 국물과 재료를 특별하게
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일본 전국의 신들이 모여 1년에 한번씩 회의를 연다는 이즈모다이샤 신사)
우리가 간 곳은 50석 정도 규모의 우동집이었는데 커다란 그릇에 야채를
듬뿍 넣어 양이 많았지만 맛이 담백하여 잘 먹을 수 있었다.
물과 우동만 주기에 가이드에게 단무지는 안 주는가 물어보니까
우동에 딸려 나오는 것이 아니고, 따로 시키면 몇 조각 넣고 250엔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침 갖고 간 포장 김치 한 봉지가 남아 있어 꺼내
먹어도 되느냐고 물어보니 안 된다고 혀를 내두른다.
마늘 냄새를 풍겨 다른 손님들이 학을 떤다는 것이다.
우리 김치는 젓갈과 마늘, 그리고 고추를 많이 쓰기 때문에
이런 재료를 쓰지 않은 달착지근한 그들의 기무치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일본에서 사시미를 시키면 우리 나라의 회와는 달리 좀 크게 썬 고기
서너 점을 내놓는다. 그것을 간장을 조금 찍어 생선의 맛을 즐기며 오래
씹어 먹는다. 몇 년 전 보름동안 오사카(大阪)에 머물면서 나라(奈良)와
교토(京都)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녁 무렵 백화점에 가보니 펄쩍펄쩍
뛰는 생선을 몇 개로 나눠 무게를 달고 값을 표시해 파는 곳이 있었다.
비싸지만 적게 먹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조그만 식품 가게에도 랩으로 싼 사시미용 참치를 팔고 있어
사시미를 좋아하는 이들의 식성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제주도로 관광 온 일본 사람들은 우리 나라 식으로 파는
회를 실컷 먹고 간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생각해본다. 뱃길을 이용해 서로간의
사절들이 오가던 시절에는 양국 사신들이 이 후쿠오카 항을 이용해 다녔고,
일제시대의 관부 연락선이 그 애절한 고동소리를 울리던 곳도 바로 이 항구다.
지금도 현해탄을 건너 부산까지 뱃길이 열려 있어 쾌속선으로는 다섯 시간이
채 안 걸린다. 항공편으로는 김포에서 1시간 10분, 김해에서는 40분이다.
그래서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비록 우리 나라와는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지만 일본인들의 깊은 속은 잘 모른다는 뜻이겠지.

(히로시마의 미야지마[宮島])
사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동북아 끝에 위치한 조그만 섬나라에
불과했다. 19세기 중반 개항을 강요당할 때에도 서구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 가는 약소국의 하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당당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아시아를 경영하기 위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것이다.
세계는 일본의 팽창에 제동을 걸려고 전쟁에 참여했고 미국의 원폭 투하로
패전국이 되었다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로부터 불과 몇 10년 뒤 일본은 경제 대국으로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지구 땅덩어리의 0.3%에 불과한 일본이
세계 경제의 10%를 차지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 부를 바탕으로 자기 반성은 하지 않고 저들의 잘못된 역사를 은폐하고
합리화시키면서 침략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엄청난 돈을 뿌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도록 주문하고 세계 곳곳에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투자함으로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도 일제 강점기에 그들에 의해 조작된
왜곡된 역사를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김해공항에 내려 수속을 마친 시간이 3시 10분. 생각 같아서는 아시안게임을
보고 싶었지만 일행을 모시고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앞당겨 4시 10분 비행기
탑승 수속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 비 내리는 김해공항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김치를 펼쳐 소주를 한 잔했다. 시금털털한 김치와 알싸한 소주가
뱃속으로 들어가니 3박4일의 느끼함이 시원하게 가셔진다. <끝>
♥ 그 동안 '일본 답사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 다음 호부터는 '오름 이야기'가 나갑니다.

(우에노 공원내의 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