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7) 정의조점(旌義操點)

김창집 2003. 1. 10. 16:10


(눈이 소복이 쌓인 돌하르방)

▲ 돌하르방! 별고 없으시우까

성읍 민속 마을 정의현성 남문. 자주 찾아오는 곳이지만 오늘 따라 새롭게
느껴진다. 양쪽에 서 있는 두 쌍의 돌하르방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는 체를
한다. 1653년(효종4)에 이원진(李元鎭) 목사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참고하여 편찬했다는 '탐라지(耽羅誌)'나 이형상
(李衡祥) 목사가 제주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이듬해인 1704년에 저술한
'남환박물(南宦博物)'에 돌하르방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형상 목사가
순력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돌하르방'이란 말은 요즘에
와서 불려지는 이름이고, 과거엔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옹중석(翁仲石)'
이라 불러왔다.

돌하르방이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담수계(淡水契)에서 펴낸 '탐라지(耽羅誌)'
에서다. 여기에 '1754년(영조30) 목사(牧使) 김몽규(金夢奎)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증이 서질 않는다. 지난 10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천굴 주변을
정리해 놓은 일출랜드에 가보니까 제주읍과 대정현, 정의현의 돌하르방을 새로
만들어 한 자리에 새워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같이 놓고 보니까 지역 특성이랄까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지금같이 교통이 편하고 쉽게 만들 수 있었다면 한
곳에서 만들어 실어다 세웠을 테지만 제주읍의 것을 보아다가 눈짐작으로 여럿이
만들다 보니 그런 차이를 보이는 것이리라.



(돌하르방의 세 얼굴, 제주시, 대정읍, 정의현 순)

돌하르방이 원래 섰던 자리는 3읍의 성문 앞이다. 제주읍에는 동문, 서문, 남문에
네 쌍씩 24기, 정의현과 대정현에는 두 쌍씩 24기, 도합 48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 민속박물관 입구에 2기가 가 있고, 나머지는
도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돌하르방은 지방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제주의
상징처럼 돼 있는데, 한 때는 몽골 석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섣부른 추정을 했으나
시기적으로 어림없는 일이고, 돌로 만든 사람 모양을 한 석상(石像)은 한반도는
물론 세계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돌하르방은 성문 앞에 서서 위엄을 보이면서
수호신적, 주술적, 금표적(禁標的)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육지의 돌장승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영화 '이재수란'의 무대가 되었던 정의현성

잎은 말라버리고 하늘타리 열매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남문 문루에 올라
휘날리는 눈발 너머로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영화 '이재수란'의 싸움
장면이 떠오른다. 현기영(玄基榮) 선생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각색한 한불 합작의
이 영화가 정의현성을 널리 알린 셈이다. 성은 높이 4m, 둘레 756m로 1423년(세종5)
에 왜구 방어와 현의 보호를 목적으로 쌓았다. 1416년(태종16) 5월에 제주목사 오식
(吳湜)과 제주판관 장합(張合) 그리고 정의현감 이이(李貽)는 계청에 의해 한라산
남쪽 90여 리 땅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을 정의(旌義), 서쪽을 대정(大靜)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새로 복원된 정의현성 남문)

조정에서는 5년 후인 1422년(세종4) 12월 도안무사 정간(鄭幹)에 명하여 정의성을
이곳 진사리(晋舍里)로 옮기도록 하고, 그 이듬해에 3읍 백성을 출역시켜 제주목
판관 최치렴(崔致廉)의 감독으로 성을 쌓게 되는데, 당시에는 성의 둘레가 2,986척,
높이가 13척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동문과 남문, 그리고 성채가 대부분 복원되었
는데, 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고 조금씩 차이가 난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이와 비슷한 시기에 쌓은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성채는 온전하게
남아 있고 민가가 모두 철수되어 아쉽지만, 거꾸로 이곳 성읍은 민가와 나무, 그리고
관아의 일부는 옛 모습 그대로인데 성이 새로 복원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중요민속자료 제69호로 지정된 초가집 고평오(高平五) 가옥을
둘러본다. 낡은 대문 문짝이 오래된 집임을 말해주고 왼쪽 낮은 돌담 너머 우영밭
에는 배추와 무 그리고 마늘이 심어져 있다. 눌굽자리인지는 몰라도 입구가 넓고
비올 때를 대비해 심어놓은 돌다리가 특이하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가 ㄷ자로 에워싼 초가집엔 풍채를 매달았다. 수도를 걸면서 치웠는지 물팡은
안보이고 안거리와 목거리 사이의 공간에는 오래된 동백나무가 서 있다. 조그만
통시가 있어 다가서 보니, 돼지 한 마리가 축 늘어진 채 잠자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 그런지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성읍민속마을의 초가집)

▲ 정의현성의 군기를 점검하는 그림 '정의조점'

이형상 목사와 일행은 1702년(숙종28) 음력 11월 2일에 이곳 정의현성에 도착
하여 3일간 머무르며 세 가지 행사를 갖는다. 그 첫 번째 행사가 정의현성 병사
들의 조련(操鍊)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정의조점(旌義操點)이다. 그림에는 영주산이
영주산악(瀛洲山岳)으로 크게 그려져 있고 왼쪽에 달산봉(達山烽)의 나와 있다.
사실은 남산봉(南山峰)이 더 가까운데 저 멀리에 있는 하천리의 달산봉을 그린
것을 보면 이를 설명하는 사람의 착각이 아니었나 싶다. 높이만 봐도 마을 뒷산인
남산봉은 178.8m이고 달산봉은 136.5m밖에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달산봉에 정의현성에
소속된 봉수가 있어서 그렇다지만 수산봉 역시 정의현성에 소속된 봉수가 있었다.

그림에는 영주산과 궁산촌(弓山村) 사이로 목사 일행이 깃발을 날리며 들어오고
남문 밖으로 유생들이 나가서 맞고 있다. 지금의 천미천(川尾川)은 왼쪽 읍외촌
(邑外村) 너머로 그려 넣고 영천천미(瀛泉川尾)라 써 놓았다. 성문 안에는 창고를
비롯해서 높은 지붕의 객관(客官), 관아(官衙), 지금의 향교인 문묘(文廟)의 위치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당시 정의현은 읍내 1리, 동면(東面) 10리, 서면(西面) 12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민호(民戶)는 1,436호이며, 전답(田沓)은 140결이었다. 부기(附記)에
의하면 이 날 점검한 내용은 박상하(朴尙夏) 현감(縣監) 이하 성장(城將) 2인, 치총
(雉摠) 4인, 성정군(城丁軍) 664명과 목자(牧子)와 보인(保人) 합해 190명, 말 1,178필,
흑우(黑牛) 228수에다 문묘의 제기(祭器)와 제복(祭服), 서책(書冊)을 비롯한 창고의
곡식 4,250여 석이었다.



(탐라순력도 '정의조점' 그림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