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행주산성과 수원화성

김창집 2005. 8. 4. 01:17

(사)탐라문화보존회 경기 남부 답사기 ③

 


 

*  행주산성 권율 장군 동상

 

 

▲ 행주대첩의 현장 - 행주산성(幸州山城) 
 
 지난번 답사 때 행주산성을 넣었기 때문에 이번에 빼려고 했지만 당시 참여했던 분들이 몇 안 되었고, 이왕 고양시에 온 김에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이어서 점심 먹고 가볍게 가보자고 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참가한 회원들은 여행사를 통해 쉽게 갈 수 있는 관광지보다 역사적 문화 유적에 더 무게를 둔 분들이 많다. 하기야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분들로 이루어진 모임이니까.
 

 원래 행주산성은 삼국시대에 흙으로 쌓은(土築) 산성인데, 조선시대 행주대첩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幸州洞)에 있는 이 행주산성은 1963년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성의 넓이는 0.16㎢밖에 안 되는데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며, 위에서도 말했듯이 임진왜란 때 장군 권율(權慄) 장군이 대첩을 이룬 싸움터이다. 


 


 

*  행주산성 권율 장군 동상 뒤 돌을 나르는 여인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 장군은, 12월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과 승장 처영(處英) 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을 노렸다. 이때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부하 장성을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권율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웠다.(백과사전)

 


 

*  행주산성 대첩비

 

 

△ 행주치마는 행주대첩에서 나온 말일까

 

 행주산성으로 들어서서 오른쪽 권율 장군상으로 가서 뒷벽의 그림들을 보면 오른쪽에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 무기가 모자란 아군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적을 상대할 때 돌을 사용해서 올라오는 적군을 무찌를 수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수가 모자란 아군 쪽에서는 부녀자를 동원하여 한꺼번에 많이 나르진 못하지만 나르는 역할을 시킬 수도 있다.   

   

 이 전쟁에서도 부녀자를 동원하여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게 하여 크게 이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치마에 돌을 날랐다고 하여 앞치마를 뜻하는 행주치마란 말이 생겼다는 건 잘 모르고 하는 얘기인데, 어쩌다가 '행주'라는 낱말이 같았을 뿐이다. 이렇게 어원을 넘겨짚어 말하는 것을 민간어원설이라 한다. 


 


 

*  행주산성 권율 장군 동상 뒤 싸우는 군인들 상

 

 우리가 그릇을 훔치거나 씻을 때 쓰는 헝겊을 행주라 하고, 행주로 그릇이나 상 같은 것의 더러운 것을 훔치는 일을 행주질이라 한다. 여자들이 부엌일을 할 때 치마 위에 걸치는 앞치마인 행주치마는 이 행주와 관련 있는 말이다. 여인네들이 부엌일을 하다가 물 묻은 손을 쑥쑥 닦거나 필요할 때 행주처럼 닦는 치마라고 해서 행주치마인 것이다. 

 

 행주치마가 행주대첩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증거는 이미 중종 12년(1527)에 훈몽자회를 쓴 최세진이 편찬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이미 '행조쵸마'('조'의 '오'는 아래아)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지금 관광 가이드들의 십중팔구는 필경 그렇게 설명할 것이나 아니면 아니라고 알고 고쳐야 할 것이다.

 


 

*  행주산성 권율 장군 동상

 

▲ 시민 공원으로도 나무랄 데 없어

 

 도시에서 이 정도로 나무가 우거지고 공기가 맑은 공간을 가졌다는 건 분명히 축복이다.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골치를 썩히다가 퇴근 무렵 동료들과 아니면 연인이나 가족을 불러내서 이곳을 산책한다면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풀릴 것이다. 권율 장군 동상과 뒤의 그림을 둘러보고 나서는데 애기똥풀 노란 꽃이 아는 체를 한다. 

 

 처음엔 조금 오르막이었다가 정상에 서서 땀을 씻고 내리막길로 내려온다면 산책로로도 부족함이 없다. 소나무, 잣나무, 벚나무, 밤나무, 복숭아,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 눈에 익은 나무도 많다. 칡도 꽃을 피워 향긋함을 더한다. 시간 때문에 오른쪽으로 나타나는 사당과 전시장을 들르지 못하고 오후 2시에야 땀을 흘리며 거의 정상에 이르러 정자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즐기면서 복숭아 향기를 맡는다. 


 


 

*  행주대첩기념비 앞부분 조각

 

 원래 산성(山城)은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이 없는 시골의 주변 산에 쌓은 성으로 방어하기에 알맞도록 쌓은 성이다. 흩어진 독립가옥에 살던 주민들이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올라가 힘을 합쳐 적을 방어하던 곳. 정상에 있는 대첩비를 보고 오른쪽으로 내려오는데 가파른 곳에 토성이 남아 있어 돌을 들고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무가 우거지기도 하고 가운데도 분화구처럼 쏙 들어간 것이 아무래도 천연요새다. 내려와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수원으로 가다가 약속 시간을 맞추노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잠깐 들렀다. 경기장은 돈을 안내도 된다는 말만 듣고 진입하다가 무안을 당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흑자경영을 한다는 경기장을 안보고 올 수 없어 단체 입장료 500원씩 내고 들어가 "대-한민국! 짜자자짝짝!"을 몇 번 외치고 잔디를 만져본 뒤 퇴장했다.   

 


 

*  상암경기장 앞의 한일월드컵 마스코트

 

△ 한창 복원중인 수원 행궁

 

 수원 행궁터는 1972년 7월 3일 경기도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행궁인 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임시 궁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곳으로, 수원 화성(華城:사적 제3호)의 부속물이다. 1796년(조선 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莊祖:사도세자)의 능침(陵寢)인 화산릉(華山陵)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다. 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과 경룡관(景龍館)·복내당(福內堂)·유여택(維與宅)·노래당(老來堂)·신풍루(新豊樓)·남북군영·강무당(講武堂)·무고(武庫)·수성고(修城庫)·집사청(執事廳)·서사청(書史廳)·비장청(婢將廳)·우화관(于華館)·득중정(得中亭)·행각(行閣)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  수원 행궁 정문인 신풍루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만 남게 되었다.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인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경의왕후)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집으로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1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을 복원하여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이어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影殿)인 화령전 등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개관식을 가졌다.

 

 


 

*  행궁 마당에 세워 놓은 다산의 거중기 

 

▲ 제주시와 수원시

 

 제주시와 수원시가 자매결연 도시이기 때문에 우리가 수원을 들린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일주일 전에 수원시청 문화과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 시의장님이 일행에 끼었느냐고 묻는 등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더니 우리가 수원에 잠자리를 못 얻어 저 수안보에 자게 된다니까 팔방으로 수소문해서 중소기업 연수원에 숙소를 얻어주는 등 열성을 보이더니, 시간을 약속해 도착하자마자 김낙근 사무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분은 우리 모임에 재무이사를 맡으면서 이번 답사에도 재무 일을 보고 있는 제주시청 김연옥 씨와 자매결연 사업을 줄곧 담당했던 관계로 너무나 잘 아는 분이었다. 휴가 중인데도 나와 우리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이곳의 오늘 일정을 짜놓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행궁 정문을 들어서서 그곳의 문화유산 해설사 분에게 우리를 안내했다.


 


 

*  소원을 들어주는 고목

 

 신풍루(新豊樓)에 올라 신나게 북을 쳐 주무시고 있는 정조 임금께 아뢰게 하고는 복원 계획과 행성과 화성에 대한 얘기를 자세하게 알려 준다. 앞마당 옆에 세워놓은 다산 정약용이 고안했다는 거중기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고목에 대한 얘기, 그리고 그 고목에 소원 한 가지를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까지 마치고는 시간이 늦었다면서 빨리 가라고 궤도차가 출발하는 곳으로 올려 보낸다.   


 

 2010년까지 이어질 2단계 사업에서는 신풍초등학교가 위치한 우화관과 맞은편에 위치한 별주, 내포사 등 화성 행궁의 나머지 3개 건물 94칸과 행궁 담장 등을 복원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란다. 저녁 때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를 배정하는 곳까지 따라와 염려해준 김낙근 사무장님, 그리고 저녁 때 맛있는 수원갈비를 대접해준 윗분들과 관계자 님께 이 난을 빌어 감사 드리며,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제주도로 내려올 때를 기다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수원 행성의 상징 팔달문

 

△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華城)'
 
 화성은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벽으로 1963년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禦牧軒池)·관청전지(官廳前池)·문루전지(門樓前池)·객사후지(客舍後池) 등의 못이 있었다.

 화성이라 할 때는 그 안에 장안문(長安門)·팔달문(八達門)·화홍문(華虹門)·장악당(長樂堂)·북동(北東)·북서포루(北西砲樓)·봉수당(奉壽堂)·낙남헌(洛南軒)·서장대(西將臺)·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강무당(講武堂)·북옹성(北甕城)·북포루(北鋪樓)·남암문(南暗門)·적대(敵臺)·남옹성(南甕城)·만석거(萬石渠)·남장대(南將臺)·영화정(迎華亭)·창룡문(蒼龍門)·남공심돈(南空心墩)·화서문(華西門)·남수문(南水門)·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북암문(北暗門)·동북노대(東北弩臺)·서포루(西砲樓) 등을 갖추게 되었다. 


 


 

*  서북공심포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백과사전 참조)

 궤도 열차를 타고 돌며 구경한 뒤, 교통의 혼잡하지 않은 곳을 골라 차를 운행함으로써 짧은 시간 내에 성의 안팎을 집중해서 볼 수 있어 좋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이 훼손된 부분을 설계도와 당시 세밀한 기록이 있어서 복원이 쉬웠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록 때 통과가 쉬웠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성의 모습에 넋을 잃을 뻔했다. 밤늦게 우리를 위해 신나게 설명해주신 아저씨께도 감사 드린다.

 


 

*  시내를 통하게 하는 화홍문

 

♬ We'll be one by two today - Lo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