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융건릉(隆健陵)과 용주사(龍珠寺)

김창집 2005. 8. 6. 04:44

(사)탐라문화보존회 경기 남부 답사기 ④

 



* 숙소 부근에서 찍은 달맞이꽃

 

▲ 2005년 7월 30일(토요일) 맑음

 

 아침에 깨어 창밖을 보니 좀비비추가 피어 있다. 빈터 여기저기 야생화를 심느라 애쓰긴 했지만 외래종이 많다.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싸리꽃과 달맞이꽃을 찍고 차에 올랐다. 아침에 예약해 놓은 해장국집을 찾느라 수원시내를 거의 한바퀴 돌고 시청 골목으로 들어가 '큰집 돌솥 설렁탕 전문점'에서 아침을 먹었다. 김낙근 사무장이 추천하고 예약해놓은 곳인데 길을 몰라 휴대폰으로 연락하면서 겨우 찾았다. 신문에 '맛있는 집'으로 여기저기서 추천되었던 기사를 오려 붙여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밥맛이 참 좋다.

 

 오늘은 갈 길이 멀다. 토요일을 맞아 강원도로 가는 차라도 밀리면 그만큼 운신이 폭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도 수원(水原) 와서 뺄 수 없는 곳이 오늘의 이곳을 있게 한 사도세자 장조와 정조 임금의 무덤인 융건능과 용주사를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원을 효도의 도시로 불리는데는 정조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한양길을 멀다 않고 찾아와 능에 참배하며, 절을 세워 부모은중경을 만들게 한 일에서 비롯되었으리라.

 



* 융건능 입구에서 본 벌개미취

 

△ 융건릉 가는 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 영조에 의해 당쟁의 희생물로 뒤주 안에 갇혀 생죽음을 당했다. 정조는 나이 불과 열 살에 한 맺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무엇이든 했다. 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은 아버지가 역적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신도 역적의 아들이 된다는 점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며 눈물겨운 효심을 바쳤다. 그리고, 영조의 눈을 어둡게 했던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화성(華城) 천도를 꿈꾸었던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바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蔣獻)으로 올리고 13년(1789)에 이곳에 옮긴 후 융릉(隆陵)으로 바꿨고,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懿皇后)로 올렸다.

 



* 융릉으로 가다 찍은 연꽃

 

 정조는 한 해에 몇 차례 아버지 능참길에 올랐는데, 때때로 눈물짓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죽어서도 끝내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었다. 표를 끊고 융건능으로 들어서는데 오른쪽에 벌개미취꽃이 곱게 피어 있다. 너무 고와서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디카에 몇 컷 담고 따라갔다. 얼마 안 가 길은 양쪽으로 나뉘는데 오른쪽이 융릉, 왼쪽이 건릉이다. 


 참배객을 위해 인사하듯 도열해 선 소나무 아래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융릉으로 가다보니 안개 너머로 멀리 무덤이 보인다. 홍살문과 제각(祭閣)인 정자각이나 능의 모습은 어디나 거의 다를 바 없다. 왼쪽에 연못을 만들어 놓았는데 양은 많지 않으나 마침 연꽃이 피어나고 있어 그 호젓한 모습을 디카에 담았다. 넉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나무도 울창하여 소풍 장소로도 그만이겠다.  
    

 

* 엷은 안개 속의 융릉

 

▲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장헌(사도)세자는 영조 11년(1735)에 태어나 두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세 살 때 벌써 '효경', 7세 때 '동몽선습'을 떼고 시를 지어 대신(大臣)에게 나누어줄 만큼 영특했다. 게다가 효심과 도량, 덕을 겸비하여 장차 왕세자가 될 기량까지 갖추었다. 영조는 마흔에 얻은 외아들이기에 사랑이 각별했다. 그러나, 이렇게 영특한 세자가 10세에 이르렀을 때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비판하기에 이르자 노론 세력은 불안해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들고나서기는 했지만 자신을 왕으로 옹립해준 노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노론의 비리가 빤히 눈에 보이는 세자는 정치가 옳지 않게 돌아간다고 믿었고, 그럴수록 노론에서는 세자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자가 부왕을 대신하여 정무에 임하자 노론에서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숙위 문씨 등을 내세워 모함하여 결국 뒤주 안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 건능으로 가는 숲과 홍살문

 

 융릉(隆陵)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주소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이다. 옆에 있는 정조의 건릉(健陵)과 함께 같은 사적으로 등록돼 있는 것이다. 세자가 1762년 28세에 창경궁에서 죽었을 때 영조가 내린 사도(思悼)는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뜻이다. 합장된 경의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사도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15년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은 뒤 1899년에 경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원래 양주군의 배봉산(拜峰山)에 묘가 조성되어 영우원(永佑園)이라 하였는데 이를 지금의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능 주위에 둘레돌[護石]을 돌리고 덮개돌[床石]과 8각의 장명등(長明燈)과 문석을 세웠으며, 뒤에는 곡원(曲垣)을 올렸다. 정조는 불행한 삶을 보낸 아버지의 묘소를 조성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같은 격의 어느 원(園)보다도 훌륭히 상설(象設)을 하였으며, 이후의 능묘 석물 양식에도 많은 영향을 줄 정도였다. 



 

 

* 건능 앞에 세운 석물 문무인석과 망주석


△ 22대 임금 정조의 무덤인 '건릉'

 

 건릉(健陵)은 융릉 가까이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를 합장한 능으로 생부인 장헌세자의 현륭원(顯隆園) 동쪽 구릉에 있던 것을 서쪽 구릉으로 이장하면서 효의왕후를 함께 묻었다. 그 구조는 동릉이실(同陵異室)로 병석(屛石) 없이 난간만 둘렀으며, 그 밖의 것은 융릉의 예에 따랐으므로 혼유석(魂遊石)은 1좌만 놓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세웠다. 사실적인 수법의 문무석(文武石)은 영정시대 문물제도의 발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건릉으로 가는 길 역시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우거져 아담하고 넉넉한 감을 주었다. 이런 곳이 가까운 데 있다면 조용히 무엇을 생각하거나 번잡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한 번씩 들러 천천히 거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 사도세자의 운명을 그리도 아파하며 자주 능행길에 올랐던 정조는 어느 날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님 근처에 묻어주오." 하고 부탁했던 것이 이루어져 곁에 묻히게 된 것이다.  

 


 

* 용주사 현판

 

 마침 건릉에서는 서너 명의 인부가 예초기로 잔디를 깎고 있어 가까이 접근하여 인사를 한 후 사진을 찍으면서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처음에 건릉은 정조의 유언에 따라 융릉 동쪽 언덕에 모셔졌는데 그 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설이 거론되어 순조 21년(1821) 3월 9일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여기로 이장하면서 합장했다. 건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난간 석주에는 한자로 12지(支)를 표시했는데 방향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융릉의 모습과 같이 합장릉인데도 상석은 하나만 놓았고, 팔각장명등은 둥근 향로와 같은 기단부 위로 잘록한 허리에 안상, 상석에는 면마다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梅蘭菊)을 새겼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양쪽에 말을 데리고 서 있는데, 미소를 띤 것이 여유가 있다. 숲길을 걸어 나오며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주역이라는 정조의 업적을 하나둘 되새겨본다.

 


 

* 용주사 대웅보전

 

▲ 정조의 효심이 어린 '용주사'

 

 용주사(龍珠寺)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華山) 기슭에 있는 사찰로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다. 이곳에는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빈 곳이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 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서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 전시중인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과 석가삼존불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한다. 행랑채 왼쪽에 정조가 심었다는 수령이 200년 된 천연기념물 제264호 회양나무는 아쉽게도 말라죽어 치우려 손을 보고 있었다.

 

 국보 제120호인 범종(梵鐘)은 전시장으로 옮겨 놓았다. 창건 당시 정조는 보경 스님의 '부모은중경' 설법에 감동 받아 김홍도를 불러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부모은중경을 그리게 했고, 이를 목판에 새겼는데 오늘날 용주사의 상징이 되었다.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성된 대웅전 후불탱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탱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모두 둘러본 뒤 독산성과 세마대는 시간 관계로 생략하고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며 서둘러 여주(麗州)로 향하였다.

 


 

* 용주사 후불탱화(부분)

 

♬ 청산에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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