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영릉(英陵, 세종대왕릉)과 영월루

김창집 2005. 8. 7. 07:14

(사)탐라문화보존회 경기 남부 답사기 ⑤

 


 

* 영녕릉 입구에서 만난 부처꽃

 

▲ 이천, 여주로 가는 길

 

 용주사를 출발한 차는 국도를 따라 이천, 여주 방향으로 간다. 42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했는데 토요일을 맞아 원주를 통해 동해로 가는 피서 여행객 때문에 길이 막혀 다시 국도로 빠져 나왔다. 이러 길 여러 차례, 시간은 흐르고 흘러 점심시간이 지나간다. 이 지루하고 아까운 시간을 별 볼일 없는 우스갯소리로만 보내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계속 딱딱한 답사 내용만 설명할 수도 없고 의견 제시도 이미 끝난 상태이다.

 

 나는 답사를 시작하게 되면 적당한 시간을 보아서 돌아가면서 각자 자신이 이번 답사에 참여하게 된 동기와 여행에서 얻고 싶고 것, 그리고 바라는 것 등 답사에 임하는 소감을 말하도록 한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냥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별 생각 없이 온 사람도 다시 한 번 자신이 무엇 하러 왔는지 생각해 보게 되고, 좋은 쪽으로 목표가 정해져 돌아갈 때 다시 소감을 들어보면 그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세종 때 만들어진 물시계

 

 그래서 어제 고양시에서 수원까지 오는 사이에 각자 자신의 소개부터 앞에서부터 시작하여 돌아가며 인사 겸 한두 마디씩 얘기를 하게 했었다. 교통 소통이 원활하다면 고속도로를 통해 4∼50분이면 족할 거리를 2시간이 지나도 감감하다. 배고프다는 성화에 중간에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기사 아저씨와 양쪽 식당을 살피다가 나타나면 달려가 물어보곤 했는데, 국도변에 예약 없이 당장 40명이 식사할 곳이 쉬울 리가 없었다. 

 

 몇 번 실패를 거듭하다가 맞은 편을 보니 휴게소에 한식 뷔페 하는 집이 있어 U턴을 하도록 한 뒤 뛰어 가서 물어본즉 당장 가능하다고 했다. 어디 가든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이어서 거기서 5천 원짜리 경기도식 깔끔한 한식을 마음껏 먹을 수가 있었다. 사실 뷔페란 게 먹을 것이 많은 것 같지만 막상 뜨려고 보면 손이 쉽게 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한식 뷔페의 장점은 고급스럽진 않지만 자신이 먹을 것은 꼭 들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 영릉 입구에 만들어 전시해놓은 해시계


△ 세종대왕과 정조 임금

 

 시간은 마구 흘러가 오늘 일정은 조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후를 수원 화성에서 시간을 다 보내버려 어차피 오늘 일정에서 몇 개 빼야 할 판이었으니까. 박 기사와 의논해서 내일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다가 길이 잘 뚫리면 이천도예촌은 들르기로 하고 대신 오늘 여주 신륵사 입구에 있는 세계도자기 비엔날레 전시장을 보기로 양해를 얻었다.

 

 먼저 세종과 효종이 묻혀 있는 영녕릉으로 간다. 능은 오늘 벌써 두 곳을 보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능의 전범(典範)이 될 만한 영릉(英陵)만 보고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은 생략해야만 할 판이다. 나는 여주에 들르는 기회가 되면 영릉과 신륵사는 빼놓지 않은 편이다. 지난 번 수학여행 때는 영릉은 계획에 넣고 신륵사는 넣지 못해서 새벽에 혼자 일찍 다녀오기도 했다.

 


 

* 영녕 입구의 홍살문

 

 오늘은 정조의 능인 건릉과 세종의 능인 영릉을 함께 보게 되는 묘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세종 임금이야말로 어디다 비길 수 없는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임금이자 대왕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업적 면에서 모든 분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있지만, 나는 업적으로 따져 두 번째를 말하라 하면 정조 임금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꼽는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하들과 토론정치를 구현하고 인재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는가 하면, 그곳에 정유자(丁酉字) 같은 주조활자와 목활자 80여만 자를 만들어 두고 수많은 책을 찍어냈다. 그러자 이곳에는 인재들이 모여들어 검서관직 4명은 서민 출신을 등용하고 당파에 구애 없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인물을 불러 썼다. 그밖에도 장용영(壯勇營) 설치, 형정(刑政) 개혁, 천세력 제정, 노비추세법 폐지, 궁차징세법 폐지 등 49세에 승하했지만 많은 치적을 남겼다.  
 


 

* 영릉에 제를 지내는 정자각


▲ 영녕릉(세종대왕과 효종릉)

 

 영릉(英陵)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는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능으로, 구역 내에 조금 떨어져 있는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어 세종대왕 유적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넉넉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꽤 멀다. 중간에 화단을 조성해 부처꽃, 원추리, 참나리, 비비추 등을 심어 놓았다.  

 

 처음 세종대왕의 능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먼저 돌아갔을 때 광주(廣州) 서강(西岡)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그 우실(右室)은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죽은 뒤 합장하였다. 그 뒤 능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어 1469년(예종 1) 석물은 그 자리에 묻고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능의 형식은 합장이며 널방[玄室]은 돌방[石室]으로 하여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하였다. 병풍석 문양은 간소화하였으며, 이때부터 석상고석의 수가 다섯에서 넷으로 줄었고 능 남쪽 하계(下階)의 동서 계단이 없어지게 되었다.

 


 

* 영릉의 모습(장명등과 상석 두 개)

 

 한편 광주에 있을 때 원래의 능 자리에 묻었던 석물은 1973년에 발굴하여 서울 청량리 영휘원(永徽園) 북쪽에 세운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능으로 1659년(현종 즉위) 구리시(九里市)에 있는 동구릉(東九陵) 자리에 병풍석(屛風石)을 갖추어 조영하였는데,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 이곳으로 옮겼다. 

 

 효종의 능을 이장한 이듬해인 1674년 인선왕후가 사망하여 왕릉 앞에 비릉(妃陵)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분을 이루게 하고 널방[玄室]은 회격(灰隔)으로 하였다. 왕릉을 옮기면서 전에 사용한 병풍석과 사대석(莎臺石)을 비로소 쓰지 않았으며, 왕릉에만 곡장(曲墻)을 만들었다. 이 능의 특징은 난간석에 12지(支)를 문자로 새겨 넣은 점인데, 이러한 수법은 이때부터 생긴 것이다. 영릉비는 김도항(金燾恒)이 짓고, 심익현(沈益顯)이 글을 썼다.

 


 

* 영릉 제각인 정자각 너머로 보이는 봉분

 

△ 영릉의 구조(構造)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뒤로 재실(齋室)이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세종 때 만들어진 측우기를 비롯해서 간의(簡儀),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등을 제작해서 야외 전시했고, 그 뒤로 세종전이 있어 여러 가지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그곳을 지나 훈민문에 들어서면 왼쪽에 못이 있어 커다란 비단잉어와 잉어들이 물소리가 날 정도로 몰려다닌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영릉은 아늑하고 편안해서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명당 자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이름 있는 지관(地官)들의 얘기로는 이 영릉 덕택으로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돌 정도이다. 10개의 홍살이 박힌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에 배위석이 있다. 이곳은 박석(薄石)이라는 얇고 납작한 돌이 깔려 있어 절을 하고 들어가도록 해 놓은 것이다.

 


 

* 여주읍 상리의 영월루

 

 거기서부터 참도(參道)라 하여 박석이 제각(祭閣)인 정자각까지 깔려 있는데, 이곳은 가운데가 좀 넓고 높으며 양쪽은 낮게 되어 있다. 가운데는 신들이 다니는 신도(神道)이며, 양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라 한다. 다른 능에는 왼쪽은 높고 오른쪽은 낮게 된 곳도 있다. 능 정면에 커다란 집은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으로 이곳에는 진설 내용과 제물 놓는 자리를 그려 붙여 놓았다. 그리고 이 제각 못 미쳐 왼쪽에 수라간, 오른쪽으로 수복방이 있으며 조금 올라간 곳에 비각이 서 있다.

 

 비각을 따라 올라가면 참배객을 위해 계단을 마련해 놓았는데 바로 상석(床石) 앞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맨 앞에는 양쪽에 대칭이 되도록 무인석과 무인석이 서 있고 그 뒤로 각각 석마, 가운데 봉분을 중심으로 양옆에 8마리의 양 그리고 담장인 곡장을 둘렀는데 이 구조가 대부분 조선시대 왕릉의 본이 되었다.




* 여주읍 창리 삼층 석탑

 

△ 영월루, 창리·하리 삼층석탑

 

 영월루(迎月樓)는 여주읍 상리에 있는 누각으로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架構)으로 보아 18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 원래 군청의 정문에 있었는데 1925년경 군청 이전 때 현 위치에 누각을 다시 세웠다. 여주읍에서 신륵사로 가는 길에 마암(馬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 언덕이 있어 지금은 공원처럼 꾸며 정상에 15평 정도 규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집으로 2층 서향 누각으로 지어 놓았다. 정면 길이에 비해 측면 길이가 짧아 평면적으로는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장대석 기단에 놓인 높은 사각형 초석 위에 짧은 하층 기둥을 세웠으며, 누마루가 꾸며졌다. 그 위쪽에 상층 기둥을 세웠는데 이익공과 결구되어 오량(五樑)의 지붕 가구가 되었다. 창방이 굵은 부재로 보강된 것은 문루의 가구법과 비슷하다. 상층 누마루 사방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이 설치되었다. 낮은 기단과 긴 몸체, 치켜올려진 팔작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올라갈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살펴보기만 하고 그늘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한강에서 물놀이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 여주읍 하리 삼층 석탑

 

 공원 입구에 비석거리가 있고, 영월루로 오르는 계단 중간쯤에서 오른쪽 방향에 여주 창리 삼층석탑(보물 제91호)과 여주 하리 삼층석탑(보물 제92호)을 옮겨 세웠다. 여주 창리 삼층석탑(驪州倉里三層石塔)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창리에 있는 고려시대 후기의 석탑으로 높이 2.46m밖에 안 남은 화강암제의 사각형 석탑인데 원래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과수원 내에 있었으나, 1958년에 서쪽 강변에 있던 하리 3층석탑과 함께 이전되었다. 

 

 이중기단(基壇) 위에 세운 석탑으로 기단 밑에 이중으로 수매의 석재를 사용하여 지대석을 삼고 그 위에 일석(一石)으로 된 하층 기단 중석을 얹었으며, 2층 이상은 탑신이 급격히 체감되었다. 하층 기단 갑석(甲石)의 복련(伏蓮)이나 상층 기단 갑석의 부연(附椽) 형식은 특이한 양식이다. 여주 하리 삼층석탑(驪州下里三層石塔)은 여주읍 창리에 있는 고려시대 중기의 3층 석탑으로 원래 사지(寺址)에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2중 기단 위에 세운 화강암제 방형(方形) 석탑으로 높이는 3.7m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일석이고 옥개받침은 4단이며 상륜(相輪) 부분은 없어졌다. 부서진 탑만 동그마니 옮겨놓아 일면 초라한 느낌이 들었으나 보물로 지정한 만큼 자세히 살피니 결코 평범하지는 않아 보인다.

 

♬ First Kiss By The Seash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