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탄금대와 중원(中原) 유적들

김창집 2005. 8. 10. 17:26

(사)탐라문화보존회 경기 남부 답사기 ⑦

 



* 국보 제6호 탑평리 칠층석탑

 

▲ 2005년 7월 31일 일요일 맑음 

 

 전날 잠자리가 마뜩치 않아 수안보에서 잤던 일행은 아침 8시에 버스를 타고 마지막 날 답사 일정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묵었던 코레스코 호텔은 오래 전에 콘도식으로 지은 집이어서 낡은 느낌이 들어 앞으로 리모델링에 들어갈 예정이라 했다. 대신 24시간 사우나 온천욕이 공짜여서 어제 저녁을 마치고 몸을 푹 담그고 나서 개운한 마음으로 희망자에 한해 단란주점에 가서 회포를 풀고, 아침에 또 한번 사우나를 해서 얼굴마다 피곤한 빛이 사라지고 매끄러운 기운이 감돈다.     

 

 어제는 목아박물관에서 이곳 수안보까지 이외로 길이 시원하게 뚫려 40여분만에 도착했었다. 오늘은 김포공항까지 가야 하기에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해 충분한 여유를 두고 시간을 조정하겠다고 미리 선포했다. 여주에서 잘 것을 예상했다가 이곳으로 옮기면서 경기도 동남부 지역의 몇 곳을 빼고 이곳에서 가까운 탄금대와,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중원고구려비를 보고 가다가 어제 빼먹은 이천도예촌을 들르면 마지막 코스인 남한산성만 남는다.

 


 

* 탄금대 아래로 흐르는 강

 

△ 격전지이기도 한 탄금대(彈琴臺) 

 

 몇 년 전에 왔을 때 본 느낌으로는 조그만 동산에 있는 아담한 누각으로 기억되었으나 지금은 공원으로 꾸며놓아 충주 시민들의 휴식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있다. 야외 음악당까지 곁들여 있어 문화 행사도 할 수 있겠다.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전해지나 의외로 조선시대에 지은 누각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는데, 제주의 오름처럼 아담한 이곳은 본래 대문산이라 불렀는데 밑으로 남한강과 접하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좋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우륵은 가실왕(嘉悉王) 당시의 가야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을 뽑아보내 악(樂)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이곳을 우거지(寓居地)로 삼고 풍치를 상미하며 산상대석(山上臺石)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 연유하여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고 전한다.

 


 

* 신립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8천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와 배수진을 친 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신립은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천추의 한을 품고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고 하는 100척이나 되는 절벽이 있는데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해 군수 김용은(金容殷)이 건립하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찬한 탄금대비가 있다. 또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과 조각공원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마침 과꽃이 피어 있어 과꽃 노래를 부르며 탄금대로 가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과연 우륵이 가야금을 즐겨 탈 만한 정취임을 느꼈다. 
 

* 국보 제6호 탑평리 칠층석탑 일명 '중앙탑'

 

▲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뚝 솟은 석탑이 우리를 맞는다. 마침 충주전통문화회의 문화유적 투어 담당 이주화 씨가 우리를 반기며 이곳 유적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이 탑은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7층 석탑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14.5m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기단은 각부를 여러 개의 석재로 쌓았으며 상하층 기단 모두 면석에 탱주(撑柱) 4주(柱)씩을 세웠다. 탑신부 역시 각부를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했으며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들었다. 상륜은 노반을 2중으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세부 수법에 있어서 약식(略式)과 섬약한 경향이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도 높이에 비해 너비의 비례가 적어 지나치게 고준(高峻)한 느낌이다.

 


 

* 중앙탑 너머 강가에 핀 부처꽃

 

 1917년 보수시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 장치가 나왔는데 6층 몸돌에서는 경감(鏡鑑) 2매, 칠합(漆盒) 1개, 은제사리병(銀製舍利甁)과 그 안에 들었던 유리제 사리병 각 1개씩이 발견되었고, 기단에서는 청동제 유대합(有臺盒) 1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 경감은 고려시대의 거울로서 창건 이후 두 번째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탑은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하여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전설에는 785년경, 즉 신라 문성왕대(文聖王代)에 세워진 것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 탑은 조국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많은 전란을 겪고도 크게 다친 곳 없이 1,220년을 버텨온 셈이다.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해설사 아줌마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보니 가슴 뭉클한 감동이 살아난다. 이 난을 빌어 이주화 님께 감사를 드린다.  
 

 

* 안개 자욱한 강의 모습(앞의 것은 산뽕나무)

 

△ 중원 고구려비에서 

 

 왠지 모르게 이곳의 수석관은 문을 닫아버려 유물전시관만 대충 둘러보고 중원 고구려비로 향한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할아버지 해설사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나게 설명 중이다. 중간에 끼어 들 수도 없고 기다리자니 시간이 지체되겠고, 글자도 알아볼 수 없는 비를 대충 훑어보고 나서 일행을 모시고 차에 올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중원 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에 세워져 있는 고구려 시대의 비석으로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cm,폭 55cm이며 1979년 4월 5일 조사되어 알려졌다. 발견 당시부터 지금처럼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이 비가 중원 고구려비임을 증명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 국보 제205호 중원고구려비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는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돌아가며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이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 The Young ones - 클리프 리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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