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탐라문화보존회 경기 남부 답사기 ⑥
* 현판을 떼어버린 일주문
▲ 신륵사로 가는 길
멀지만 영월루에 앉아 강 건너로 환히 내다뵈던 신륵사로 가면서 대부분의 절이 산 속에 있는데 왜 이 절은 강가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주차장에 들어서면서 오랜만에 보는 유리 작품에 아는 채를 한 뒤 도자기 상점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거기는 4월 23일부터 6월 19일까지 58일간의 도자 축제인 2005 제3회 경기도 세계 도자 비엔날레가 열렸던 장소이다. 올해 제3회 째를 맞은 이 행사는 2년에 한번씩 열리는데, 바로 이곳이 주 행사장이다.
행사장을 지나 일주문에 이르렀을 때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 힘있게 보이던 신륵사(神勒寺) 현판 글씨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붕 부분을 수리했는지는 몰라도 단청(丹靑)하지 않은 채로 있는 지붕 안 현판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앞장서 휘적휘적 걸어온 나를 그나마 톱풀꽃이 위로한다. 너무 더워 일단 강바람에 몸을 좀 식히고 나서 올라가며 전탑(塼塔)부터 설명할까 하여 강월헌(江月軒)에 올랐다.
* 강월헌에서 쉬고 있는 일행들
신륵사(神勒寺)는 이곳 여주군 북내면(北內面)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성종 3)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었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 구룡루 뒤편(현판에는 봉미산 신륵사)
△ 보물을 7개나 품고 있어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락보전(極樂寶殿)과 그 이외의 부속 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당, 육각정 등이 있다.
어느 정도 땀을 식히고 올라가려는데 전탑은 수리하는 중이어서 온통 나무로 둘러싸인 채로 탑의 모습은커녕 올라가지도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같이 온 분들에게 인연(因緣)이 아니구나 싶어 다시 돌아가 구룡루로 하여 오래된 은행나무를 거쳐 다층전탑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은행나무 아래 머물러 따라오지 않는다. 돌아가 본즉 문화유산 해설사 아줌마가 회원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박경순 씨였는데, 이후 좋은 말솜씨에 힘입어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었다. 이 공간을 빌어 감사 드린다.
* 신륵사 다층석탑에서 설명 중인 박경순 씨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 높이 약 3m 정도 되는 보물 제225호 탑이다. 흰 대리석으로 건조된 이 석탑은 기단에서 탑신부(塔身部)에 이르기까지 각층이 모두 한 장씩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부에서 지대(地臺) 상면에는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의 중석(中石)은 매우 얇고 갑석(甲石)은 특별히 두껍게 되어 있다. 그 중앙에 일조대(一條帶)를 돌리고 다시 밑에는 일단의 받침이 있고 상면에도 일단의 괴임이 있어 상층을 받들게 하였다.
또한 탑신부는 상층에서 상실된 부재(部材)가 있는 듯하나 8층 탑신 이하는 원형대로 남아 있는데 각층의 감축률이 적은 편이고 옥신(屋身)은 매우 낮아서 그 두께가 옥개석(屋蓋石)의 두께와 비등하다. 그리고 현재 8층 옥신 위에는 이 옥신 크기 만한 옥개석과, 이보다 훨씬 작은 옥신의 부재가 각각 하나씩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많은 층급(層級)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남기면서 거기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 대웅보전 앞에서
▲ 신륵사 다층전탑과 조사전
수리 중에 있는 다층전탑은 고려시대의 벽돌 탑이다. 보물 제226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는 약 9.4m에 이른다. 이 탑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축조되었는데, 기단 부분은 화강석, 탑신부(塔身部)는 벽돌로 이루어졌다. 그 구조는 일반 석탑의 기단과 유사한 2중의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고, 그 위에 탑신을 구축하여 6층까지 있으나 그 위에 다시 밑단이 있어 7층 같게도 보이는 매우 애매한 형태이며 축조형식도 신라시대의 전탑과는 달리 옥신(屋身)에 비해 옥개(屋蓋)가 매우 평박(平薄)하여 전체에서 오는 인상이 다르다.
또한 옥개 받침은 3층까지 2단이고 4층 이상은 1단이며 상면의 받침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식으로 되어 이례적인 형태이다. 한편 벽돌의 일부에 문양(文樣)이 양각(陽刻)되어 있는 바, 간극(間隙)을 둔 2중 반원(半圓) 사이에 연주(聯珠)와 반원 내에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형식으로서 이러한 형식이 신라의 범종문양(梵鐘文樣)에서 볼 수는 있지만 그 수법이 신라의 그것과 같지 않다.
* 조사당 앞에서
조사전(또는 조사당)은 선종 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祖師)를 봉안한 절집이다. 신륵사 조사당(祖師堂)은 보물 180호인데 조선 초기에 지은 전후면 각각 1간, 양 측면 2간인 아담한 절집이다. 이 곳은 고려 말 고승이었던 지공, 나옹, 무학 등 소위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또 그들의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3화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데, 가운데 나옹, 좌우에 지공과 무학의 영정이 사진으로 걸려있다. 3화상의 관계는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고, 무학은 나옹의 제자가 된다.
신륵사의 조사당은 낮은 석단 위에 건립한 소규모의 건물로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를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측면의 간주에 의해서 그 위로 대들보가 아닌 대량이 건너가 네 모서리의 추녀 끝을 받치는 재목과 만나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넓은 주간에 짧은 기둥을 세우고 벽체 없이 문 얼굴을 내고 문짝을 달아서 그 문짝이 여섯 짝이나 되는 데, 이러한 육분합은 드문 구조이다.
* 보제존자 석종
△ 보제존자 석종과 그 앞 석등
보제존자 석종(普濟尊者石鐘) 역시 고려시대의 석종이다. 보물 제228호로 지정되었는데 그 높이는 1.9m나 된다. 화강석으로 제작된 이 석종은 먼저 지상에 석축으로 넓은 건축기단을 쌓고 위 둘레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돌려 갑석을 삼고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이 기단 상면에는 박석을 깔고 그 중앙에 2매의 판석을 얹어 2단의 탑신 받침을 마련하였으며, 탄신과 접하는 곳에는 원형 몰딩이 조각되었다. 탑신은 원래의 종형(鐘形)에서 퇴화되어 위가 잘라진 포탄같이 되어 있으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고 탑신의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다. 탑 꼭대기에는 화염무늬(火焰文)를 모각(模刻)한 낮은 보주가 얹혀 있다.
이 석종을 중심으로 전면에 석등, 후면에 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석종형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팔각문당형(八角門堂形)의 부도 형식이 고려시대에 일부 새로운 양식으로 가미되었다가 그 말엽에 이르러 완전히 바뀌어 전혀 새로운 형식이 된 것인데, 이 석종은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 혜근(慧勤)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종형 부도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石燈)도 자연히 고려시대의 석등이 되는데, 보물 제231호로 전체 높이 194cm에 화사석(火舍石) 높이 66cm의 규모이다. 앞 혜근(慧勤)의 묘탑을 장식한 석등으로, 기본형은 8각이며 기단부 위에 화사석과 옥개를 얹고 맨 꼭대기에 보주를 놓은 구조이다. 지대석(地臺石)의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며 하대(下臺)에는 겹잎의 복판연화(複瓣蓮華)무늬가 돌려져 있다. 간석(竿石)은 연주(連珠) 기둥의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음각(陰刻)하고 그 안에 꽃잎을 새겨 넣었다.
상대석(上臺石)은 겹잎 16판의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 앙련(仰蓮)을 새겼으며 판단부(瓣端部)에는 2단의 굄띠를 각출(刻出)하였다. 화사석은 8각에 각각 원주(圓柱)를 조각하고 그 원주에는 반룡(蟠龍)을 양각(陽刻)하였는데, 각 면(面)에는 사라센 계통의 완곡선(緩曲線)을 그린 통창(通窓)이 있다. 이 석등은 화사석 외에는 화강 석재이므로 각 부분의 조식이 완전하나 화사는 연질(軟質)이어서 다소 마손(磨損)되어 있다.
* 절 마당 위에 모셔져 있는 부도
▲ 대장각기비와 보제존자석종비
신륵사에는 비(碑)로서 보물이 둘이나 있는데 대장각기비와 보제존자석등비다.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는 높이 1.33m, 폭 0.88m이 되는 고려시대의 석비(石碑)로 보물 제230호이다. 이곳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大藏閣)이 있었다. 이것은 고려 말의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고승 나옹(懶翁)의 문도(門徒)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을 인출(印出), 수장(收藏)하던 집이었다.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내용을 기록한 석비이며, 비신은 대리석, 비대는 옥개석과 함께 화강석으로 이루어졌다. 비석 자체의 입비(立碑)와 거기에 기록된 비문으로 나눌 수 있다. 입비는 1383년(우왕 10)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비문은 자경(字徑) 2m의 해서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이다. 귀부와 이수는 직사각형 복련대석과 옥개석으로 생략되어 있고, 비신의 보안을 위하여 신부 양쪽은 석주로 지탱하였다. 이와 같은 조형 형식은 조선시대 석비 조형의 한 형식이 되었다.
* 보제존자 석종비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역시 고려시대 묘비(墓碑)로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의 크기이고, 보물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대와 옥개는 화강석이다. 비표(碑表)는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로 시작되는 석종기와 '보제존자 진당시 병서(眞堂詩幷序)'로 시작되는 진당시로 양분되어 있고, 이면(裏面)에는 수월사(水月寺), 보광사(普光寺) 주지를 비롯하여 석수, 목수(木手)에 이르기까지 약 200명이 열기 되어 있다.
글쓴이는 한수(韓脩)이며, 이 비의 서체가 안노공풍(顔魯公風)의 해서임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전체의 조형은 이 절의 대장각기비와 같으나 대석이 1단의 앙련대(仰蓮臺)를 가졌으며, 개석(蓋石)에 옥개부 공포와 와구(瓦溝)가 조출(彫出)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정제(整齊)되어 있다. 대장각기비보다는 4년 앞선다. 이곳까지 해설사 아줌마의 열강(熱講)이 이어졌는데, 기사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 받는 것을 보고 아줌마가 눈치를 챘는지 말을 맺는다.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절을 나왔다.
* 신륵사 범종각
△ 상설인 여주 세계 생활 도자관
나오다가 얼마 전에 끝난 제3회 경기도 세계 도자 비엔날레의 흔적을 살피며 여주 세계 생활 도자관으로 갔다. 이곳에는 생활 공간을 보다 구체적으로 구성한 '세라믹하우스 II'와 기(技)와 예(藝)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주전자의 폭넓은 조형세계를 살펴보는 '세계 주전자전', 그리고 세계 유명 기업의 생산품에서부터 미술관, 박물관 기념품과 관광기념품, 개인작가들의 창의력 넘치는 도자 기념품 등을 선보이는 '세계 도자 기념품전'이 상설 전시되고 있었다.
58일 간의 감동 속에 펼쳐진 '제3회 경기도 세계 도자 비엔날레'의 성공적인 개최로 세계 도예계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재단법인 세계 도자기 엑스포가 비엔날레의 감동과 함께 한국의 전통 도자와 세계 현대 도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모아 상설 전시하고 있고 기념품과 도자기를 판매하고 있는데, 입장료가 없어 시원하게 냉방이 된 곳에서 다양한 작품을 섭렵할 수 있었다.
* 여주 비엔날레 행사장과 전시관
이 비엔날레 행사는 이천, 광주, 여주 3개 시군이 힘을 모아 열고 있는데, 상설 전시장은 이곳말고도 이천에 도자 센터와 광주에 조선 관요 박물관이 있어 우리 전통의 조선백자에서부터 현대 조형 도자는 물론 세계 현대 도자의 진면모를 선보이며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세계 도자 디자인의 경향과 생활 도자 세트를 관람할 수 있었다.
전시회장은 2개의 대형 전시실과 기획 전시실, 다목적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 및 전문가를 위한 도예공방(도자 체험실, 흙놀이방, 여주도자 견본관 등)과 전통 옹기가마, 한글나라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 원주민토기에서 도자 타일 및 파인 세라믹 나이프까지 다양한 생활도자기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세계 주전자 전시회장에서는 기상천외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고정관념을 탈피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 전시실 안 모습
▲ 불교 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세운 '목아박물관'
목아박물관은 우리 나라 전통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중요 무형 문화재 108호 목조각장인 박찬수가 세운 개인 박물관이다. 호가 목아(木芽)인 그는 양산 통도사 화문투각소통을 재현하는가 하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축소 재현, 양산통도사 사천왕상 재현, 해남 대흥사 삼존불상을 보수하고, 직지사 설법전 법상 및 목탱화 제작, 편종, 편경대 복원, 통도사 옥련암 1250아라한상, 신중목탱화 및 삼존불상을 제작하는 등 국내 중요한 불교 문화 유적과 유물을 복원하는데 힘써 왔다.
1994년 6월 본관 야외전시장의 미륵삼존대불의 점안식을 시작으로 전문사립박물관의 문화사업을 시작하여 매년 기획전시와 문화함양을 위한 박물관 문화학교인 전통불교 문화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그 외 우리 나라의 불교 관련 자료와 목공예 분야의 소중한 자료들을 일반에 널리 알리는 한편, 잊혀져 가는 우리나라 전통미술의 복원과 계승을 위한 많은 사업들을 구상하고, 전통목공예의 맥을 이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 잊혀져 가는 우리나라 전통의 불교조각 기법을 보존하고 새로운 기법으로의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목아박물관 정원의 미륵삼존대불
지난번에는 차가 못 들어간다고 큰길에서 주차해 걸어 들어갔는데 이 번엔 차가 1대여서 그냥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정문 못 미쳐 공터에도 여러 장승들을 모셔놓았다. 정문 안 왼쪽에는 커다랗고 가느다란 미륵삼존대불을 세웠고, 야외 조각공원을 꾸며 백의관음, 자모관음, 비로자나불상, 삼층석탑, 탄생불과 다양한 동자(童子) 브론즈 작품, 나부상, 달마상 등 약 40여 점의 유물과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올라간 3층 전시실에는 약사여래좌상, 팔상성도, 용왕상, 금강역사상, 십이지신상, 칠성목탱, 석가고행상, 11면42수관음상, 백의관음상, 소조여래좌상, 11면관음상, 문수보살상, 인왕, 사천왕상 등 유명 모사(模寫) 작품이나 창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나한전, 윤장대, 소통, 초두형 향로, 목어, 나한상, 목공구실, 건칠약사불수, 목불입상, 인도불탑, 연봉, 청동발, 청자대접, 관솔사천왕 등을, 1층 전시실에는 열반목탱화, 아미타삼존도, 목재동자상, 석가모니불감 등을, 지하 1층 전시실은 명부전을 재구성해 놓고 있었다.
* 목아박물관 정원에 모아 세워놓은 제주의 동자석들
명부전은 지장보살, 무독귀왕, 도명존자의 지장삼존상과 열명의 왕, 판관, 사자, 동자 등 20여 구가 넘는 불상을 배치하였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20분 짜리 영화 '부처가 되고 싶은 나무'를 상영한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박물관에 전시된 모든 조각품들의 제작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청각 교재로 활용되고, 영상실은 또 박물관의 문화학교 강의가 열리기도 하는 다목적 공간이라 한다. 이것저것을 보다 시간이 부족하여 부랴부랴 나오는데, 정원에 모아 놓은 동자석이 눈에 익다. 10여 쌍이 넘는 이 제주 동자석이 정상 거래되지는 않았을 터. 요즘 무덤에 세워놓은 동자석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많은 것을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 밖에 전시된 부처와 나한상
♬ Horchat Hai Caliptus(유클립투스의 추억) / Ish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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