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탐라문화보존회 경기 남부 답사기 (완)
* 청자투각주전자받침(이천도자기마을 홈에서)
▲ 이천 도자기마을
중원고구려비를 돌아본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 이천도예촌을 들러가기로 했다. 길은 시원스레 뚫려 있어 차는 쉽게 도예촌에 이르렀다. 사실 이곳을 제대로 답사하려면 하루 일정을 잡아 옛 도요지도 찾아봐야 하고 물레를 돌려 도자기도 만들어 보고, 굽는 과정도 살펴본 후 기념품을 골라 몇 점 사가기도 해야 하는데, 시간 관계상 앞의 것은 다 생략하고 쇼핑 시간만 40분 주었다.
청동기시대부터 토기제작이 활발했던 이천 지방은 삼국시대의 토기 문화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와 가마 불을 지피는데 쓰이는 땔감이 넉넉한 곳이다. 옛 조선 백자의 요지로서 8. 15광복 이후부터 이웃한 광주 관요의 조선 도자기 전통을 이어받아 전승 도예의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동시에 개성적인 예술성과 작품성을 추구하는 도예가들이 모여 있다. 1988년 이천시에서 전시관, 음식점,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조성하였다.
* 청화매조개호병(이천도자기마을 홈에서)
신둔면 일대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백자, 분천 도공 지순택이 청자 및 백자를 재현, 제작한 전통요장인 지순택요를 비롯하여 동양 최대의 도자기미술관인 유근형의 해강도자미술관이 있다. 청자, 백자, 분청사기, 옹기 등을 빚는 작업부터 그림을 넣어 굽는 것 등 도자기를 만드는 전과정을 볼 수 있다. 현대 한국 전통도예의 중심지로, 2000년 현재 도요지가 300여 곳에 이르며 해마다 이천도자기축제가 열린다.
제일 큰 가게로 들어가니, 소품으로부터 대형 작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자기(瓷器)가 없다. 자기뿐만 아니라 값이 싼 세라믹 제품들도 많았는데, 갖고 싶은 다기 세트를 놓고 흥정하는 아줌마를 거들어 자기(瓷器)는 자신이 값을 매기는 것이라고 해서 적당한 값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아무래도 서민적이어서 그런지 자기에는 눈이 안 가고 내게 소용될 도기 컵 2개를 5천 원 주고 샀다.
* 남한산성 안내도(여기로부터 모두 남한산성 홈에서 빌려 왔음)
△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한식 뷔페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남한산성으로 달린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계곡에는 그늘이 있는 곳마다 사람으로 넘쳐난다. 휴일을 맞아 가족끼리 차를 몰고 와 한쪽으로 세워놓았기 때문에 대형버스가 지나가는데 여기저기서 장애가 된다. 하지만 물 속에서 즐거워하며 물장구를 치며 헤엄치는 행복한 장면을 보면서 참을 수 있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中部面) 산성리(山城里)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새로 축성(築城)하였다.
* 남한산성 동문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堞)이고,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步),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간(間) 반, 하궐(下闕) 154간이었다. 재덕당(在德堂)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옮길 우실(右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 남한산성 망월사
▲ 여러 차례 수리하고 짓고
관아로는 좌승당(坐勝堂), 일장각(日長閣), 수어청(守禦廳), 제승헌(制勝軒) 등이,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 교련관청(敎練官廳), 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鐘閣), 마랑(馬廊), 뇌옥(牢獄),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溫祚王廟), 서낭당, 여단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僧軍)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聖軍)으로서의 불도(佛徒)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井寺) 외에 개원(開元), 한흥(漢興), 국청(國淸), 장경(長慶), 천주(天柱), 동림(東林), 동단(東壇)의 7사(寺)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前), 좌, 중, 우, 후의 5영(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陣)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守禦將臺) 하나만이 남아 있다. 지붕은 팔작(八作)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板門)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單層) 문루(門樓)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 남한산성 현절사 동문
△ 동문서부터 수어장대까지
중부고속도로 경안 인터체인지에서 하남시 43번 국도를 거쳐 들어간 우리는 처음에 동문에서 내려 망월사로 가는 길로 성문에 올라 서쪽으로 보이는 남옹성과 성의 모습을 보고 장경사 신옹성으로 올라가다가 주위만 살피고 내려왔다. 점심을 먹은 후라 몇 사람 따라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간에 쫓겨 내려오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시 차에 올라 관리사무소 주차장에 내린 우리는 시간을 정한 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나는 맹렬 회원 10여 명을 데리고 복원중인 행궁을 바라보며 수어장대로 올랐다. 노송이 늘어선 가운데 아는 나무에 눈길을 주면서 걷는다. 남한산성 식생 면적의 40.05%가 신갈나무 군집이고, 신갈나무가 우종인 신갈나무-굴참나무군집, 신갈나무-서어나무군집, 신갈나무-소나무군집을 모두 합치면 46.7%에 이른다고 한다.
* 남한산성 수어장대
정상에 못 미쳐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를 한 잔 마시고 힘을 내고 보니 수어장대에 이르기 전에 동동주를 팔고 있어 8기 잉꼬 아줌마와 김용민 씨가 한 병씩 사들고 수어장대로 들어갔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인 수어장대는 앞서도 말했듯이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사방을 둘러보고 나와 나무 그늘 아래서 쉬며 돌려 마시고는 남문을 통해 내려온다.
온조 14년 BC. 5에 하남 위례성에서 천도해온 이후 신라 문무왕 12년(AD 672) 토성(주장성, 일장성라 칭함)으로 축성하였고, 역사적으로 많은 부침을 계속하면서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후금의 침임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후 인조 2년(1624)에 다시 시작하여 인조 4년(1626)에 준공하였다.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 도립공원으로 지정(제158호) 되었으며, 1976년 7월부터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 남한산성 시구문
▲ 일정을 마치면서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가기 전전날 이곳 경기 남부는 엄청난 폭우를 기록하였고, 우리가 머물렀던 2박 3일 동안은 쾌청했다가 우리가 거기서 나온 뒷날 또 많은 비가 내렸다는데 어디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비가 온 후여서 땅이 젖어 있어 그늘에서는 꽤 선선하여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움직이는데, 애로를 느끼지 못하였다.
남문을 거쳐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차가 밀릴 것 같아 조금이라도 빨리 오면 떠나겠다고. 남문 옆 터널로 빠지는 국도는 벌써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온 길로 다시 돌아 나와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그러나, 역으로 나오는 길이어서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다. 아직도 물장구 치며 노는 아이들이 부럽다.
* 남한산성 남문
사람은 잽싸게 행동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고, 느긋하게 행동한 것이 오히려 더 이로울 수도 있다. 지금 더 놀겠다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서둘러 출발하는 차들이 거북이 걸음이고 보면 그 속에 탄 아이들의 기류는 아니 봐도 뻔하다. 차라리 실컷 놀다가 현지에서 맛있는 거 사 먹이고 느긋하게 간다면 더 좋지 않을까? 차가 막히기 시작하여 40분 정도 되었을 때 큰길로 진입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가서 88고속도로로 진입했는데 차가 아주 씽씽 잘나간다. 시간이 여유가 생기니까 마음이 여유도 생겨 모두들 기분이 좋아졌을 때, 마이크를 돌리며 한 마디씩 소감이나 건의 사항을 말하라고 했더니, 모두가 좋았다고 진행을 담당한 분들과 기사님 칭찬이다. 이 글을 마치며 여행 중 불평 하나 없이 나를 따라준 회원 모두와 박영락 기사님, 그리고 회계를 담당한 김연옥 재무이사께 감사 드린다.
* 남한산성 지수당
♬ Heart of Gold - Neil Young
'국내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의 부산 여행 (0) | 2005.12.27 |
---|---|
추억의 거제도 여행 (0) | 2005.12.24 |
탄금대와 중원(中原) 유적들 (0) | 2005.08.10 |
신륵사와 목아박물관 (0) | 2005.08.09 |
영릉(英陵, 세종대왕릉)과 영월루 (0) | 2005.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