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학생들과 함께 한 수학여행 - 1

김창집 2003. 4. 16. 23:24

첫날 -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마니산까지(2003. 4. 11.)

 


(멀리 보이는 오두산 통일전망대 모습)

 

▲ 통일로 가는 길목 - 오두산 통일전망대

 

 여행을 떠나는 설렘은 아이나 어른 따로 없나 보다. 4월 10일(목요일) 수학여행을 앞두고 며칠 동안은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가끔 여행은 가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젊음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얘기를 들려 줄 수 있다는 기쁨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었다. 학생 273명과교사 15명의 장도를 축하해 주듯이 날씨도 맑아서 아침 7시 50분에 비행기에 오르면서 보니, 모두들 사뿐히 날 듯한 분위기다. 김포공항에 내려 광주서 올라온 로얄 관광 버스 7대에 나눠 탄 일행은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향해 달렸다.

 

 통일을 대비해 넉넉한 넓이로 빼놓은 '자유로(自由路)' 양쪽은  봄꽃이 활짝 피어 우리를 반긴다. 개나리와 진달래를 주종으로 살구꽃과 매화, 앵두,산수유, 목련, 거기다 물이 오른 버드나무 잎과 꽃봉오리도 꽃에 못지 않다. 가끔은 길섶에 핀 샛노란 민들레가 인사를 한다. 이 즈음 육지에서 너무나 부러운 것이 진달래다. 왜냐 하면, 제주도에는 야산 몇 곳을 제외하고는 저렇게 지천으로 피어난 진달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오두산(烏頭山)은 예로부터 서울과 개성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고려말에 쌓은 산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산 정상에 세워진 통일전망대는지상 5층, 지하 1층의 석조 건물로 해발 140m의 높이에 자리잡은 원형 전망실에서는 맑은 날 북쪽으로 개성시의 송악산(松嶽山:489m)과 북한 주민들이 농사짓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다. 그밖에 추석과 설날 등 명절을 맞아 이산가족들이 북한에 두고 온 조상들을 추모하는 망배단과 지름 2m, 무게 6백㎏의 거대한 통일기원 북, 조만식(曺晩植) 선생 동상 등이 있다.

 

 

(마니산 정상 비탈에 피어 있었던 현호색꽃)

 

 먼저 2층 북한 영상실로 가서 '북한의 조직 생활'이란 영상 기획물을 보고 나서 3층 전망실에 올라 북한 땅을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은 조그맣고 하얀 포말이 일어난다. 황사 현상으로 시계(視界)가 트이지 않아 희뿌연 것이 꼭 작금의 남북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속을 환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냥 겉만 바라보자니 감질나서 못 견디겠다. 내려오면서 통일전시실을 들르고 1층에 내려와 북한 전시실과 통일 염원실을 거쳐 지하매장으로 나왔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생활용품이 진열된 중에 평양소주 1병과 금강산 들포도주 1병을 샀다.

 

▲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 강화역사관

 

 강화도로 이르는 길은 다시 되돌아오는 길이어서 꽃길을 달리며,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다. 한강을 통해 서울을 오고가는 길목인 이곳은 역사적으로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유물 유적도 시대별로 다양하고, 고려시대 삼별초군의 대몽항쟁이 이곳에서 출발하여 진도 용장성을 거쳐 제주도 항파두리로 이어져 있어, 우리와 아주 무관하지도 않은 곳이다. 순무김치와 밴댕이 무침을 안주로 강화 인삼막걸리를 기울이던 지난날의 추억도 새록새록 돋아난다. 제주도의 3분의 1 크기이면서도 육지와 연결돼있어 섬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강화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단군왕검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참성단 등 우리 나라의 개국과 연결된 역사의 고장이며,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 39년간의 도읍지로서 팔만대장경 판각, 고려청자 제작, 금속활자 주조 등 문화의 산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 임금의 피난 수도 역할도 했고, 말기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천주교의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 함대의 침입사건인 병인양요, 그리고 신미양요 그 후 운양호사건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 등 외세열강의 침입에 의연히 맞서 싸웠던 피비린내 나는 국난 극복의 현장이기도 하다.

 

 

(마니산에서 만난 노랑 제비꽃 무리)

 

 강화역사관은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슬기로운 문화를 이어받은 한반도 역사문화의 축소판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항쟁의 위업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1984년부터 5개년 계획을 세워 16억 7천만 원을 투입, 1988년 9월에 개관하였으며, 2001년 2월에 기존 유물을 재배치하여 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육지로 이어진 다리를 지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갑곳리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관은 지하1층, 지상2층으로 총 4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옥외에는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해선망 어선, 비석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은 참성단을 비롯하여 천문도, 고인돌, 조선시대 관복의 디오라마, 선사시대유물인 빗살무늬토기와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에는 팔만대장경 디오라마, 보물 제11-8호 강화동종, 강화행렬도, 백자, 청자, 고서, 화문석과 반닫이가, 제3전시실은 5진7보53돈대의 방어시설인 성을 축조하는 모습을 재현한 축성디오라마, 삼별초 대몽항쟁 디오라마, 정묘호란, 병인양요시 유물인조총과 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4전시실은 우리 나라 개화의 관문으로서의 역할, 정족산성 전투, 광성보 전투 등을 거의가 디오라마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더니, 점심이 늦어졌기 때문에 관람 속도가 너무 빠르다. 세 번째 보는 것이어서 속도를 빠르게 하느라고 했지만 학생들은 벌써 차에 올라 기다리고 있다. 화단에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처음 보는 하얀 민들레가 신비롭기까지 하다.

 

 시간에 쫓겨 그 유명한 강화 지석묘(支石墓)를 못 보는 것이 못내 아쉽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렇지 않아도 배고픈데 가고 오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사적 제137호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은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다. 뚜껑돌[蓋石]은 길이 710cm, 너비 550cm지만 지상높이는 260cm나 된다. 특히 제주도에서 바둑판식 남방 고인돌만 보던 학생들에겐 좋은 비교가 될 터인데.

 

 

(강화역사관에서 만난 희귀한 하얀 민들레)

 

▲ 단군 신화가 깃든 성지(聖地) - 마니산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난 학생들에게 산행은 좀 무리인 듯 싶었으나 젊음을 핑계로 과감히 밀고 나갔다. 길에 면해있는 관리사무소 마당의 자목련이 우리를 반기고 점차로 진달래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앞장서 걸어 식수대가 있는 갈래 길 왼쪽 계단으로 올라섰을 때 노랑제비꽃 무더기가 피어 나를 반긴다. 이곳은 그런 제비꽃만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인천광역시에 속하게 된 강화군의 제일 높은 산인 마니산은 마리산(摩利山) 또는 마루산이라고도 불리며, 백두산과 한라산의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 469.4m의 신비로운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과 신공항이 들어선 영종도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의 오름에 비하면 그리 높지는 않으나 비고가 높아 쉽게 볼 상대는 아니다. 더구나, 계단으로 된 이곳으로는 좀 지루한 느낌이 들어 끈기를 요구한다. 꿩이 울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듣고 동쪽을 바라보니, 진달래가 온산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있다. 지루한 길을 좀 쉬어가라고 나무 게시판을 세워 놓았는데 그 내용이 재미있다. "1년간 당신의 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심장은 36,796,000번을 "콩딱", 눈은 7,884,000번을 "깜빡", 폐는 3,819,000ℓ의 공기가 "들락", 머리카락은 12,7cm나 "쑥쑥", 걷는 거리는 2,510km "종종", 자는 시간은 2,555시간을 "쌔근쌔근".

 

 

(마니산 정상 단군이 쌓았다는 참성단의 모습)

 

 정상을 얼마 안 남기고 기(氣)를 모아준다는 지점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키고 있는데, 선생님 세 분이 쫓아왔다.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정상에 오르니, 산정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사적 136호 참성단(塹城壇)이 자리했다.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에 제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채화된다.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種徽)가 지은 '수산집(修山集)'에는 "참성단의 높이가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차례 개축하다 보니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성화를 들고 있는 칠선녀의 모습을 담은 패널을 계단에 올려놓은 것은 무슨 때문일까?

 

 1977년 3월 산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사적 130호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이곳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된 것은 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뛰어난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해 간 북한의 평양소주와 남한의 구운 쥐치 두 마리를 제단에 올리고 큰절로 단군께 통일을 기원했다. 음복을 하며 평양소주라고 하니까 모두들 모여든다. 남쪽 비탈에는 나리가 군락을 이루며 솟아나고 현호색도 곱게 피어 있다. 황사 때문에 시원하게 조망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내려왔다. 다만 오다 들은 딱따구리 소리로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마니산 정상, 음복 소주 석 잔에 얼굴이 붉어진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