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학생들과 함께 한 수학여행 - 4

김창집 2003. 5. 8. 09:49
넷째 날 독립기념관에서 문경새재까지(4월14일/일요일)


(석양이 비친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의 위용)

▲ 아침에 오른 건지산의 지산컨트리클럽

 엊저녁 에버랜드에서 나와 영동고속도로를 타는가 싶더니, 곧 양지터널로 17번 국도로 나
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곳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묵을 곳은 건지산 자락의 지산 포레
스토 리조트라고 한다. 해발 411.4m의 나지막한 건지산은 용인군과 이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19곳이나 되는 골프 왕국 용인군에 36홀 짜리 지산 컨트리클럽과 스키장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숙박료가 싼 곳을 찾다보니까 스키 시즌이 끝난 이곳 리조트를 택했나 보다. 컴컴해서 산 속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카운터 옆의 안내 자료를 보니,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선생의 묘가 가까이 있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아침에 일찍 깨어 옆에 영어 강 선생님께 산책 나가자고 권유했더니, 선뜻 응한다. 아침 운동 삼아 갈 때까지 가보자고 했다. 엊저녁 조깅 다녀온 선생님들이 아래로 뛰어가다가 대학이 있는 곳에서 돌아왔다고 하는 걸 들은 터라 반대 방향으로 가다가 산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무척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이다. 날씨가 밝아져 보니까 골프장 가는 길이었다. 곳곳에 진달래가 봉오리를 터뜨려 수줍은 듯 분홍빛을 토해내고 있다. 능선 다다른 곳에 는 관리사가 서 있고 오밀조밀하게 골프장이 펼쳐져 있다. 뾰얀 코김을 뿜어 시원한 공기를 즐기면서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화강석으로 만든 크고 작은 동그란 알 같은 조각이 있다. 굴리면 또글또글 구를 것 같아 굴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혼났다.


(지산 포레스토 리조트 화단에 피어난 금낭화)

 내려오면서 옆을 보니 그곳은 스키장이다. 철 지난 스키장이지만 아직도 눈이 검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허옇게 남아 있다. 내려와 스키장 입구에 이르렀을 때 정말 그것이 눈인지 달려가서 확인했더니 틀림없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한 덩이 떼어다가 바위 위에 놓아두고 아이들에게 자랑하러 했으나 차는 반대 방향으로 나와버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씻고 나와 아침 식사를 끝내고 차에 타려고 밖으로 나오는데 눈에 익은 꽃이 있어 자세히 살피니 금낭화다. 꽃이 조르르 피어난 걸 보니, 어디 온실에 키운 것을 가져다 놓았나 싶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 차는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나가 신갈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통하여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 싹둑 잘린 채로 전시된 독립기념관의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

 실로 오랜만에 찾아왔는데도 '겨레의 탑'은 나를 반겨 맞는다. 처음 수학여행단을 이끌고

이곳에 왔을 때는 탑이 완전히 나를 압도하더니, 이제 여러 번 만나다 보니 수문장으로밖에 안 보인다.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와 기도하는 양손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영원 불멸의 민족 기상과 민족의 자주 자립을 나타낸 것이라는데, 51m나 된다. 강 선생님과 나는 다시 언제 이곳에 들릴지 모른다고, 힘들더라도 다시 한 번 천천히 봐두자고 다짐하며 다리를 지나는데, 백련못의 커다란 비단잉어들이 어슬렁거리며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아침을 걸렀는가보다 생각하며 먹이를 사서 뿌리니 몸집에 안 어울리게 달려든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겨레의 집' 속 '불굴의 한국인상')

 사람이나 짐승이나 길들여지다 보면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하나 보다. 어찌 보면 독립 기념
관의 이미지와는 안 어울려 보인다. 저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독립해 살아갈 수 있는 토종 물고기를 길렀으면 어떨까 싶다. 독립기념관이란 우리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민족이든 오랜 역사를 갖다 보면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민족에 의존해 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 뼈저린 경험을 다시는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 아닌가? 인도네시아 메르데카 광장의 높이 132m의 오벨리스크도 그렇고, 이스라엘의 '신의 손길'이라는 '야드바쉠', 하다 못해 미국 필라델피아에는 '자유의 종'과 함께 독립기념관이 유명하다.

 우리 나라는 1982년에 국민들에게 성금 모금을 시작하여 1987년 광복절에 천안시 목천면
흑성산록의 120만여 평의 대지에 37동의 독립기념관을 세웠다.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축구장 만한 크기로 지어진 '겨레의 집'을 지나 '민족 전통관' '근대 민족 운동관' '일제 침략관' '독립 전쟁관' '사회문화 운동관'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 정부관'에서 밀랍으로 잘 조형된 임정 요인들을 대하니, 그 동안 너무 오래 잊고 지냈던 분들에게 너무 죄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그보다도 곳곳에 피를 흘리며 오직 나라를 위해 쓰러져 가는 생생한 기록들을 대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를 되뇌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스쳐 가는 학생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과거 경복궁에 있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

 그러고 보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약속된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강 선생
님을 이끌고 아직까지 이곳에서 본 일이 없는 단 하나의 장소를 보기 위해 뒷마당을 가로질러 조선총독부 부재공원으로 갔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1918년 근정문 남쪽 부분을 모두 철거하고 192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한 뒤 1927년에는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으로 옮긴다. 광복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정부 청사로 이용되다가 1986년부터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많은 논란 끝에 철거한 건물 주요 부분이 싹둑싹둑 잘린 채로 전시돼 있었다. 데라우치의 총독의 명령에 의해 지어진 문제의 건물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존재하는 친일파의 망령이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

▲ 죽게 뛰고 5분 늦어 눈총 받은 '유관순 열사 유적지'

 이상하게 독립기념관은 그렇게 다니면서도 아우내 장터나 유관순 기념당은 들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점심 식사 후에 유관순 열사 유적지에 가게 되었다. 시간을 전달받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리던 누나처럼 열사의 동상이 태극기를 든 채로 맞는다. 제1착으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추모각으로 올라가 분향을 하고 나서 옆으로 가 샘물을 떠 마셨다. 애초 왼쪽 길을 따라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올라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잘못이었다. 매봉산 오르는 길에는 이화여고생과 그 학교 선생님들의 추모시가 동글동글 예쁜 돌에 새겨져 있고, 민들레를 비롯한 들꽃이 수놓아져 오름 오르기를 즐기는 나를 꾀었다.


(유 열사가 매봉산에서 봉화를 올렸던 사적 제230호 봉화지)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혼묘였다.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지가 육시로 찢겨져 1920년 10월 12일 순국, 이화학당의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일제의 만행으로 유택(幽宅)마저 파헤쳐저 흔적 없이 망실되었기에 유 열사의 한 맺힌 원한을 풀어 드리고 영혼을 위로하여 편히 잠드실 초혼묘(招魂墓)와 존영상을 역사의 현장 이곳에 1989년 10월 12일 봉안하였다."는 설명을 읽고 나서 다시 올라가 능선에 이르러 왼쪽으로 꺾었을 때 나타난 것은 봉화터였다. 열사가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의거 전날인 1919년 3월 31일 밤, 다음날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하여 봉화를 올렸던 곳에 탑을 세운 것.

 그러나 남은 시감은 10분. 나는 망서렸다. 4분 정도 달려 내려가 6분 정도면 갈 수 있겠지. 여기서 내려가나 돌아 내려가나 시간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는 마당에 서서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보며 만세 삼창을 외치고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등산로는 자꾸 왼쪽으로 비껴가 일행들과 멀어져 갔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라 올 수는 없었기에 있는 힘을 다해 뛰어 내려가 생가터에 지어진 집을 대충 훑어보고는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됐을 때 전화가 왔다. 이제 곧 도착한다고 이르고는 마치 만세 운동 때처럼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밥을 먹은 뒤 얼마 안 되어서 옆구리가 결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5분 넘어 도착해 차에 오르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젊은 기사 아저씨는 오히려 선생님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태조 왕건'을 촬영한 고려 왕궁 세트)

▲ 문경새재에 펼쳐 놓은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세트장

 지난 번 문경새재를 오를 때는 수안보에서 조령관에 오르면서 한여름 밤에 고생했지만 이
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오르게 되었다. 문경새재는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통하는 고갯길로서 교통 및 군사상의 요지로 이름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옛 새재 남서쪽으로 이화령이 뚫리면서 길로서의 구실을 잃고 지금은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문경 새재에는 3개의 관문이 있다. 제1관문은 영남 제1관인 주흘관으로 조선 숙종 34년(1708년) 석성(石城)과 함께 세워졌다. 제2관문인 조곡관은 선조 27년(1594년)에 건립되었고 주흘관을 세울 때 중건했다. 그후 불에 타서 홍예문만 남았던 것을 1975년에 복원했다. 제3관문은 새재 정상에 있는 조령관으로서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 구실을 한다. 주흘관과 함께 세워졌으나 불에 타고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6년에 복원했다.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는 6.5㎞인데 차는 다닐 수 없으며 길 주위에 주막들이 있다. 주흘관에서 조곡관 쪽에 있는 조령원 터는 옛날 출장중의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으로 조선후기에는 일반 나그네도 이용했으며, 물물교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조령의 다른 이름인 '새재'는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 또는 '억새풀이 많은 고개'로 풀이되고 있으며 '고려사'에는 '초점(草岾)',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교통여건으로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던 새재는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 영남의 세곡(稅穀)과 궁중 진상품등 각종 영남의 산물(産物)이 새재길을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나루터에 닿았으니,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水運)울 원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충지었다.


(KBS 대하 사극 '태조 왕건' 촬영 장면 1)

  이런 곳이 요즘 많은 관광객을 모으고 있는 것은 제1관문인 주흘관 너머 2만여 평에 KBS
'태조 왕건' 촬영장을 세우면서부터다. 연인원 3,000여명이 공사에 참여한 촬영장은 고려와 백제 왕궁, 그리고 당시 기와집 48동, 초가집 47동을 건립한 세계 최대규모의 사극 촬영장이다. 고려사의 첫 장을 여는 태조 왕건을 소재로 하여 고려 역사 전반을 다룰 수 있는 연결점을 마련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조선시대 사극과의 차별성을 위해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오픈 세트를 지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양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세트장으로 들어면서 지금까지 보아오던 조선시대 민속촌과는 어딘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흐르는 냇물이나 우물, 그리고 홍매화 곱게 핀 골목길 등이 옛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했으
나 고려, 후백제 왕궁이나 성문 또는 커다란 건물은 어김없이 날림공사라는 게 드러난다. 원래 세트라는 게 그런 거지만 많은 돈을 들이고, 또 '고려 왕건'에 이어 지속적으로 찍은 '제국의 아침'이나 지금 방영되는 '무인시대' 등을 고려한다면 조금은 성의 있게 지어 '용인민속촌'처럼 두고두고 촬영 및 관광지로 활용해도 좋았을 것이다. 커다란 건물 속의 맨땅이 창고로 활용되는 걸 보면서,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 스치로폴로 만들어져 뒹구는 것을 보면서, 또 단청 칠하는 대신 붙인 도배지가 썩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돌아섰다. 그래서인지 나오다 들른 새재박물관도 성에 안 차서, 그예 도토리묵에 민속 동동주 한 잔을 하고 말았다.


(KBS 대하 사극 '태조 왕건' 촬영 장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