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학생들과 함께 한 수학여행 - 2

김창집 2003. 4. 25. 07:29

둘째 날 - 강화도에서 동대문시장까지(2003.4.12.)

 

 

(강화도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북방식 지석묘)

 

▲ 강화도에서 보낸 하룻밤

 

 길상면 전등사 주변에 위치한 강화가족호텔은 지은 지는 오래 되었으나, 새 건물 객실까지 합해서 총 105실 규모인 꽤 큰 콘도 형태의 호텔이었다. 13평 정도의 방은 원룸으로 주방기구가 다 갖춰져 부탄가스와 재료만 있으면 취사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부대시설로는 사우나, 실외수영장, 슈퍼마켓, 커피숍, 노래방, 연회장이 있고, 특히 1층 노래방을 거쳐 2층 식당과 3층 묵은 건물에서 위에 있는 새 건물로 이어지는 긴 계단 옆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운치가 그만이다.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은 노래방인데, 마침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져 있어 갈 곳도 없고 오늘밤은 자유시간 없이 자기로 결정하고, 지하 사우나에서 씻고 누웠으나 잠이 올 리가 없다. 가만히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본부로 정한 108호로 내려가 보니, 담임 선생님들이 아직도 수학여행 기간의 안전과 학생 지도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호텔 주변을 순찰하고 온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손님이 없는 시기라 대부분의 기념품점과 음식점은 불을 꺼버려 썰렁하기 그지없다. 학생들이 서성대고 있어 가본즉 교복을 입은 이 지방학생들이다.

 

 내일 아침 산책 겸 가려고 전등사 입구를 확인한 뒤, 막 문을 닫으려는 식당에 들어가 인삼 막걸리를 한 병 사고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문화재 해설이라는 명분만 주어지고 인솔에는 깊이 관여치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막걸리 몇 잔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강화도는 면적 302.14㎢, 남북 길이 30㎞, 동서 길이 12㎞, 해안선 길이 99㎞로 생김새가 감자를 세워놓은 것 같은 섬이다.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고려시대 몽골항쟁의 근거지였고, 조선시대에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본래는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오랜 침식작용에 의해 구릉성 섬으로 분리되었다가, 한강과 임진강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쌓이면서 다시 김포반도와 연결되었다. 그후 염하(鹽河)가 한강에서 분류되어 김포와 강화 사이에 해협을 이루면서 다시 섬이 되었다.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커다란 탱자나무의 일부)

 

 기후가 온화하여 남서부에 동백나무, 초피나무, 비목나무, 탕나무 등의 난대림을 이루고, 지질은 결정편암과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니산, 고려산, 낙조봉, 혈구산 등 산지가 있긴 하나 간척사업으로 곳곳에 넓은 평지가 늘어나 벼농사를 주로 해왔다. 연근해에서는 민어, 밴댕이, 새우, 꽃게, 어패류 등의 해산물이 많이 잡히고, 지역 특산물로는 인삼, 화문석, 순무 등이 유명하다. 보물 제10호인 강화 오층석탑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들이 있으며,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78), 강화 사기리의 탱자나무(79) 등 천연기념물도 볼거리다.

 

 아이들의 수런거림 때문인지, 이 터가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곳이어서 그런지, 꿈자리가 사납다. 몽골 놈들이 쳐들어와 소란을 부리는 것 같아 다가가니, 원나라 놈들만이 아니었다. 병인양요 때 쳐들어왔던 프랑스 놈들이 있고, 신미양요 때 집적거리던 미국 놈들도 있다. 저 억지를 쓰는 놈들은 분명히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라고 윽박지르던 왜놈들이다. 한참을 뒤척이다 돌아누우니, 이번에는 강화도령을 만난다. 뒤에 철종 임금이 된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원범(元範)이…. 그가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터에 세워진 용흥궁(龍興宮)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쉬워서 그런가 보다.

 

▲ 빗속에 돌아본 서대문형무소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아직 3시반 밖에 안되었다. 담임 선생님들이 자야 할 것을 생각하여 108호실로 내려가 모두 방으로 보내고 혼자 호텔 로비에 앉았다. 비오는 소리에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이 제법 굵다. 오늘 서울 나들이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걱정하며 객실을 보았는데 불이 켜져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 잠이 안 온다고 그렇게 설쳐대던 놈들도 결국 다 골아 떨어진 모양이다. 그러면 그렇지. 마니산을 한 달음에 다녀왔으니. 신문을 모두 훑고서 6시가 되어 전등사에 가려고 우산을 찾았으나 헛일이었다. 식당 아줌마들만 깨어 음식을 만들고 있었는데, 나올 때는 비가 안 와서 우산을 안 갖고 통근차로 왔단다.

 

 

(지붕을 떠받드는 벌을 받는 요부가 조각된 전등사 대웅전)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생략하고 하루를 강화도에서 보냈으면 얼마나 알뜰했을까? 북한 땅은 강화산성 북문 뒤로 가면 오두산이나 다름없이 볼 수 있고, 강화역사관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화도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고인돌이나, 돈대들과 고려궁터, 그리고 저 유명한 전등사의 보물들도 접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터인데. 아쉬워서 나오는 차안에서 얘기로나마 들려주려고 마이크를 잡았으나 창문 너머의 안개로 시야가 가려져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다녀간 것이 1997년. 6년만에 와서 그리운 얼굴들을 못 보고 가는 것처럼 섭섭하다. 서울로 나와 중심부로 진입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서울이 세계 몇 번째 안가는 공해 도시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외곽지보다 꽃이 일찍 피었다. 지금까지 제주도에도 돋아나지 않은 은행나무 잎이 제법 펴지고 개나리꽃이 지면서 잎이 무성하게 나오는 단계에 돌입했다. 라일락까지도 피어난 걸 보면 겨울 기온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서대문 형무소에 내려 시간을 보니, 11시가 넘었다. 경복궁엘 들리고 한강 건너 송파구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면 오후 4∼5시가 될 것이 뻔하니, 청와대 앞길이나 한 번 돌아 그냥 점심 먹으러 가기로 했다. TV에 자주 등장하는 구 서울구치소 정문은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데, 빗물이 번져 더욱 칙칙하다. 여러 이름으로 바뀌며 근대적 시설을 갖춘 감옥으로 쓰이다가 결국은 사적 제324호로 변해버렸다.

 

 한 때 부지 198,348㎡, 연건축 면적 26,446㎡, 수감 가능인원 3,200명이었던 이 건물은 1907년 일본인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문을 연 뒤 80년 동안 약 35만명을 수감,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하였던 곳이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개칭되면서 이곳으로 옮긴이래,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7월 7일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옥사를 이전한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숱한 민족의 수난을 지켜본 서대문형무소 정문)

 

 3. 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 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 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을 남겨 놓았다. 1988년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부르고, 1995년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을 마련, 독립관 복원 공사에 착수한데 이어 구치소의 몇 옥사, 중앙사, 나병사, 지하옥사 등과 담장 일부, 망루 2곳을 원형대로 되살려 1996년 유료 공원화 하게 된 것이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야인시대'에서 이곳이 눈에 익었는지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감옥 속으로 들어가 서로 문을 잠그며 장난한다.

 

▲ 시내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서울 구경만 실컷 한 셈

 

 서울 중심부를 관통하게 되어 있어 이름 있는 기업과 기관의 사옥들이나, 세종문화회관, 정부종합청사를 쳐다보며 광화문을 지나니, 결국 우리가 가기로 되었던 경복궁 입구에 다다른다. 비나리는 경복궁 돌담길을 끼고 돌며 경복궁과 그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얘기를 잠시 들려줬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된 경복궁(景福宮)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이 지어놓은 궁궐이다. 그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옮겨 신도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된다. 명칭은 '시경'에서 따왔으며,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그 후 부침의 역사 속에서 중건과 재건을 계속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경복궁 안에 있는 경회루)

 

 국립민속 박물관은 경복궁 경내에 있는데, 1975년 전 현대미술관 건물을 수리하여 문화재관리국 산하의 국립민속 박물관으로 발족 개관하였으며, 1979년 국립박물관 소속으로 직제를 개정하며 1982년 옛 중앙박물관 건물로 이전하고, 1992년 시설공사를 벌여 지하1층, 지상 3층에 옥탑층을 갖춘 건물로 단장하였다. 지하 1층에는 수장고, 지상 1층에는 중앙 홀과 3개의 상설전시장 및 강당, 2층에는 행정실, 3층에는 열람실로 나눠져 있다.

 

 현재 1만 6천여 점의 유물을 역사실, 생활1실, 생활2실에 나누어 전시한다. 말하는 사이에 우리가 탄 차는 벚꽃이 활짝 핀 길을 따라 경계병의 수신호를 받으며 오른쪽으로 청와대를 끼고 돈다. 아! 누구누구는 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며,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고, 얼마나 많은 공작을 꾸몄던가? 저 속에서 생활했던 사람 중 북악산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자 그 누구던가?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그럴진대 변방에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권력과 부를 얻으려는 자는 위를 따라 본을 보며 줄을 대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되기 전에는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겠다 해놓고 되고 나면 이렇게 경치가 좋고 호화로운 곳에서 호의호식하며 왕처럼 살아간다. 명당자리로 유명한 이곳에서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스럽다. 시원한 분수를 봐도 도저히 시원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니, 나도 편견에 치우친 아집이 보통은 넘은 것 같다.

 

 차는 세울 곳이 없고 갈 길은 멀어 사랑방 들어갈 생각도 못한다. 전에는 수학여행 왔다가 경비 때문에 겨우 북악스카이웨이를 돌면서 청와대를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고 필름을 압수 당한 적이 있는데, 이제 이곳을 개방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까? 격세지감을 느낀다. 무궁화 동산과 함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른 효자동 사랑방은 우리 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외국 사신들로부터 받은 선물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다. 안내서에는 일반인들이 보기 힘든 칠기병풍, 화려한 보석 세트, 박제 거북, 외국인들이 그린 안중근 의사의 초상 등 세계 각국의 진귀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기념품을 판다는데 무엇을 사다 누구를 주며 어디다 놓는단 말인가?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서 대통령이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효자동 사랑방)

 

▲ 학생들의 기대에 부풀었던 동대문시장 쇼핑

 

 아침부터 수도 서울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하루의 반 이상을 버스에서 보낸 셈이다. 청와대를 나온 버스는 송파동 기업은행 지하 두래성에서 갈비탕 점심을 먹기 위해 동남쪽으로 달린다. 광화문을 기점으로 한국일보 사옥을 거쳐 상중(喪中)에 왕후들이 소복(素服)차림으로 기거했다는 창덕궁 낙선제를 지난다. 다음은 보물 제1호 동대문을 스치면서 원래의 동대문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설명하고 답십리역을 지나, '개발은 절대 안 된다'고 써놓은 청계 천변에서는 '왜 안 되는가?' 그 이유를 설명했으나 배고픈 아이들의 귀에 쉽게 들어올 리 없다.

 

 전철과 나란히 가는 길을 따라 아차산역, 군자동 네거리, 그 다음 광진구청에 이르렀을 때, 서울에 왔으면서도 이곳에 사는 아이들 집에 들러 얼굴을 못 보고 가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2월말에 다녀갔기 때문에 서울에 묵지 않아 못 간다고 어제 일일이 전화하긴 했지만 지척에 두고도 못 가는 것이 어딘지 걸쩍지근하다. 제일 언니인 둘째에게 전화를 해보니, 인천에 출장 나가 있다고 한다. 동대문 시장 쇼핑 때도 못 돌아오겠단다. 옛날 같으면 용돈이나 집어주기 위해서 간다지만 요즘은 각각의 통장에다가 전화로 청구한 액수의 용돈을 이체시키면 되니까 한창 공부하고 있는 작은딸과 아들에게 부디 왔다 가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건대 입구, 어린이 대공원 담장을 지나 석촌 호수를 보면서 롯데백화점과 롯데월드를 소개하고, 잠실대교를 지나 얼마 안 된 곳 기업은행 지하에서 오늘도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래도 배가 부르니, 아이들도 느긋해져 이젠 동대문 시장 쇼핑만 기다린다. 동대문 시장에 이르는 길은 샛길로 왔기 때문에 얼마 안 걸렸다.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을 세내 전체를 포장, 주차장을 만들어 손님을 싣고 온 관광버스는 주차료도 안 받는다. 넉넉하게 2시간 여유를 주고 꼭 3∼4명 이상 짝 지어 다닐 것을 지시한 후 물건값을 깎는 요령을 알려 줬더니, 웃으면서 총총히 사라진다. 우리 선생님들도 포장마차 한 곳을 정해 본부로 삼기로 하고 아이들을 살피며 쇼핑하러 떠났다.

 

 

(동대문시장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들)

 

 종로구에 있는 사설인 상설 동대문시장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옷이 많고 싼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905년 7월 개설되어 그 역사가 장장 100년이 다 되었다. 처음에는 동부 이현(梨峴)에 세워졌다 하여 '배우개장'으로도 불리다가 같은 해 11월 동대문시장관리를 위한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광장시장'이 되었었다. 포목상으로 거부를 이룬 종로 상인 박승직, 장두현, 최인성, 김한규 등이 설립하여 동대문시장의 경영과 함께 토지, 가옥의 매매와 금전 대부를 겸영하였다. 1911년의 통계에는 점포수 98개 중 미곡상31개, 어물상 12개, 청과상 15개, 잡화상 15개, 기타 25개로 곡물류가 주거래 상품이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기와 건물에 문을 달아 시장이 파하면 닫았는데, 전쟁으로 시장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월남 피난민의 생활 터전으로 생활필수품과 군용물자, 외래품의 암거래를 포함한 시장거래가 활기를 띠면서 재발족 되었다. 자유당 말기에는 이정재(李丁載)를 수령으로 하는 여당 폭력 행동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동대문종합시장과 쇼핑타운과 함께 평화시장과 주변에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과 동대문운동장 서쪽에 신평화시장, 흥인시장, 운동장평화시장 등 크고 작은 상점이 꽉 들어섰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평소 사고 싶었던 3만 원 짜리 등산화와 만 원 짜리 봄 신사복 바지, 5천 원 짜리 봄, 여름 트레이닝 바지 2벌, 그리고 갈아 신을 천 원 짜리 양말 5켤레를 샀다. 돌아오는 것을 보니, 모두들 봉지를 들고 입이 함박만큼씩 벌어져 있다.

 

 

(전국체전 때 마니산에서 성화 채화를 위해 연습하는 칠선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