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학생들과 함께 한 수학여행 - 5

김창집 2003. 5. 14. 11:18

다섯째 날 고수동굴에서 김해공항까지(4월15일/월요일)



(조령삼관문의 하나인 제1관문 주흘관)

▲ 수안보 일양 유스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가 묵은 곳은 문경새재를 넘어 수안보로 가는 길에 있는 일양 유스호스텔이었다. 이
시설은 일양건설 그룹에서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천연 학습장'으로 젊은이들을 유도하기 위
해 지은 것이다. 한꺼번에 무려 1천여 명을 수용, 함께 호흡하면서 젊음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대형운동장, 객실, 식당 및 대소강당, 각종 편의시설이 준비되어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
을 몸소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체험 활동장, 자신의 인내와 끈기를 시험할 수 있는 체력
단련장, 공동의 사고와 협동심을 요구하는 문제 해결 활동,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한 취미활
동, 화합의 캠프 화이어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꼼꼼히 챙겨놓고 있었다. 많은 경험을 가
진 젊은 직원들이 나와서 학생들에게 질서 있게 식사 지도하는 폼이 벌써 다르다.

그들이 미리 계획한 대로 레크레이션을 지도하며 아이들을 사로잡는 바람에 우리는 잠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더러는 수안보에 나가 온천욕을 즐겼다. 산 속이라 어디 나갈
곳도 없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4박 모두 비슷한 곳에서 자는 것이라 잠자리는 불편이
없었으나, 도시의 야경을 맛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라고나 할까. 새벽에 일어나 강 선생님
과 함께 아침 운동 삼아 무작정 걸었다. 역시 두메산골이라 공기가 맑다. 한참 동안을 걸었
으나 어제처럼 산엔 오르지 못하고 시골길의 연속이다. 얼마를 걸었는지 마을에서 새벽 닭
우는소리가 들리며 개가 컹컹 짓는다. 모처럼 맞보는 시골의 정취다. 그 소리를 들으며 흐뭇
한 마음으로 돌아와 씻고 아침 식사를 했다.


(고수동굴 입구)

▲ 선사시대 주거지로도 활용되었던 고수동굴

학생들도 맑은 공기 속에서 푹 쉬어서 그런지, 오늘 집에 간다는 것 때문인지 하나도 피곤
한 기색 없이 밝은 얼굴들이다. 단양을 향해 달리는 차는 월악산 국립공원을 통해 송계계곡
을 넘는다. 옛날 이곳을 지나며 찰옥수수 사먹던 기억이 떠올라 두리번거렸으나 이른 시간
이어서 그런지 파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언제 와 봐도 산고수려한 곳이다. 제주도의 자연
이 좋다고 하나 이곳도 속리산 국립공원과 소백산 국립공원이 거의 이어져 아름다움의 연속
이다. 단양에 다다르니, 8경 중 옥순봉과 구담봉이 보인다. 지난번 탐문회 답사 때 충주에서
유람선을 타고 갑판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이곳 단양 선착장까지 왔던 기억이 새롭다.

고수동굴(古藪洞窟) 입구에 내리자마자 칡즙을 찾아 한 컵 마시고 학생들 뒤를 따라 굴로
들어갔다. 천연기념물 제256호로 지정된 이 굴은 주굴이 600m에다 가지굴 700m를 합쳐 총
연장 1,300m이나 되는 동굴이다. 높이도 50m나 된다. 굴을 품고 있는 산은 등우산이고, 동
굴을 형성한 지질은 고생대 초기의 조선계 대석회암통의 두무골 석회암층에 속한다. 1973년
종합학술조사 때 동굴과 입구 부근에서 뗀석기가 발견되어 선사시대에 주거지로 이용되어
왔음이 밝혀졌다. 동굴 안에는 종유석, 석순, 돌기둥, 유석 등을 비롯하여 곡석, 석화, 동굴산
호, 동굴진주, 동굴선반, 천연교, 천장용식구 및 세계적으로 희귀한 아라고나이트가 만발하여
석회암동굴 생성물의 일대 종합전시장을 이룬다.


(동굴 내부의 사자바위)

몇 번째 와 보지만 제주도에 있는 용암동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고 다양해서 좋다. 앞사
람을 따라 발을 옮겨 놓으며 이곳 저곳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곳곳에서 물이 떨어져 등골
을 서늘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런 굴은 물이 만들어 놓은 예술품이다. 지하수가 스며들
어 조금씩 석회암을 녹여 틈을 만들고 녹은 석회암은 공기와 작용해서 다시 굳어 석순과 석
주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대광장엔 길이 10m에 달하는 대종유석이 비단 폭처럼 줄을 지어
내리 뻗고,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것처럼 정교한 많은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어 웅장한 지
하궁전을 방불케 한다. 기암괴석 중 제일 빼어난 것이 사자바위로, 자연석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형태가 뛰어나서 동굴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동굴을 이루는 암석은 약 4억4천만년의 나이를 가졌고, 굴은 10만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수동굴'이란 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밀양 박씨
형제들 중 아우는 청주에, 형은 이곳에 정착하게 됐는데, 당시 이곳에는 키 큰 풀(姑)이 많
이 우거져(藪) '고수(姑藪)'라고 부르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밖으로 나온 곳에 늘
어선 상점에서 '태고의 신비 고수동굴'이라는 조그만 사진 책자를 사고 나와 학생들을 기다
리며, 둥글레차 5천 원어치와 진한 향기의 더덕 1만 원어치를 사니, 덤으로 마즙 한 컵을 준
다. 덕분에 해장은 잘 한 셈이다.

(도담삼봉의 모습)

▲ 한 창 새로 단장하고 있는 도담삼봉

몇 년 전에 찾았을 때는 선착장 위로 그네 하나 달랑 매어 있더니, 이제 그 자리엔 정도전
(鄭道傳)의 동상을 세우고 주변 정지 작업이 한창이었다. 주차장도 크게 늘리고 매장도 여럿
들어서 있어 어느덧 관광지의 면모를 갖췄다. 단양8경의 하나인 도담삼봉(嶋潭三峰)은 남한
강 상류 한가운데에 3개의 기암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푸른 강물 가운데 우뚝 선 기암괴석
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고, 큰 봉우리 허리쯤
에 수각(水閣)이 있어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루 구실을 한다. 조선왕조의 개국 공
신인 정도전이 이곳 중앙봉에 정자를 짓고 이따금 찾아와서 경치를 구경하고 풍월을 읊었다
고 하며, 자신의 호를 삼봉(三峰)이라고 한 것도 도담삼봉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충주댐의 완성으로 3분의 1정도가 물에 잠기게 되었지만, 월악산 국립공원과 이웃하여 수
상과 육상교통이 개발됨에 따라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남한강의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 한가운데 만수시 6m의 늠름한 장군봉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교태를 머금은 첩봉
과 오른쪽은 얌전하게 돌아앉은 처봉 등 세 봉우리가 물위에 솟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
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이 미워 돌아앉아 버렸다는데, 본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처봉
은 볼수록 그 생김새와 이름이 잘 어울린다.


(단양8경의 하나인 사인암)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에 있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와 지
금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해마다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
다 한다. 이에 어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오. 오히려 물
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
면 도로 가져가라."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장군봉에는 '삼도정'이라
는 육각정자가 있는데, 일찍이 퇴계 선생은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 석양
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 별빛과 달빛 아래 금빛 파도 어울어지더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단양팔경(丹陽八景)은 충북 단양군을 중심으로 주위 12km 내외에 산재하고 있는 명승지를
말한다. 단양 읍내로 들어서는 곳에 이 8경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봄 철쭉 가을 단
풍으로 유명한 대잠리의 하선암(下仙岩), 하얀 바위가 층층이 괴여 있는 가산리의 중선암(中
仙岩), 수만 장의 청단대석으로 된 벽과 반석 사이로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루는 상선암(上
仙岩), 충주 호반의 기암괴석 구담봉(龜潭峰)과 옥순봉(玉筍峰), 이곳 도담삼봉, 무지개 형상
의 돌다리 석문(石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사인암(舍人岩)이 바로 그것이다. 도담삼봉을 배
경으로 학급 사진을 찍느라 조금 지체하고 출발,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 하회 별신굿 탈놀이가 행해지는 '하회마을'

풍기, 영주, 예천을 지나 서안동 인터체인지에서 34번 국도 서쪽으로 빠져 하회(河回) 마을
을 향했다. 하회마을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인데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 유씨(柳氏)의 씨족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형을 태극
형 또는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군 일월산의 지맥인 남산이 있고, 마을
뒤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이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춘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芙蓉臺)가 병풍과 같이 둘러앉아, 산천 지형 또한
태극형 연화부수형국이다.

유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서 전래의 유
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허씨(許氏) 터전에, 안씨(安氏) 문전에, 유씨(柳氏) 배판이라는 말대
로 최초의 마을 형성은 허씨들이 이룩하여, 하회탈 제작자도 허도령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제터에 허씨들이 벌초를 한다고 한다. 화천(花川)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
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김해
공항까지 4시간 걸린다는 기사들의 말에 마을로 들어가는 곳에서 빨리 점심을 먹고 서둘러
마을로 들어섰다.

큰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유씨들이, 변두리에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는데, 이들
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문화가 병존한다. 지금까지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
옥은 양진당(보물306), 충효당(보물414), 북촌댁, 원지정사(遠志精舍), 빈연정사(賓淵精舍), 유
시주가옥(柳時柱家屋), 옥연정사(玉淵精舍), 겸암정사(謙菴精舍), 남촌댁, 주일재(主一齋), 하
동고택(河東古宅) 등이다. 양진당, 충효당, 남촌댁, 북촌댁 등 큰 가옥들은 사랑채나 별당채
를 측면으로 연결하거나 뒤뜰에 따로 배치하는 등 발달된 주거 구조를 보이고, 장대한 몸채,
사랑채, 많은 곳간, 행랑채를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다.

곳곳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는 이곳에서 행해지는 하회별신굿탈놀이 때 쓰는 하회탈과 병산
탈의 이미지를 활용한 기념품을 팔고 있다.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탈들은 지금 국립중앙박
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하회탈은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등 모두 10종 11개로 하회탈이 9개, 병산탈 2개가 전해지고 있다. 탈의 대륙적 표정과
만든 수법으로 보아 대륙의 무악면(舞樂面)과 일본의 노가면[能假面]의 중간 위치 즉, 고려
중엽인 11∼12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제작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
이 전해진다.


(국보 제121호 하회탈 중 '양반탈')

허 도령은 꿈에 신으로부터 탈 제작 명을 받는다. 작업장에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줄을 쳐 목욕재계하고, 전심전력으로 탈을 만들고 있었는데 허도령을 사모하는 여인이 못
참아 애인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몰래 휘장에 구멍을 뚫고 엿본다. 이 금단(禁斷)을 어긴 죄
로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숨졌다. 그래서 마지막 10번째의 이매탈은 미완성인
턱없는 탈이 되고 만다. 그 후 허도령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년 서낭당 근처에 단을
지어 제를 올렸다. 시간 관계로 주막에서 파는 동동주 한 잔 마셔보지 못하고 하동고택에
들렀다가 충효당으로 가 유성룡의 유품을 일별하고 나와, 강을 끼고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늘어선 길을 걷는다. 매번 올 때마다 시간에 쫓겨 병산서원 쪽으로는 가보지도 못해 아쉽다.

▲ 아쉬운 4박5일의 일정을 뒤로하며 김해공항으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이곳 하회마을에서 전승되어 오는 민속가면극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69호이다. 약 500년 전부터 음력 정초마다 동민들의 무병과 안녕을 빌기 위하여 마을의 서
낭신에게 제사지내는 동제(洞祭) 때 행해지는 놀이인 것이다. 10년마다 대제(大祭), 마을에
액이 있거나 특별한 신탁(神託)이 있을 때는 임시제를 올렸다 한다. 이 때 신의(神意)를 기
쁘게 하고자 부락 사람들이 광대와 악공이 되어 이 가면극을 연희하였다. 내용은 파계승에
대한 조소와 양반에 대한 풍자 등이며, 모두 12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래의 탈놀이 중에
서도 가장 단순한 옛 모양 그대로를 전승하는 서민극이다. 이 가면극에 사용하는 탈 11개와
신령(神鈴) 1개가 현재 전하나, 그 연희자와 자세한 재담 및 춤사위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회탈 중 허도령의 죽음으로 턱을 완성시키지 못한 '이매탈')

정해진 시간에 쫓겨 벚꽃이 폴폴 날리는 길을 주위도 돌아보지 못하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늘어선 노송들과 백사장, 그리고 병풍처럼 멋있는 절벽도 즐길 겨를이 없다. 영국 여왕 엘리
자베스 2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정도 이렇게 빡빡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번 여행
은 동선(動線)이 너무 길어 빼먹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덤으로 따라왔을
뿐인 걸. 어쩌면 우리 인생길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천천히 즐
기며 가지 못하고, 주어진 여건에 편승하여 바빠 허덕이는 꼴이라니…. 돈도 돈이지만 어떻
든 여행사와 잘 상의해서 동선을 줄여, 한 곳이라도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는 쪽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김해공항까지 4시간은 차 속에서라도 여유를 갖고 즐겨보기로 한다. 학생들이 너무
지루해 할까봐 오늘까지 금해왔던 노래방 기기를 틀어 회포를 풀게 하고, 입구 안내석에 앉
아 산하를 두루 살핀다. 한낮의 햇살이 뜨겁지만 이 자리가 시야를 넓게 해주는 곳이어서
참기로 했다. 의성, 군위를 지나면서부터 고속도로 주변은 온통 분홍빛 복숭아꽃으로 장식된
다. 언제 저렇게 사과나무를 베어버리고 복숭아를 심었는지? 이번 여행은 전국적으로 돌면
서 꽃과 함께 했었다. 시기가 4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길목이어서 우리 나라에서 피는 모든
봄꽃은 눈이 시리도록 본 셈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장면)

그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즐거웠다. 다만 디지털 카메라가 사진을 97장밖에 못 담는 것이
어서 아끼느라 했는데도 반쪽만 찍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긴 여행을 생각해서 칩을 두어
개 더 마련해야겠다. 대구에 진입하는 곳에서 차가 몇 번 정체를 거듭한다. 이 참에 대구에
사는 손위 동서에게 전화를 하니, 반색을 하면서도 서운해한다. 들리지도 못할 걸 뭐 하러
전화했느냐고 책망 아닌 책망이다. 대구를 벗어나서는 일사천리다. 김해공항에 가까스로 도
착한 것이 4시 40분. 1진은 5시 10분 출발이어서 서둘러 체크인하고 나니, 벌써 학생들이 들
어가기 시작한다. 얼른 옆에 있는 무료 컴퓨터로 달려가 칼럼에 글 한 줄을 남겼다. 이번에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준 학교 당국과 학년부장을 비롯한 담임단, 그리고
벗하여 아무 탈 없이 여행해준 학생들에게 감사 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