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학생들과 함께 한 수학여행 - 3

김창집 2003. 5. 3. 10:36
셋째 날 - 여주 신륵사에서 에버랜드까지(2003.4.13.)  


(신륵사 입구 주차장에 설치한 유리 조각)

▲ 새벽에 혼자 다녀온 신륵사(神勒寺)

 4년 전에 한 번 다녀간 뒤로 너무나 아름다운 절이어서 언제 다시 가보나 하고 별렀던
것이 기회는 너무 쉽게 다가왔다. 엊저녁에 차를 세워놓은 곳이 바로 신륵사 입구 주차장
이어서 저녁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우리가 묵었던 일성 남한강 콘도는 대부분의 손님이
학생으로 여주 신륵사와 영릉 등을 구경하고 신륵사 옆에 있는 도자기 체험관에서 실습하
고 나서 서울보다 비교적 방 값이 헐한 이곳에 묵는 것 같았다. 어느 시골 중학교 학생들
이 같이 묵게 되어 가는 곳마다 시끄럽다. 로비 한 구석에 3대 놓여 있는 컴퓨터 사용료
가 3분에 100원씩 하길래 아이들 틈에 끼어 메일을 확인한 뒤, 칼럼에 글 두어줄 올리고
사우나에서 몸을 푼 다음, 아이들이 자기를 기다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학생들의 장난 전화 때문에 두어 번 깨기도 했으나, 비교적 숙면을 하고 깬 것이 5시. 주
섬주섬 옷을 주어 입은 뒤 대충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안개가 조금 낀 채로 희부옇
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신나게 뛰어 신륵사 일주문 앞에 이르니, 머리에 강하게 남아
있던 인상대로 '신륵사(神勒寺)'라는 현판 글씨가 너무나 크고 힘있다. 밤새 예불을 했는
지 한 여인이 조용히 나오고는 아무도 안 보인다. 경내에서 뛸 수도 없고 천천히 걸어 남
한강변 팔각정으로 가서 새벽 안개 피어오르는 강물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뒤돌아 서서 보
물 제226호 다층전탑을 우러른다.

 높이 9.4m의 전탑이 기단 부분은 화강석으로, 탑신부는 벽돌로 이루어졌다. 그 구조는
일반 석탑의 기단과 비슷한 2중의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고, 그 위에 탑신
을 구축하여 6층까지 쌓았으나, 그 위에 다시 밑단이 있어 7층 같아 보이는 매우 애매한
형태다. 축조 형식도 신라시대의 전탑과는 달리 옥신에 비해 옥개가 매우 얇아 전체에서
오는 인상이 많이 다르다. 또한 옥개 받침은 3층까지 2단이고 4층 이상은 1단이며, 상면
의 받침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식으로 이례적인 형태인 것은 무리하게 수리해서 그
런 것 같다.


(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

 사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고려
말 1376년(우왕2)에 나옹화상(懶翁和尙)과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과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 1472년(성종3)에는 세종을 옮겨 모신 영릉의 원찰(願刹)
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는 "미륵 또는 혜근
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설과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 매우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자 순해졌
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이어 보물 제225인 다층석탑을 보고 오른쪽 나지막한 산으로 올랐다. 이 사찰이 있는 곳
은 봉미산(鳳尾山)의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작은 오름 크기인데, 반 바퀴 돌아 맞은편
으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고려말의 명승인 혜근(慧勤)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인 보물
제228호인 석종(石鐘)을 비롯하여 그와 관련된, 보물 제229호 석종비, 보물 제230호 대장
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 석등이 한 군데 몰려 있다. 오랜만에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인 조선시대 절집
으로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건축물이다. 앞면은 6짝의 띠살문을 달아 모두 열 수 있게 만
들었고, 나머지 3면은 벽을 쳤다. 이 건물의 특색은 전후면을 각각 1칸씩으로 처리하여 가
운데에 기둥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대들보를 볼 수 없는 점이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천
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으며,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화상과 그 좌우에 지공(指空) 및 무
학(無學)의 영정이 걸려 있다. 새벽부터 보물을 7개나 훔쳐본 기분이 들어 살짝살짝 걸어
나와 천왕문에서 뒤돌아 합장을 하고, 시간이 늦을세라 콘도로 달렸다.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 묘역 전경)

▲ 세종대왕과 왕비의 무덤인 영릉(英陵)

 얼른 샤워를 하고 나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주차장으로 갔다. 서울과는 달리 살구꽃과
앵두꽃, 목련이 한창이다. 아침에는 빨리 뛰느라 못 보았는데 유리로 된 조각(?)이 있어
그것을 감상하는데, 숙소에서 사람이 와서 방벽에 구멍을 두 개나 뚫었다고 야단이다. 알
고 보니 편을 짜서 베개 싸움을 하다가 석고 보드로 되어 있는 벽을 손상시킨 모양이다.
한창 크는 아이들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대충 무마를 시키고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사적 제195호 영릉(英陵)으로 갔다. 같은 능역 안에는 공
교롭게도 음이 같은 17대 효종과 비의 무덤인 영릉(寧陵)이 있다.

 다같이 세종대왕 유적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언제 와 봐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
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당초의 능은 1446년인 세종 28년에 소헌왕후가 먼저 승하했을 때
경기도 광주 서강(西岡)에 쌍실의 능을 만들어 그 우실(右室)은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
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그 뒤 능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
기자는 주장이 있어 1469년(예종1)에 석물(石物)은 그 자리에 묻고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
다. 그 석물은 1973년에 발굴하여 서울 청량리 영휘원 북쪽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겼다.

 정문으로 들어가니, 오른쪽에 세종대왕 동상이 서서 우리를 맞는다. 언제나 인자해 보이
는 것은 성군이라는 선입견 탓인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업적을 쌓아 우리의 삶을 풍
족하게 한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이다. 옷깃을 여미며 훈민문을 지나 산수
유 곱게 핀 묘역으로 들어서서 연못에 있는 비단잉어를 보니, 그 사이에 많이도 자랐다.
아마도 여기에 마지막으로 다녀간 것이 4∼5년은 된 것 같다. 홍살문을 넘어 음식을 마련
하는 건물과 바로 무덤 앞쪽 제를 지내는 정자각을 지나 능 옆으로 바짝 접근한 뒤 학생
들에게 소개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창한 영릉 모습)

 능은 합장했고 무덤 속의 널방은 석실(石室)로 꾸며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임을
표시했다. 병풍석의 무늬를 간소화시켜 이때부터 석상고석(石床鼓石)의 수가 다섯에서 넷
으로 줄었고, 능 남쪽 아래쪽의 동서 계단을 없앴다. 문,무인석이나 말의 석상은 그대로인
데 비교적 소박한 모습이다. 걸어 나오다 세종대왕 기념관인 세종전으로 들어갔다. 세종전
에는 훈민정음을 비롯해 아악과 측우기, 자격루 등 세종의 업적을 기리는 발명품이 전시
돼 있고, 밖에는 그것들을 돌로 만들어 설치했다. 시간이 없어 산 저 쪽 자락에 있는 효종
과 인선왕후 장씨(張氏)의 능을 오늘도 가보지 못하고 그냥 차를 타자니 발걸음이 무겁
기 짝이 없다.

▲ 불교 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세운 '목아박물관'

 목아박물관은 우리 나라 전통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중요 무형 문화
재 108호 목조각장인 박찬수가 세운 개인 박물관이다. 호가 목아(木芽)인 그는 양산 통도
사 화문투각소통을 재현하는가 하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축소 재현, 양산통도사 사천왕
상 재현, 해남 대흥사 삼존불상을 보수하고, 직지사 설법전 법상 및 목탱화 제작, 편종, 편
경대 복원, 통도사 옥련암 1250아라한상, 신중목탱화 및 삼존불상을 제작하는 등 국내 중
요한 불교 문화 유적과 유물을 복원하는데 힘써 왔다.


(목아박물관 정원의 미륵삼존대불)

 1994년 6월 본관 야외전시장의 미륵삼존대불의 점안식을 시작으로 전문사립박물관의 문
화사업을 시작하여 매년 기획전시와 문화함양을 위한 박물관 문화학교인 전통불교 문화강
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그 외 우리 나라의 불교 관련 자료와 목공예 분야의 소중한 자
료들을 일반에 널리 알리는 한편, 잊혀져 가는 우리 나라 전통미술의 복원과 계승을 위
한 많은 사업들을 구상하고, 전통목공예의 맥을 이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 잊혀져 가는
우리 나라 전통의 불교조각 기법을 보존하고 새로운 기법으로의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길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들어가니, 두 쌍의 석장승이 길을 안내하고 정문
못 미쳐 터를 잡아 여러 장승들을 모셔놓았다. 정문 안 왼쪽에 커다랗고 가느다란 미륵삼
존대불을 세웠고, 야외 조각공원을 꾸며 백의관음, 자모관음, 비로자나불상, 삼층석탑, 탄
생불과 다양한 동자(童子) 브론즈 작품, 나부상, 달마상 등 약 40여 점의 유물과 작품들
이 전시되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올라간 3층 전시실에는 약사여래좌상, 팔상성도, 용왕상, 금강역사상,
십이지신상, 칠성목탱, 석가고행상, 11면42수관음상, 백의관음상, 소조여래좌상, 11면관음상, 문수보살상, 인왕, 사천왕상 등 유명 모사(模寫) 작품이나 창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나한전, 윤장대, 소통, 초두형 향로, 목어, 나한상, 목공구실, 건칠약사불
수, 목불입상, 인도불탑, 연봉, 청동발, 청자대접, 관솔사천왕 등을, 1층 전시실에는 열반목
탱화, 아미타삼존도, 목재동자상, 석가모니불감 등을, 지하 1층 전시실은 명부전을 재구성
해 놓고 있었다.


(목아박물관 정원에 모아 세워놓은 제주의 동자석들)

 명부전은 지장보살, 무독귀왕, 도명존자의 지장삼존상과 열명의 왕, 판관, 사자, 동자 등
20여 구가 넘는 불상을 배치하였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20분 짜리 영화 '부처가
되고 싶은 나무'를 상영한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박물관에 전시된 모든 조각품들의 제작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청각 교재로 활용되고, 영상실은 또 박물관의 문화학교 강
의가 열리기도 하는 다목적 공간이라 한다. 이것저것을 보다 시간이 부족하여 부랴부랴
나오는데, 정원에 모아 놓은 동자석이 눈에 익다. 10여 쌍이 넘는 이 제주 동자석이 정상
거래되지는 않았을 터. 요즘 무덤에 세워놓은 동자석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많은 것을 생
각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 민족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와우정사'

 와우정사(臥牛精舍)로 가기 위해 다시 용인으로 돌아와 57번 국도를 따라 달렸다. 이 절
은 용인시 해곡동 연화산에 있는 대한불교 열반종의 총본산으로 1970년 실향민인 해곡 삼
장법사 김해근이 부처의 공덕으로 민족 화합을 이루기 위해 세웠다는 호국 사찰이다. 경
내로 들어서자마자 높이 8m의 거대한 불두(佛頭)를 돌무더기 위에 얹혀 놓은 것이 보였
는데, 불신(佛身)이 완성되면 100m가 넘을 거라 한다. 열반전으로 오르는데, 왼쪽에 세계
각지의 불교 성지에서 가져온 돌로 쌓은 돌탑 여러 개가 보인다. 불교 국가를 꽤 둘러보
았지만 처음 보는 독특한 형태의 탑이다.


(와우정사 앞에 있는 8m의 거대한 불두)

 열반전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통향나무를 다듬어 만든 길이 12m, 높이 3m의 와불
(臥佛)이 봉안되어 있고, 요사채에는 한국 불상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 및 아시아 각지에
서 들여온 3,000여 점의 불상이 있는데, 이 불상들을 봉안하기 위해 세계만불전을 신축할
예정이라 한다. 대각전에는 석가모니의 고행상이 있고, 범종각에는 제24회 올림픽경기대
회 때 타종했던 무게 12만 톤에 이르는 통일의 종이 걸려 있었다. 이밖에 경내에는 황동
8만 근으로 10여 년간 만든 장육존상 오존불과 국내 최대의 청동미륵반가유상, 그리고 석
조약사여래불이 보인다.

 이 절은 세계 41개국의 불교 단체 및 종단과 활발히 교류하는데, 사찰 내 회관에는 세
계 불교도 총연맹 본부, 세계 불교문화 교류협회, 한국-스리랑카 불교문화 교류협회, 한국
-미얀마 불교문화 교류협회 등의 단체 사무실이 있다. 또, 전 스리랑카의 푸리마다사 대
통령이 강갈라마 테라혜라 식전에서 와우정사로 봉정한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
고 있는데, 지 지라니사라 대승정의 증명을 거쳤다 한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이리 뛰
고 저리 뛰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정말 이번 여행에서 처음 와 보는 목아박물관
과 이 와불정사는 불교 미술의 진수를 다 보여준 곳이었다.


(세계 각지의 불교 성지에서 가져온 돌로 쌓은 돌탑)

▲ 우리 나라 전통정원을 집대성한 '희원'과 보물창고 '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한국의 전통 정원인 희원(熙園)을 거치기로 하고 앞
장 섰다. 정문을 들어서서 우리 나라 대표적인 정원의 모습을 본떠 꾸며놓은 아기자기
한 구조물을 보았다. 우리 나라의 정원에는 궁원(宮苑), 사원(寺苑), 능원(陵苑), 관가정원
(官家庭苑), 민가정원이 있고, 민가정원은 건물의 기능에 따라 저택정원, 별당정원, 별서정
원으로 세분된다. 이와 같이 정원의 유형은 기능, 목적, 성격과 소유주 등 다양하게 나눌
수 있겠지만 한국정원은 정원의 입지조건에 따라, 지형과 지세를 거의 손상하지 않고 조
성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정원은 없다.

 정원의 구성요소는 정원의 크기와 용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자연풍경식인 정원
의 경우 자연환경 요소가 기본이 되고 여기에 풍속, 신앙, 사상 등이 가미되어 인공구조물
이 조화롭게 배치된다. 자연환경 요소로는 해, 달, 별, 바람 등의 천계물(天界物)과 지반
(地盤), 돌, 물, 동식물 등의 지계물(地界物)로 나눌 수 있다. 인공구조물로는 대문, 정자,
루(樓), 전(殿) 등의 건축물과 단(檀), 대(臺), 다리, 굴뚝, 연못 등의 축조물 및 경석
(景石), 석등(石燈), 석수(石獸), 석조(石槽) 등의 점경물(點景物)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일별하고 바삐 미술관으로 갔다.


(우리 나라 정원의 좋은 것을 모두 본떠 만들었다는 희원 정문)

 마침 1층 기획전시실에는 '2003 호암미술관 명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7월 31일까지 열리
는 이 전시회는 1만 5천여 점이 넘는 소장품 가운데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아
름답고 훌륭한 작품을 엄선하여 전시해 놓아 2층으로 갈 필요 없이 한 장소에서 수백 점
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1982년 4월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삼성그룹 회장이었던 호
암 이병철(李秉喆)이 수십 년간 수집한 미술품들을 1978년 삼성미술문화재단에 기증함으
로써 이루어졌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이제 삼성을 비롯한 대우, 현대
3대 그룹 창시자들은 갔지만, 외국으로 유출된 작품까지 애써 모아 놓은 이곳의 미술품
은 영원할 것이다.

 한국 건축의 전통미를 살린 이 미술관은 미술품의 영구보존을 위해 온습도 자동조절시
설, 퇴색방지용 자외선 차단 조명시설, 전자 자동경보시설 등 세계적 수준의 시설을 갖추
고 있으며,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중요한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한국 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 상설 전시실에는 17∼20세기
의 한국민화를 대표하는 걸작품들이, 2층 전시실에는 고서화 및 도자기류가 전시되어 있
다. 특히 4전시실에는 가야유물을 전시하여 가야시대의 문화유산을 선보이고 있다.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8호 가야 금관)

▲ 보물 창고에 왔다가 그냥 나가는 아쉬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굳이 한 바퀴 휙 돌고 나가버린 학생들을 나무
랄 생각은 없다. 국보 한 점 없는 곳에서 온 그들이지만 몸으로 느끼는 신나는 에버랜드
의 놀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어정쩡하게 혼자서 한 발짝 움직이면 국보,
한 발짝 움직이면 보물 앞에서 나만 쩔쩔 매고 있었다. 작년에 제주국립박물관 개관기념
특별전에 초대되었던 국보 제137호 세형동검(細形銅劍)이 동모(銅眸), 동과(銅戈), 호형대
구, 칼집부속구 등과 함께 나란히 누워 아는 체를 한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한 발짝 옮기
니 같이 왔던 국보 제146호 청동환상쌍두령과 쌍두령(雙頭鈴), 간두령(竿頭鈴), 팔주령(八
珠鈴)이 보인다.

 보물은 그만 두고라도 국보 제138호 가야 금관, 제174호 통일신라 금동 수정감장 촛대,
제118호 고구려 금동 미륵반가상, 제134호 고구려 금동 보살삼존상, 제85호 고구려 금동
'신묘'명 삼존불, 제128호 삼국시대 금동 관음보살 입상, 제129호 통일신라 금동 보살 입
상, 제136호 고려 용두보당, 제213호 고려 금동 대탑, 제214호 고려 흥왕사명 청동은입사
운룡문 향완, 제171호 고려 청동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 합 등의 역사적 유물과 국보 제196호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變相圖), 제218호 고려 아미타삼존도 등의 옛그림, 제210호 고려 감지은니 불공견삭신변진언경, 제215호 고려 감지은니 대방광불화엄경, 제235호 고려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 제234호 고려 감지은니 묘법연
화경….

 다음간으로 옮기니 그곳은 도자기의 천국이었다. 국보 제133호 고려 청자진사 연화문 표
형주전자, 제252호 고려 청자음각 연화문 매병, 제169호 고려 청자양각 죽절문 병, 제172
호 조선 백자상감 진양군영인정씨명 묘지, 백자 이부잔과 잔대, 백자상감 초화문 편병,
제219호 조선 청화백자 매죽문 호, 제258호 조선 청화백자 죽문 각병, 그림으로 교과서에
실려 우리 눈에 익은 국보 제217호 겸재 정선(謙齋鄭敾)의 금강전도(金剛全圖), 제216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혼자 남은 것이 이상하여 눈총을 받을까봐 뛰어 나오는데, 야
외 조각전시장의 조각 작품 90여 점이 발길을 붙잡았으나 뿌리쳤다. 부르델의 작품을 또
보고 싶었는데….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3호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전자)

▲ 정말 아이들을 사로잡은 에버랜드(Everland)

 호암미술관 정문을 출발한 버스가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에버랜드 정문 주차장에 차를 세
우고 모두들 내렸다. 앞으로 3시간 동안은 설레는 아이들 틈에 끼어 동심으로 돌아가 그
들과 함께 마음껏 즐기리라 생각하고, 모든 놀이기구를 다 이용할 수 있는 띠를 받아 팔
목에 찼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다시 올 기회가 없을 것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청룡열차
와 샤크만은 꼭 타고 말리라 생각했다. 튤립은 더러 피어 있지만 하얀 튤립들은 봉오리
그대로다. 아이들을 인솔하는 건 그들과 놀아주며 해도 될 테니까….

 그러나, 450만평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이 시설을 다 도는 데만도 3시간은 넘어 걸릴
터. 우선은 마음먹은 것부터 타고 보자는 생각으로 여학생들과 어울려 특급열차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토요일 오후지만 시즌이 아니어서 그렇게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1976년 4월 삼성그룹에 의해 용인자연농원으로 문을 열었을 때부터 수학여행 때마다
찾은 셈이지만 롯데 월드나 어린이대공원 등과 혼동되어 쉽게 그 장소를 찾을 수 없다.

 먼저 특급열차(?)에 줄을 서서 15분만에 자리를 잡고 안전대를 내린다. 출발해서 천천
히 오를 때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내리며 두어 바퀴 감돌자 온갖 비명들이 쏟아진다.
모습도 가지가지. 그냥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굴이 파랗
게 질린 채로 넋 나간 사람도 있다. 다시 천천히 가다가 이번에는 거꾸로 두어 바퀴 도는
데, 옆의 여학생이 내 점퍼를 꽉 잡아 다닌다. 허걱!


(에버랜드의 야경)

 모두들 상기된 얼굴로 2∼3분의 스릴을 즐기고 내려오니 모니터에 공포에 질린 모습들
이 비춰져 있다. 돈을 주면 사진으로 뽑아준다는데, 모두들 자신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
리기는 하면서도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공포에 질린 자신의 모습을 아무도 곱게 봐
주지 않을 테니까. 샤크를 타는 곳은 그 옆에 있었다. 방금 특급열차를 타서인지 모두들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둘씩 짝을 지어 자리에 앉으니, 다시 안전대가 내려온다. 그네처럼
앞뒤로 오가기를 서너 번 한 뒤에 이번엔 순간적으로 거꾸로 섰다가 돌기를 두어 차례 반
복한다. 다시 비명 소리가 터진다. 이번에는 공포에 질린 소리가 반, 환성이 반씩이라고
나 할까?

 내려와 옷을 추스리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미술 선생님이 곡차 한 잔 할 곳을 발견했다
고 빨리 오란다. 제복 입은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찾아갔더니, 파전을 파는 곳이다. 의
당 동동주나 막걸리가 있겠지 하고 들어갔는데, 그런 건 못 팔게 돼있다고 한다. 이번 여
행 중에 술을 즐기는 분은 서울에서 잠시 볼 일 보러간 영어 선생님과 미술 선생님 그리
고 나뿐이다. 할 수 없이 백세주 한 병씩을 따고 나오니 4시다. 들어올 때 4시에 쇼를 한
다고 한 것이 생각나 그랜드 스테이지를 찾았는데, 막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쇼 히스
토리 2003'이라고 하여, 외국인들이 나와 원시 군무에서부터 중세의 궁중무용, 현대의 테
크노와 힙합 댄스까지 인류와 함께 한 춤의 모든 것을 공연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30분 동안 쭉쭉 뻗은 다리를 자랑하는 무희들의 신나는 춤을 보고
나니, 이제 모이는 시간은 30분밖에 안 남았다. 학년부장 선생님이 전화로 차나 한 잔 하
면서 학생들을 모으자고 한다. 다른 선생님들은 점잖게 자연동물원인 사파리를 구경하며
쇼핑을 즐겼다 한다. 내가 특급열차와 샤크를 탔다니까 모두들 웃는다. 말들은 않지만 나
이 생각 않고 그런 걸 탔느냐는 느낌이 역력하다. 뭐가 어째서? 학생을 이해하려면 그들
의 마음이 되어 보아야 한다고 애써 변명하며 웃었다. 학생들도 흐뭇한 얼굴로 제 시간
에 돌아왔다.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즐긴 하루였다. 한 10년은 젊어진 기분이다.


(에버랜드의 튤립 축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