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역사기행] 의녀반수 김만덕의 삶 (2)

김창집 2003. 7. 19. 07:34



(만덕관 입구 중앙에 자리한 홍상문 화백의 그린 영정 모습)

 

▲ 건입포(健入浦), 그녀의 꿈을 이룬 객주집

 

 객주(客主)는 경향 각지의 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그에 부수되는 창고업·화물수송업·금융업 등 여러 기능을 겸했던 중간상인을 말한다. 좁게는 행상, 넓게는 객지상인에 대한 모든 행위의 주선인이라는 뜻을 가진다. 주된 업무는 위탁자와 그 매입자 사이에서 간접매매를 하여 그 대가로 구전을 받는 위탁매매를 담당하였다. 이 외 부수 업무로서 위탁자에게 무상 또는 실비로 숙박을 제공하는 여숙(旅宿) 업무,화물 가진 사람이나 살 사람에게 행하는 대금입체 업무, 자금 제공 등의 금융 편의를 위한 금융 업무, 각종 물화(物貨)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 업무, 그리고 화물 운반을 위한 마차나 마방(馬房) 또는 선박을 알선하는 수송 업무까지 맡았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황을 이룬 객주는 주된 업무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었다. 중국 상인만을 상대로 하는 객주가 있는가 하면, 보부상(褓負商)과 더불어 각지의 장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방의 객주를 단골로 정하여 거래하는 객주도 있다. 그밖에도 일반 보행자에 대한 숙박만을 본업으로 하던 보행객주(步行客主), 대금 등 금융의 주선만을 전문으로 하는 환전객주(換錢客主),가정 일용품만을 취급하는 무시객주(無時客主) 등이 있었다. 김만덕이 건입포(健入浦)에 차렸던 객주집은 본토와 동떨어진 제주도 포구의 특성상 위의 여러 가지가 복합된 형태로 보아진다.

 

 

(깨끗하게 새로 복원된 산지천의 모습, 조금 아래쪽에 객주집이 있었음)

 

 김만덕의 객주집터를 찾기 위해 새로 잘 정돈된 산지포를 따라 가다가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금산 유원지 아래에서 왜가리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언뜻 만덕 할머니의 모습이 연상되어 놀래지 않게 조용히 내려서는데, 발아래 손바닥만 한 거북이 뭍에 나와 앉아 있다가 첨벙 물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삼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자리를 잡고 앉아 물 속을 드려다 보니,은어 떼가 수로(水路) 구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수없이 반복한다. 만덕의 객주집에도 손님이 저런 식으로 들락거렸겠지.

 

 하얀 몸체에 잿빛 날개를 접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의젓하게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왜가리의 모습이 만덕 할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발을 옮겼다. 지금은 골목길이 되어버린 옛 산지로에 접어들어 어렵지 않게 제주시에서 세워놓은 '김만덕의 객주집터' 표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객주집터는 마구 파헤쳐 어질러지고 물이 흥건히 고인 채 커다란 덤프 트럭이 들락거리고있다. 표지판은 2001년 5월에 시작하여 2003년 6월 완공 예정인 한국전력공사 신축 공사가 한창 진행중임을 알린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여인숙이 성업 중이던 이 골목에는 아직도 등대여인숙, 희망여인숙, 남양여인숙, 용진여인숙, 진도식당, 등대다방 등이 추억처럼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옛 포구 자리는 매립되고 항만은 새롭게 변모되었지만, 옛날 목숨을 걸고 풍파를 이겨내며 긴 바다를 건너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상륙한 사람들에게 여기가 어떤 곳이 되었겠냐는 것은 말을 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 그들을 맞아 따뜻한 물로 씻게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한편, 일하는 사람들을 풀어  짐을 날라다 차곡차곡 정리하는 모습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섬에서 나지 않은 물건들일 테고, 그들이 가지고 가는 물건들은 섬에서 나는 특산물인 말총·미역·전복·양태·우황·진주 등일 터였다. 그리고 성안을 출입하기가 수월치 않은 이곳에서 여러 날 묵으며 항해하기에 알맞은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탑 뒤에 만들어 놓은 부조물로, 구휼미를 싣고 와 목사에게 넘기는 장면)

 

▲ 4년간 계속된 흉년과 김만덕의 구휼(救恤)

 

 목 좋은 이곳에 객주집을 경영하면서 장사에 이력이 붙은 만덕에게는 전국적으로 단골이 생기면서 규모가 커져, 재산이 차츰차츰 불어나고 해가 거듭될수록 축적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30여 년 세월이 흘러 그녀의 나이 57세되던 해인 1795년(정조19)에는 제주에 흉년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1792년서부터 시작된 흉년은 1794년에 들어서 극에 달하는데 이른바 갑인년 흉년이 그것이다.

 

 '갑인년 흉년에도 먹당 남은 물'이란 말은 물론 제주에는 그만큼 식수가 풍부하다는 비유일 테지만 먹을 것은 물뿐이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것이 다음 해까지 이어졌으니 그 참상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것은 조정에 올렸던 장계를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1794년(갑인) 3월2일에 올린 심낙수(沈樂洙) 목사의 장계에는 "3읍에 굶주린 자가 많아서 6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봄여름 사이에 온 섬에 염병(染病)이 치열하고 기근(饑饉)까지 겹쳤으니, 병든 자는 굶주려 죽고 굶주린 자는 병으로 죽었습니다."와 같이 적고 있다.

 

 그 해 9월 17일에 올린 장계에도 "금년에 3읍 농사가 단비를 얻어 대풍이 예상되더니, 뜻하지 않게 8월 27일에 동풍이 크게 일어나기와가 날리고 돌멩이가 마치 회오리바람에 나뭇잎이 날리듯 하여, 곡식이 큰 상처를 얻었습니다. (중략) 지금 당장에 백성들의 식량은 여름철 보리가 조금은 남아서 굶주림은 없을 것이나, 10월 이후의 형세는 장차 조정에서 구호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쌀 2만 석을 실어오지 않으면 장차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하고 당시의 상황을 급박하게 전하고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모습, 강부언 화백 그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휼미를 싣고 들어오던 배도 바람을 만나 가라앉아 버린다. 1795년 윤 2월 3일의 실록(實錄)을 보면, "제주목사 이우현(李禹鉉)이 이 전곡을 실은 배 다섯 척이 파선 된 것을 치계(馳啓)하였다. 하교하시기를 탐라에 다시 운송할 1만 1천 석의 곡물이 일제히 도착하여야 도민들의 위급한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는데, 밤에 장본(狀本)을 보고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다섯 척에 실은 몇백 포가 침실(沈失)하였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구나."라고 침통해 하는 부분도 보인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듯 관에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김만덕이 나선 것이다. 근래에 나온 기록에는 1천금을 내 놓아 아는 사람들을 통해 10일 만에 육지에서 보리쌀을 500석을 구입하여 그 중 10분의 1은 친족과 친지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모두 관에 보내어 기민(饑民)을 구하게 하였다는 것도 있고, 그것으로 관덕정 앞뜰과 삼성혈 목에서 솥 10여 개씩 걸어놓고 날마다 죽을 쑤어 한 그릇씩 먹였다는 기록도 있다.

 

소설가 정비석이 그의 <명기열전>에서 목석원(木石苑)에서 김만덕이 보리를 갈았던 맷돌과 커다란 가마솥을 보았다고 하여 달려가 보았더니,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이우현(李禹鉉) 목사가 올린 장계에서 "본주 김만덕 여인은 곡식을 사서 진곡으로 450석을 원납하였고,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은 진곡으로 보충한 것이 3백석에 이르며, 장교 홍삼필(洪三弼)과 유학 양성범(梁聖範)은 각각 원납곡이 1백석이 되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하는 대목이 보일 뿐이다.

 


 

(사라봉 모충사에 세워놓은 그녀를 기리는 묘탑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