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문회 - '섬 속의 섬' 비양도 답사기[2005. 9. 24.]
* 설레는 마음으로 배에 오르는 회원들
▲ 5일 동안 불덩이를 내뿜어
때는 고려 목종 2년(1002) 6월. 제주섬 서북쪽 협재 앞
바다에 4개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기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네 개의 용암(鎔巖) 줄기. 하루하루 재를 쌓아올리며
계속되다가 닷새를 넘기고 나서야 그쳤다. 연기가 사라지고 나자 바다 위 그 자리엔 실로 300척(尺)이 넘는 산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조물주가 재주를 부렸는가? 사람들은 바다에서 솟아난 것이기보다는
어디서 날아온 것이라 여기고 비양도(飛揚島)라 이름하였다. 배를 타고 조심스럽게 가본 즉 흘러내린 용암은 엉키어 기와 모양이 되어 있었다.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내용을 당시 상황을 바탕으로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다.
지질학에서는 보통 변화의 단위를 10만년을 기준으로 한다. 지구 탄생 이래로 숱하게 이어진 화산의 대폭발과 풍화작용으로 오늘 우리가 사는 땅 모양이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때, 불과 천년 전의 이 일은 아직도 제주도에 화산활동이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더구나 그게 역사시대에 이루어진 일임에랴. 그러나, 현장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비양도는 이 때 탄생한 섬은 아니다.
* 한림항 입구의 등대
그리 크지 않고 가파도처럼 밋밋하지만 벌써 2차 화산활동기쯤에 생겨난 섬이었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밑 부분이 그를 증명해준다. 곳곳에 신석기 유물이 흩어져 있는 것도 그 증거다. 따라서 2002년 북제주군에서 비양도 탄생 천년의 행사를 치른 것은 분명히 넌센스다. 면적 0.5㎢, 동서 길이 1.02㎞, 남북 길이 1.13㎞의 조그만 섬 비양도. 그러나 이곳은 화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살아있는 화산박물관이다.
△ 5년 만에 다시 답사한 비양도
섬이 좋아서 1년에 한 차례 정도는 변함 없이 이 섬을 다녔는데, 이번에 갑자기 다시 탐문회 답사를 기획하게 되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행하는 답사지만 본섬에 살면서 비양도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는 비양도를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그런데 선편이 원활하지 못한 관계로 사람이 몰리는 일요일보다 토요일 오후로 일정을 짰고, 많은 회원들이 몰릴 것에 대비해 선착순 80명으로 제한하였다.
비양도에는 하루 두 차례 뱃길이 열린다. 매일 아침 9시와 오후 3시에 한림항을 출발해서 비양도를 왕복하는 것이다. 편도 요금은 어른이 1,500원, 학생은 900원이다.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수지를 맞출 수 없어, 유일한 도항선인 '비양호'는 군에서 내리는 보조금으로 근근히 유지된다. 운행 시간은 딱 15분.
* 배가 지나가며 일으킨 물결
문제는 정원이 43명밖에 안 된다는 데서 시작된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고 선주에게 전화를 넣어 정기 운행말고 네 차례 운항해줄 것을 요청하고 확약 받았다. 우선 먼저 나온 회원 43명을 태우고 한림항으로 가서 1시 50분에 1차 운항을 한다. 15분만에 도착한 회원들은 즉시 일주도로를 통해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며 답사한다.
그 사이 배는 다시 한림항으로 돌아가 2호차로 온 회원들을 태우고
2시 25분에 출발한다. 일주도로로 한바퀴 돈 1호차 회원들은 바로 비양도 정상 등반에 들어가고, 2호차의 회원들이 뒤따른다. 정상에서 조우한
회원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강의를 들은 뒤 막걸리 한잔하고 내려와 1호차의 회원들은 배를 타서 나가고, 2호차의 회원들은 시계 방향으로 섬을 돌며
답사한 후 다시 배가 오면 타고 나오는 계획이다.
▲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어
순서를 결정하는 것은 1만원씩 은행 구좌에 넣는 참가비 납부 순서다. 아니나 다를까 희망 회원들이 몰려 80명 정원이 차서 은행 구좌를 막는데 순간적으로 10명이 휘리릭 올라온다. 나머지 6명을 임원진 몫으로 남겨 두었기 때문에 임원을 3명으로 줄이고 잘 아는 몇 분 회원의 양해를 얻어 겨우 86명으로 내렸다. 그 후로도 왜 못 가느냐며 전화가 걸려와 해명하기에 진땀을 빼었다. 출발할 때도 회원들이 찾아와 기웃거리다 돌아간다.
* 출발 10분만에 손에 잡힐 듯
1시 출발인데 12시 40분에 벌써 1호차가 차서 10분전인 50분에 출발했다. 차는 시원하게 잘 빠져 1시 35분에 벌써 한림항에 도착하여 선주를 만났는데, 선장과 50분에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 안 나타나 휴대폰으로 어렵게 수소문해 45분에 출발했다. 막 떠나면서 보니까 1시 5분에 출발한 2호차가 벌써 들이닥친다. 바람이 좀 거칠어져 있어 배를 잘 안 타본 회원들의 얼굴엔 긴장이 서려있으면서도 설레는 빛이 역력하다.
자주 가는 나도 그러는데 어른이든 아이든 여행에 나서는 심정은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다 선실로 들어가고 몇 명만이 선미(船尾)에 몰려 밖의 경치를 즐기고 있다. 출어(出漁)를 서두르는 한림항의 어선들과 등대, 그리고 멀어져 가는 한라산을 카메라에 담느라 부산한데, 벌써 막걸리 한잔을 권한다. 아침을 10시경에 먹은 관계로 나올 때 점심을 걸러서 약간 시장 끼가 돌아 거푸 석 잔을 들이키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사진 찍으랴 밀려오는 물결을 피하랴 금세 15분이 흘러 바로 부두에 닿았다. 낚시를 하던 사람 중 아는 사람이 있어 인사를 하는 사이 뱃머리를 대고 묶지도 않은 채 하선을 시킨다. 딱 15분 걸렸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하선이 끝나자마자 동쪽 편 일주도로로 접어드는데, 낯익은 선생님들이 회를 시켜 소주를 마시다 손짓한다.
* 펄랑호 쪽에서 본 비양도(앞에 길게
보이는 부분이 호수)
△ 깨끗이 잘 정돈된 비양도
마을을 막 벗어나는 곳 비양분교를 지나간다. 9시에 온 일행인 듯 20∼30명이 부산을 떨며 점심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1976년 여름 처음으로 비양도에 왔을 때 이곳 교실에 짐을 푼 뒤 고기를 낚고 작살질을 하여 회(膾)를 뜨고 매운탕을 끓이고, 굽고, 조려서 온통 바닷고기 반찬으로 밥상을 차렸던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은 해안을 한바퀴 돌 수 있도록 시멘트 포장을 하여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학교 뒤쪽에 섬을 지키는 신당(神堂)이 있고, 그 옆으로 한전의 발전소가 있다. 그러니까 물은 해저로 수도관을 묻어 본섬의 것을 먹고, 전기는 발전으로 얻는다. 조금 지나 펄랑호에 이르렀는데 길이 500여m, 폭 50m 정도 되는 초생달 모양의 호수 주위에 길을 둘러 산책과 자연 관찰을 위한 통로를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방사탑을 세우고 정자와 강의소까지 만들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곳은 바다 수면과 높이가 거의 같기 때문에 밀물이면 서서히 물이 들어와 모여서 일년 내내 짠물이 고여 있다. 그래도 오염원이 없어 식생은 유지되는지 백로 같은 새가 자주 날아와 쉬어간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북쪽에 이르렀는데, 배에서 버린 많은 쓰레기가 쌓였던 곳이 지금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다.
* 북쪽 해안가의 애기 업은 돌
북쪽 모퉁이를 돌면 바로 애기업은돌이 나타난다. 아기를 업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이름 붙여진 이 바위는 화산분출이 멈추었을 때, 화구(火口)에 용암이 굳은 것으로 이곳이 북쪽이어서 겨울 하늬바람의 몰아칠 때 화산재가 쌓인 부분이 씻겨 가버리고 비교적 단단한 부분만 남게 된 것이다. 도로 안으로 들어간 침식 부분에는 이곳 해변에 있던 커다란 화산탄과 돌을 모아 전시해 놓았다.
△ 아름다운 바위와 비양방록
그곳을 지나면 바다 위로 불쑥불쑥 솟아오른 바위들이 있어 작은 섬처럼 아름답다. 그 중 조금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는 풀도 돋아 여름철에는 새의 번식처가 된다. 몇 년 전 그곳을 탐사했을 때 바위는 온통 새똥으로 하얗게 변해 있었고, 곳곳에 새둥우리의 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꼭 낙타를 닮은 바위가 있는데, 오늘은 물이 차서 그곳까지 갈 수 없어 아쉽다.
* 북쪽 해안가에 전시해 놓은 화산석들
온통 초록빛을 띄고 있는 오름 위로 하늘이 끝없이 푸르고 간간이
흰구름이 흘러 자꾸 셔터를 누르게 한다. 전에는 한우를 키우고 흑염소를 많이 길렀는데, 지금은 소는 안 보이고 간혹 염소만 소나무 그늘에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름에는 풀이 더욱 무성해 보인다. 지금은 소나무가 가장 큰 나무고 많지만 조선시대에는 거의 풀로
덮였으리라 추측된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는 '비양방록(飛揚放鹿)'이라 하여
이곳에 사슴을 풀어놓는 그림이 있다. 1702년 음력 10월 11일 교래대렵의 행사를 벌여 잡은 사슴을 겨울을 보내고 1703년 4월 28일에
이곳에 방사한 것이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제주목(濟州牧) 서면(西面)의 53개 마을 위치가 한 장의 그림에 상세하게 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의 서문(西門)에서 명월진(明月鎭)에 이르는 지형을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교래대렵(橋來大獵)을 보면 소록산과 대록산 앞 벌판인 지금의 정석비행장에서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사방을 겹겹이 에워싸서 활로 쏘아 잡거나 생포하는 장면이다. 이 날 잡은 짐승은 사슴 177마리, 산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꿩 22마리였다. 이 행사에서 사슴 몇 마리를 풀어놓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곳에 풀어놓아 번식시켰다가 필요할 때 손쉽게 잡아 활용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 비양도에 딸린 가장 큰 바위섬(왼쪽 것이 낙타바위)
▲ 섬 자체가 하나의 오름
서쪽에서 오름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 뒤 이곳
정상인 해발 1백14m의 가재봉에 오른다. 오후 시간이어서 바람이 안 통해 덥고 땀이 많이 난다. 우거진 억새가 이제 막 이삭을 밀어
올리고 있다. 정상까지는 약 20∼30분 정도 걸리는데, 이곳 가장 낮은 능선을 통하여 정상까지 깔아놓은 타이어 발판을 따라가면 쉽게 정상에
이른다.
능선에는 이곳이 과거에 일명 죽도(竹島)라 불리었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나무(이대)가 빽빽이 자라고 있다. 이곳의 주종은 해송인데 간간이 팽나무와 산뽕나무, 천선과나무가 섞였고, 제주특산종
섬오갈피와 제주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된 이곳 특산 비양나무 등 100 여종의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늘은 섬오갈피와
비양나무는 눈에 띄지 않는다.
맨 먼저 정상에 올라 등대 그늘에서 짐을 내려놓는데 전화가 왔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려 했는데, 2호차에 탔던 회원들이 오름으로 오르는 입구를 찾지 못해 지나쳐 해안도로에 진입했다는 소식이다. 다시 돌아오라고 이르고는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뛰어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난번에는 우리 오름 회원 중 내가 아끼는 녀석이 있어 앞장세웠는데, 작년에 설악에 올랐다 저 세상으로 가버려 너무 가슴 아프다.
* 분화구 너머로 보이는 정상(무인 등대가 서있다)
정상으로 다시 2호차 회원들을 모시고 올라와 막걸리를 풀어놓았다. 시원한 바닷바람, 일망무제로 탁 트인 바다, 비록 정상이 구름에 가리웠지만 멀리서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한라산, 싱싱한 배추김치와 신 총각김치…. 모두가 막걸리를 맛나게 하는 요소들이다. 게다가 적당히 배고프고 단숨에 내려갔다 올라 와서 목이 마른 데다, 내가 고생한 것을 보상해주려고 연신 권하는데….
△ 비양도를 돌아 나오며
선주에게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1호차가 갈 시간이 되었으니 3시 40분까지 내려보내면 45분에
출발하겠다는 전화다. 바빠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해서 자료를 만들어주고 오는 도중 차 속에서 중요한 사항은 설명해 놓은 상태이기에, 그늘이
없고 더워서 별로 들으려 하지 않은 어른들에게 더 얘기할 필요를 못 느끼고, 2호차는 가면서 얘기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야
한다.
1호차의 회원들을 재무이사와 기사에게 부탁하여 내려보내고 천천히 2호차 회원을 인솔하고 이번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 시계 방향으로 다시 한번 섬을 돈다. 생각해보니 나만 섬을 두 번 돌고 오름에 두 번 오른 셈이다. 그래도 하나도 싫지 않은 것은 깨끗한 바다와 오름과 나무와 돌 같은 자연이 있어서이다. 석양의 햇빛에 일렁이는 금빛 바다는 우리를 더욱 황홀경으로 몰아 넣었다.
* 서쪽 바닷가 모습
비양도 화산체에는 현무암용암과 화산암재를 분출시킨 것으로 보이는
분화구 2개가 있다. 이들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분화구가 가장 큰 규모이다. 와륜산의 높이는 해발 70m이고 깊이는 35.7m나 된다. 이
분화구에서 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분화구는 와륜산의 높이가 해발 55m이며, 그 깊이는 16.5m이다. 따라서 해발 114.1m인 비양도는
이들 두 분화구로부터 분출된 용암류와 화산쇄설성 퇴적물에 의해 형성된 지형이다.
잘 익어 가는 순비기나무 열매를 따서 향기를 맡고, 분화구 위로 옅은 화산의 연기인 듯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여 부두로 가서 배를 기다려 마지막 남은 막걸리를 마셨다. 10여 년 전 늦은 밤 이곳 방파제 끝 등불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먹었던 한치를 그리며 배에 오른다. 배는 점점 비양도와 멀어져 가고 지는 해에 설레는 금빛 바다가 다시 오라고 술렁인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치른 행사였다. 그래, 지나고 보면 인생이란 것도 이 같은 행사가 아닐는지?
* 섬만 거기에 두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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