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2TV 사극 '장희빈'의 후속으로 흉년의 배고픔으로부터 제주 사람들을 구한 의녀 '김만덕' 편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마침『제주시』지 통권 제45호(2003년 1월 1일 발간)에 실었던 '역사기행 의녀반수 김만덕(金萬德)의 삶'이 있어 4회에 걸쳐 내보냅니다. 김만덕(金萬德)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도 그 자취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소설이나 전기, 전설 등 여기저기 기록은 많이 있었으나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의 '만덕전(萬德傳)'을 인용해 미화시킨 천편일률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장을 찾아 사실적으로 적어 전설적 요소를 배제하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습니다. 질정(叱正)을 바랍니다.◇
(하이홈에 실려 있는 김만덕 이미지)
▲ 구좌읍 동복리(東福里), 그녀가 태어난 곳
오늘날 제주 사람들에게 '김만덕(金萬德)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조선시대 지독한 흉년이 들었을 때 사재를 털어 제주 백성들을 배고픔으로부터 구한 여인'으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제주시 사라봉에 자리한 모충사에 그녀의 선행을 기리는 의인 묘탑과 만덕관, 그리고 탐라문화제 때 시상하는 '만덕봉사상'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기도 했겠지만, 초·중학교 교실 향토학습관의 '내 고장을 빛낸 인물'에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김찬흡(金粲洽) 선생의 <제주사인명사전>에 나오는 그녀의 출생지 구좌읍 동복리(東福里)를 찾은 것은 바람이 몹시 부는 초겨울이었다. 동복리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22km 떨어진 구좌읍의 첫 마을로 속칭 '곳막(邊幕)'이라 불리는 해안부락이다. 이제는 골목길처럼 돼버린 일주도로로 들어서서 휴게소를 지나 마을회관을 찾았다. 노인회관으로 쓰는 1층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사무소로 쓰는 2층으로 올라가 마침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이 마을의 두 어른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기록에 나온 대로 "만덕은 본관이 경주로 구좌읍 동복리에서 1739년(영조15)에 아버지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나이 9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외숙댁에 머물렀으나 10살 때 제주성안 무근성의 퇴기(退妓) 월중선(月中仙)에 맡겨졌다."는 내용을 열거하면서 혹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방문하기 전 '구좌읍 동복리' 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마을 사람들' 난에 유일하게 김만덕이 올라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비교할 바는 못되지만 전라북도 정읍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 가보면, 의기(義妓) 논개(論介)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수몰지역의 생가를 옮겨다 한 장소에 복원해 놓고 주변에 기념관과 비를 세워, 충효열의 산 교육장으로 또 관광지로 활용하는 것을 본 터라, 혹시나 해서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동복리는 4·3때 마을이 전소되다시피 피해를 입었던 곳이어서 다시 복구할 때 원형이 많이 훼손됐을 것을 감안해서 그 터만이라도 확인할 수 없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었는데,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올 수 없어 마을을 돌아보았다. 골목을 들어서는 순간1970년대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바꾼 집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해풍 때문에 팽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예로부터 농토가 빈약하여 대부분 바다에 의존해 살았던 이곳 사람들, 어린 만덕도 이곳 주민들처럼 아침 먹기 전에 해풍에 밀려온 감태나 모자반 같은 거름용 해조(海藻)를 한 짐 져 올렸을까? 지금 제주섬 어느 마을이 풍요롭기야 하랴마는 양파와 마늘, 콩 같은 농산물과 성게, 톳, 우뭇가사리를 지역 특산물로 삼고 있는 이곳은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마을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김만덕의 출생에 관하여는 두 가지 이견(異見)이 있다. 하나는 본관이 김해김씨냐 경주김씨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생지가 제주 성안이냐 구좌읍 동복리냐 하는 것이다. 이는 1971년 김태능(金泰能) 선생이 김만덕 기념사업회의 요청에 의해 제주신문에 12회에 걸쳐 연재했던 <의녀 김만덕전>에 의해 쉽게 그 의문이 풀린다. 물론 김만덕이 돌아갈 당시 세워져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문에는 김해김씨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수로왕 후손과 경순왕후손의 일부는 다같이 본관을 김해김씨로 썼고, 그를 구분하기 위하여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1846년(헌종12)에 국왕의 윤허를 받아 후김은 경주김씨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김만덕의 후손들을 추적한 결과 구좌읍 동복리에서 출생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고 한다.
(사라봉 모충사에 있는 비석들. 제일 뒤 위가 둥근 것이 김만덕 묘탑)
▲ 수양어머니 때문에 본의 아니게 기녀(妓女) 노릇
속칭 '무근성'은 지금 삼도2동의 일부 지역으로 목관아지 서쪽에 위치한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제주시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652-6호인 이형상(李衡祥) 목사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건포배은(巾浦拜恩)'을 보면, 관덕정 서쪽에서 서문에 이르는 부분에 민가가 조금 나타나 있고,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청(官廳)과 목관(牧官), 작청(作廳) 건물 서쪽으로 제법 많은 민가가 나타난다. 바로 이 민가 중 어느 곳에 만덕의 몸을 의탁했던 퇴기 월중선(月中仙)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관에 소속된 기녀들이 쉽게 부름에 응하려면 가까운 곳에 기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탐라순력도> 그림 중 '승보시사(陞補詩士)'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관아지 군기고와 과원(果園) 사이에 기생방(妓生房)이 있으며, '귤림풍악(橘林風樂)'에는 잘 익은 귤밭 가운데서 목사와 관리들이 기녀들과 함께 풍악을 즐기는 광경과 과원 옆에 음악을 익히던 교방(敎坊)이 나와 있다. 오갈 데 없던 만덕은 결국 수양어머니인 퇴기 월중선의 인도로 기녀가 되는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기(官妓)는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을 담당하게 했는데, 의녀(醫女)로 행세하는 약방기생, 상방(尙房)에서 바느질을 담당하는 상방기생도 있었으나, 주로 연회나 행사 때 노래와 춤을 맡기 때문에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루어야 했다.
김만덕의 기녀 생활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녀의 기민 구휼의 자선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녀 생활 부분을 거의 생략하거나 지조를 지키다 조용히 물러나는 식으로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객주집을 차려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필요 이상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재치가 있는 활달한 성품으로 그리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에 와서 증명해 줄 아무 근거도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제주여인으로서 혼자 힘으로 객주집을 차려 성공하고 그 재산을 내어 기민을 규휼한 점과 과감하게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겠다는 생각까지 한 것으로 보아 통이 크고 외향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다.
따라서, 관기에서 제적되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도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조상에 대한 죄스러움과 천한 기생이 되어 가문을 더럽힌 죄를 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탄원해서 결국 기적(妓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식이고, 후자인 경우는 행수기생까지 올라 목사나 판관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물러나게 되면 쓰러지는 친정을 일으키고 돈을 벌어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말로 설득하여 뜻을 이룬다는 식이다. 기적에서 벗어난 후 당시동헌(東軒)에 소속된 제주 출신 통인(通引)이었던 두 딸을 가진 홀아비 고선흠(高善欽)을 만나 부부생활을 했으나 얼마 후 병사해버렸다는 기록도 가끔 보인다.
(사라봉 모충사에 있는 옛 무덤에 세웠던 비석과 석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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