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역사기행] 의녀반수 김만덕의 삶 (3)

김창집 2003. 7. 22. 05:37



(제주에 유배왔던 추사가 감동하여 양자에게 써준 글을 돌에 새긴 것. 은광연세)

 

▲ 정조 임금과의 만남, 그리고 금강산 유람

 

 위의 장계를 접한 임금은 진휼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특별히 하유하기를 "김만덕을 불러 그 소원을 물어보고 난이(難易)를 논하지 말고 시행할 것, 전 현감 고한록은 매번 연재(捐財)하였으므로 해외의 토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으니 가상하다. 대정현감으로 특별히 임명하여 군수의 이력으로 삼게 하라. 홍삼필과 양성범이 1백 석을 원납한 것은 육지의 1,000포에 필적하므로 모두 병조에 명하여 순장(巡將)으로 승진 임명하라." 했다. 새로 부임한 유사모(柳師模) 목사는 만덕을 불러 임금의 유지를 전하고 소원을 물었다. 만덕은 이외로 임금의 알현과 금강산 유람을 원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의 만덕전(萬德傳)을 보면, 그녀의 행적이 드러나 있다. "목사가 그의 소원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그의 소원대로 하라 하시고 역마(驛馬)를 관에서 주고 이어가며 음식을 대접하라 하셨다. 만덕은 배를 타서 만경운해를 건너 병진년(정조20) 가을에 서울에 들어왔다. 임금님께서는 선혜청에 명하여 다달이 식량을 주도록 하고 며칠 있다가 내의원 의녀로 삼아 의녀반수(醫女班首)로 있게 하였다. 만덕은 예에 의하여 내합문으로 들어가 문안을 드리니, 전궁(殿宮) 시녀를 통하여 전교하여 말하기를 '너는 한낱 여자로서 의기(義氣)를 내어 굶주린 천백여 명을 구호하였으니, 거룩한 일이다.' 하시고 상을 심히 후하게 내리었다." 의녀반수는 이 때 내려진 직함인 것이다.

 


 

(탑 뒤에 있는 부조물로 만덕이 정조 임금을 배알하는 장면)

 

 금강산 구경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덕은 서울에서 반년을 살게 하고 정사년(다음 해)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과 명승지를 두루 탐방했고, 금불상을 보면 배례 공양하였다. 이 때 불교는 탐라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만덕이 나이 58세에 처음으로 사찰과 불상을 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안문령(雁門嶺)을 넘고 유점(楡岾)을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 삼일포에서 뱃놀이하고, 다시 통천의 총석정(叢石亭)에 올라 천하의 경관을 두루 구경한 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을 묵고 내원에 들어가 귀향의 뜻을 아뢰자 임금은 전일과 같이 상을 내렸다."

 

 다음은 채제공이 만덕전을 지어주며 이별하는 대목이다. "이 때 김만덕의 이름이 온 장안에 퍼져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만덕의 얼굴을 한번 보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만덕은 출발에 앞서 영의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몸이 다시는 상공의 얼굴을 우러러 볼 수가 없겠습니다.' 하며 울먹였다. 영의정이 타이르기를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한라산을 영주산, 금강산을 봉래산이라고 한다. 너는 탐라에서 자라 백록담의 물을 떠 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편답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수많은 남자들도 다 못하는 일이다. 이제 작별에 임하여 어린애처럼 척척거리니, 그 몸가짐이 마땅하지 못하구나.' 하면서 김만덕의 일을 적어 만덕전이라 이름하고 웃으면서 주었다."

 

 

(금강산 사진, 빌려옴)

 

▲ 이름처럼 빛나는 여인, 만덕(萬德)

 

 조선시대 평범한 여인들은 이름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만덕(萬德)'은 기명(妓名)으로 보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는 덕을 쌓으면서 붙은 이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꼭 필요한 때에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만덕(萬德)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빛나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인들에게는 닫힌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홀몸으로 커다란 사업을 벌여 큰 재산을 일구었을 때, 큰 덕을 쌓을 기회인 1794년(갑인년) 큰 흉년이 들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을 써서 양곡을 구해다가 기민들을 먹여 살린 덕행은 오래도록 제주민의 귀감이 될 것이다.

 

 갑인년 당시 8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한 피해 내용을 9월에 조정에 보고한 기록이 있는데, 도내 78개 마을 중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 폐허된 마을이 38개소, 구호 대상자가 6만2천6백98명에 달하였다. 일시적인 배고픔이야 충분히 견딜 수 있지만 풀뿌리 나무껍질도 벗겨다 먹을 수 없는 암담한 시절, 얼마동안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으니, 당시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하늘같은 존재이리라.1801년(순조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이승훈과 함께 순교한 당시 병조판서 이가환(李家煥)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녀의 공적을 칭송했다.

 

 

(금강초롱)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 (萬德瀛州之妓女)
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六十顔如四十許)
천금을 내어 쌀 사들이고 백성을 구제하여 (千金 米救黔首)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뵈었구려 (一航浮海朝紫 )
다만 원하는 건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 (但願一見金剛山)
산은 동북의 안개와 연기 사이에 있도다 (山在東北煙霧間)
임금께서는 날랜 역마를 내도록 허락하시니 (至尊 肯賜飛驛)
천리에 뻗친 광휘는 관동을 떠들썩하게 했네 (千里光輝動江關)
높이 올라 멀리 굽어보며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는 (登高望遠壯心目)
표연히 손을 저으며 바다굽이로 돌아가려나 (漂然揮手還海曲)
탐라는 저 멀리 고량부 신인 때부터인데 (耽羅遠自高良夫)
여인네가 이제야 나라 임금 뵐 수 있었다네 (女子今始觀上國)
칭찬 소리 우뢰 같으며 고니 노닐 듯 빼어나니 (來如雷暄遊 擧)
높은 기풍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구려 (長留高風濾 宇)
사람이 나서 이름을 세움에 이 같음이 더러 있겠지만(人生立名有如此)
여회청대로 기림은 어찌 족히 몇이나 되리요 (女懷淸臺安足數)

 

 

(강부언 화백이 그린 그림 '어렸을 적 단란했던 가족과 만덕')

 

♬ 사랑의 기쁨 / Nana Mouskou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