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역사기행] 의녀반수 김만덕의 삶 (4)

김창집 2003. 7. 29. 05:18



(손님이 넘쳐나는 객주집 풍경. 강부언 화백 그림)

 

▲ 고으니모르의 만덕 할머니 동산

 

 사라봉 오거리에서 사라봉로로 접어들어 오른쪽으로 갈라진 옛길 이름은 새로 '고으니길'로 명명되었다. 이제는 골목길이 되어버렸지만 속칭 '고으니모르('고'와 '모'는 '아래아' 표기)' 동산 길은 과거 성안에서 동쪽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지금은 입구 오른편에 안전자동차공업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안에 원래 김만덕의 무덤이 있었다. 후한 덕을 지녔던 생전의 모습처럼 잔디가 좋고 넉넉했던 무덤은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동문로터리에서부터 오르막길을 오르다 거의 절정에 달한 곳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그곳에 이를 즈음이면 모두가 지쳤다. 그녀의 유언대로 당시 성안이 한눈에 들어왔던 곳이다.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곳이 골목길로 변하고 자동차 정비공장이 들어서 주변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걱정하는 뜻 있는 인사들이 이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의사 정태무(鄭太茂)가 주동이 되어 '김만덕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이장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다 1976년 도민의 이름으로 총력안보 제주도협의회가 사라봉공원에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면서 그곳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금 옛무덤 자리엔 객주집을 했던 분의 묻혔던 곳이어서 그런진 몰라도 이와 관련된 안전자동차공업사를 비롯해서 대양해운주식회사, 제일통상, 남국상사 등이 들어서 있다.

 


(고으니모르에 있었던 옛무덤의 석물들. 비석, 동자석, 망주석)

 

 한양에서 돌아온 만덕은 객주집을 그대로 운영하며 남은 여생을 자선사업에 주력하였으므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고, 그냥 '만덕할머니'로 통했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부친 응열(應悅) 공에게는 가의대부(嘉義大夫)를, 구휼 사업을 도운 오빠 만석(萬碩)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追贈)했다. 그녀의 사업을 도왔던 조카 성집(聲集)이 일찍 병사했기 때문에 만년에는 성집의 아들 시채(時采)에게 사업을 맡겼다 한다. 만덕이 1812년(순조12) 10월 22일, 74세로 숨을 거두자 이곳에 묻었고, 시채의 아들 3형제 중 막내인 종주(鍾周)가 제사를 받들었다. 당시 판관이었던 이국표(李國標)는 그녀의 행적이 두고두고 만인의 귀감이 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비문을 지었다.

 

 "김만덕의 본은 김해김씨요 곧 탐라 양가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난과 고생으로 살았다. 그러나 살결이 곱고 아름다워 교방(敎坊)에 의탁하게 되었으나 의복을 줄이고 먹을 것을 아껴서 재산이 대단히 커졌다. 정조 을묘년에는 제주도민이 크게 굶주렸는데 온 재산을 내어 곡식을 육지에서 운반해다가 심히 많은 백성의 목숨을 살렸다. (중략) 70이 된 용모이건만 선녀나 보살을 방불케 하고 쌍꺼풀진 눈은 맑았다. 다만 천도가 무심하여 아이가 없는 것이 애석하다. 그러나, 양손 시채(時采)가 동기간에서 출계하여 유지를 잘 지키고 영구히 향화하니 섭섭지 않게 보답이 된다.(하략)"

 


 

(모충사에 있는 만덕관의 모습, 영정과 그림이 전시됨)

 

▲ 모충사와 만덕관, 영원히 빛나는 이름

 

 사라봉 공원에는 남쪽 양지 바른 곳에 모충사가 자리해 있다. 여러 인사들의 기념식수로 잘 정돈된 경내로 들어서면, 가운데 의병항쟁 기념탑과 왼쪽에 순국지사 조봉호의 기념탑이 솟아있고, 오른쪽으로는 의녀반수 김만덕 의인탑이 세워져 있다. 만덕관(萬德館) 앞에서 향나무 늘어선 11계단을 오르면 20여 평의 묘역 5층 기단 위에 2m 높이의 세모난 납골실이 있고, 그 위로세 기둥이 이어져 도합 20m의 장중한 탑이 솟았다. 납골 묘와 탑과 비가 어우러진 독특한 구조물이다. 이 세 기둥은 모가 없이 원만하게 당초무늬로 연결, 위로 둥글게 마감되어 생전의 원만한 성품을 나타낸다.

 

 납골실 3면은 송사(頌詞)와 행장(行狀)이 조각되어 있고, 정면에는 상석과 양쪽으로 큰 향로가 놓여 있는 구조다. 뒤에는 병풍처럼 높이 3.5m, 길이9.3m의 반원형 곡장(曲墻)을 둘렀는데, 양쪽에 양각된 두 개의 그림이 눈에 다가온다. 하나는 만덕이 구호곡을 배로 실어다 목사에게 드리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대궐에 가서 임금을 배알하는 장면이 금강산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이 묘탑은 문정화(文貞化)가 설계했고, 비문 '의녀반수(醫女班首) 김만덕(金萬德) 의인묘(義人墓)' 글씨는 서예가 김순겸(金順謙)이 썼다.

 

 만덕관 옆에는 옛 무덤에서 가져온 석물들이 모여 있다. 아직도 비문이 뚜렷한 묘비와 그 앞에 동자석 크기의 문인석(文人石) 한 쌍, 또 그 앞에 망주석(望柱石) 한 쌍, 그밖에 산담으로 추정되는 돌이 몇 덩이 놓여 있다. 만덕관 쪽으로는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을 새긴 자연석을 세워 놓았는데, 이는 1840년(현종6) 대정에 유배되었던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가 만덕의 행적을 듣고 감동하여 양손 종주(鍾周)에게 써준 표제 글을 양경호(梁庚浩) 여사가 새겨 기증한 것으로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번진다.'는 뜻이다.

 


 

('의녀반수 김만덕의 묘'. 탑 아래쪽 부분이 무덤)

 

 만덕할머니의 재산 형성 과정과 수많은 자선을 상징하듯 자갈돌이 빽빽하게 박힌 만덕관으로 들어가자, 곱게 그려진 만덕할머니의 초상이 반겨 맞는다. 언제 그렸는지 모르지만 홍상문(洪祥文)씨의 작품이다. 벽에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만덕의 일생을 그린 커다란 동양화 10장면이 이어져 있다. 제주시가 공모하여 강부언(姜富彦) 화백이 그린 이 그림을 보면 만덕의 일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 장면 단란하던 만덕의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상(喪)을 당한 장면, 기녀의 집 풍경, 거문고를 타는 모습, 기적(妓籍)을 벗고자 탄원하는 장면, 다음은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객주집의 모습과 기아에 허덕이는 도민들, 쌀을 나눠주는 세 장면이 이어지고, 임금님을 알현하는 장면과마지막으로 금강산 유람 모습을 담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1980년부터 해마다 만덕할머니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탐라문화제 행사 때 근검절약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제주사회를 위해 헌신 봉사한 여인을 한 사람 선정하여 만덕제를 봉행하면서 만덕봉사상을 시상하고 있는데, 23회째를 맞는 지금까지의 수상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수선, 고혜영, 이창옥, 조금숙, 이옥이, 김서옥, 성귀랑, 고춘옥, 김경생, 오태인, 김순이,김진현, 홍정형, 박희순, 문초실, 장옥순, 고경자, 메리 스타운톤 수녀, 진춘자,양화순, 김태화, 김순자, 고길향.

 

<참고 문헌>


왕조실록(王朝實錄)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1880) : 유재건(劉在建)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
탐라기년(耽羅紀年 1910) : 김석익(金錫翼)
제주도사논고(濟州島史論考 1971) : 김태능(金泰能)
명기열전(名妓列傳 1977) : 정비석(鄭飛石)
구좌읍지(舊左邑誌 1987) : 부영성(夫英性)
구원의 여인상 김만덕(1989) : 김봉옥(金奉玉) 편
제주도제주여인상(濟州女人像 1998) : 제주문화원
제주사 인명사전(濟州史人名事典 2002) : 김찬흡(金粲洽)

 


 

(김만덕의 초상. 홍상문 화백 그림. 액자 유리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