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마라도에 부는 바람

김창집 2005. 11. 20. 23:28

 

* 마라도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 2005년 11월 19일 토요일 맑음

 

 아침 10시. 오늘 마라도 배편은 예약된 사람만 1차에 걸쳐 다녀올 수 있다고, 오후에 폭풍주의보가 내릴 예정이니 나머지 분들은 다음에 가라는 매표실 직원의 전언(傳言)에 '이거 못 가는 거 아닌가?' 하고 의기소침해 있는데, 우리 기사가 '내가 누굽니까? 우리까지는 통과 되었습니다.'라면서 표를 구해왔다. 이미 출항 시간이 다 되어 있어 재빨리 배를 타고 2층 갑판으로 올라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람이 세차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으려면 추위쯤은 물리쳐야 한다고 다짐하며 끝까지 갑판 위에서 멀어져 가는 한라산이며 산방산, 형제섬, 송악산을 담고 나자 얼마 안 되어 가파도가 다가온다. 가파도는 높은 곳도 없고 나무도 없는 섬이어서 공중 사진이면 몰라도 멀리 지나가는 배에서 찍으면 별로 좋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의무방어전을 치르는 심정으로 두어 커트를 찍고 나자 이번엔 마라도다.   

 

 

* 마라도 포구에 내려 멀리 한라산을 보며

 

▲ 우리나라의 최남단을 지키는 마라도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大靜邑) 마라리를 이루는 섬인 마라도(馬羅島)는 면적 0.3㎢에 해안선 길이 4.2㎞, 최고점 39m, 인구는 90명(2000년 통계)이 살고 있다. 한국 최남단의 섬으로 대정읍 모슬포 항에서 남쪽으로 12km 해상에 위치한다. 원래는 가파리(加波里)에 속했었으나 1981년 4월 1일 마라리로 분리되었다. 

 

 형태는 고구마 모양이며, 해안은 오랜 해풍의 영향으로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원래는 산림이 울창하였다고 한다. 1883년 영세농어민 4∼5세대가 당시 제주 목사로부터 개간 허가를 얻어 화전을 시작하였는데, 이주민 중 한 명이 달밤에 퉁소를 불다가 뱀들이 몰려들자 불을 질러 숲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 아기업게당(堂)에서 수없이 절을 하는 딸을 수험생으로 둔 아버지

 

▲ 파도에 시달려 사방이 깎인 섬

 

 섬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파도가 거세져 몇 차례 심하게 요동을 친다. 나야 이럴 때 너무 신나지만 주위에 안색이 창백해진 손님도 더러 보인다. 배가 섬에 닿으면서 태풍에 시달려 단애(斷崖)를 이룬 동쪽 절벽 밑으로 해식동굴(海蝕洞窟)이 우리를 맞는다. 정확히 40분만에 도착한 유람선이 앞머리를 부두에 붙이자마자 서둘러 내렸다. 작년에 왔다간 뒤로 올해는 처음이다.    

 

 이 섬의 주민들은 전복, 소라, 톳, 미역 등을 채취하고 관광객을 위한 민박을 열어 소득을 올린다. 용천수가 나지 않아 집집마다 비가 오면 빗물을 모았다가 여과시켜 가정용수로 사용하며, 태양광을 이용한 발전소에서 전력을 공급받는다. 남쪽에는 한국에서 최남단 지역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고, 섬의 가장 높은 곳에는 1915년 설치된 마라도 등대가 자리잡고 있다. 송악산 선착장에서 유람선이 하루 4회, 모슬포항에서 하루 1∼2회 배가 운항된다.

 

 

* 마라도의 정자와 그 위로 흐르는 구름

 

▲ 아기업게당에서 열심히 절하던 아저씨

 

 한 시간 뒤인 11시 40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오늘 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일행을 이끌고 서둘러 이 섬을 지키는 신당(神堂)인 아기업게당으로 갔다. 먼저 달려와 신당 안에서 열심히 절하는 아저씨가 있어 웃어 보이자 옆에 있던 일행 한 분이 딸이 이번에 수능시험을 보아서 그렇다 한다. 아무리 그래도 저 아기업게 영혼이 아저씨의 소원을 들어줄지 의문이지만 딸을 향한 부정(父情)이 아름답다.   

 

 지금부터 약 100여 년 전에 이 섬은 금(禁)섬이라 불리었다. 누구든지 이곳에 다녀가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입도(入島)를 금하자, 사람들은 몰래 이 섬에 와서 해산물을 도채(盜採)하였다. 그런데 대정읍 상모리에 거주하는 이씨라는 사람 부부가 아기업게 처녀까지 데리고 이곳에 들어와 일을 마치고 가려던 전날 밤 현몽(現夢)하기를 데리고 온 처녀를 두고 가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으나 인정상 차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함께 가려하니, 쾌청했던 날씨가 갑자기 안개와 폭풍이 일어 하는 수 없이 그 처녀를 떼어놓고 이곳을 떠나 배는 무사했으나 그 처녀는 애절하게 주인을 부르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

 

 3년이 지난 후 그들 부부가 다시 와 보니 그 처녀는 울다 지쳐 앉은 채로 죽어 죽은 시신을 거두고, 그 애절한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당(堂)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며 마을과 가족의 안정을 빌고 있다. 지금도 1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마라도에 있는 쵸코렛 박물관

 

▲ 대한민국 최남단비에서 기념 촬영

 

 신당을 떠나 '이창명의 자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글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마라분교 앞으로 다가섰다. 여러 도시의 방향과 거리를 나타낸 이정표 옆 바위에 새겨놓은 내용을 보니, 이 학교 학생 3학년 4학년이 각 1명, 5학년 2명 도합 4명이 다니는 미니 분교다. 안에는 겨울인데도 유카 꽃이 싱그럽게 피어 있다. 잔디밭에는 철 늦은 쑥부쟁이가 조그맣게 한 송이씩 보인다.   

 

 바람을 피해 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를 바라보며 최남단 비가 있는 남쪽 해안으로 갔다. 대한민국의 최남단의 위치를 알리기 위하여 1985년 10월 2일 남제주군에서 커다란 바위를 세운 뒤 동경 126°16´30˝ 북위 33°06´30˝위치 '대한민국 최남단'이라고 새긴 오석을 박아 넣었다. 근래에 는 국토의 최남단에 서보기 위하여 마라도를 찾아드는 관광객이 하루에도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최남단비와 장군바위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따뜻한 붕어빵 하나씩 먹은 후 자리를 떴다.

 

 

* 장군바위와 그 앞에서 조업 중인 어선들

 

▲ 장군바위의 전설

 

 하늘에 살고 있는 천신(天神)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길목이라 전해지는 장군 바위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 쪽을 향하여 신사참배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군바위 가까운 곳에는 신사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민족 정기를 살리기 위해 부숴 버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라섬의 등대를 일본인들이 세운 것과 연관 지워 보면 그 신사비의 의미가 가볍지만은 않다.

 

 마라도 사람들은 이 장군 바위가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어왔으며, 그래서 이 곳에서 해신제를 지내곤 했다. 그런 만큼 이 바위에 올라가는 것은 금물, 혹시라도 장군바위에 올라가면 바다가 노한다고 믿어왔다. 전해지는 바로는 바위중간까지 올라가면 중놀(바닷물이 크게 너울거리는 현상)이 불고, 더 높이 올라가면 대놀(집채만한 파도가 치는 현상)이 분다하여 이 곳에 올라가는 것을 금기시 했다.
 

 

* 언덕 위에 초가집 모양으로 지어놓은 별장

 

▲ 마라도 천연보호 구역

 

 마라도는 천연기념물 제42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기반암이 현무암질 암석이며 절리가 잘 발달되어 있고, 해중에서 독립 분화한 섬이라고 생각되나 분화구는 볼 수 없다. 등고선은 섬 모양과 같이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타원형을 하며 동쪽등대 부근이 34m로 가장 높으나 전체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섬의 돌출부를 제외한 전 해안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서해안과 동해안 및 남해안은 고도 20m의 단애를 이루고, 그 곳에 무수한 해식동굴이 발견된다. 

 

 파식대는 해식단애가 비교적 완만한 북동해안과 남서해안에 주로 발달하고 특히 남서해안에는 3단의 파식대가 관찰된다. 이곳의 육상식물은 원식생이 모두 파괴되어 경작지나 초지로 변했으며, 섬의 중앙부에 해송 조림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해산 동식물은 매우 풍부하여, 해조류의 경우 난대성 해조류가 많이 출현하는 조간대와 조하대 식생이 잘 보존되어 제주도 본 도나 육지의 연안과는 매우 다른 이질적인 식생을 나타내고 있다.

 

 

* 대한민국 최남단비

 

▲ 마라도 마을의 역사

 

 관에서 출입을 통제하던 금섬 마라도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겠다고 들어간 것은 1883년부터라고 전해진다. 대정골에 살던 김성오라는 사람이 도박으로 가산을 다 탕진하고 생활능력을 잃어버리자 친척들이 모여 의논을 한 후, 고을원님에게 마라도의 개경을 건의했다. 이듬해 제주목사 심현택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모슬포에 살던 라씨, 김씨, 이씨 등과 함께 건너와 섬을 개간하고 살기 시작했다.

 

 몇 십 년 전에 왔을 때는 땔감으로 쓰기 위해 소의 똥을 고무신 크기로 길쭉하게 만들어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농사를 짓는 사람도 없고 소도 하나도 안 보이는 대신 곳곳에 민박집과 횟집이 지어지고 방갈로 같은 별장과 초콜릿 박물관과 판매장까지 들어섰다. 올 때마다 특이하게 지은 독특한 모양의 건물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사람이 있는 것은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심어놓은 소나무는 더러 해수를 받아 말라버렸다.    

 

 

* 최남단비와 등대 사이에 지어놓은 방갈로

 

▲ 마라도 등대 앞에 등대 모형이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안 보였는데 이번에 와보니 등대 앞에 바다의 날을 기념하여 세운 세계 여러 나라의 등대 모형이 전시되었다. 그 중에 희망봉의 등대가 정말 의미 있겠다 싶어 사진을 찍어 두었다. 마라도 등대는 1915년 3월에 아세찌링 가스를 이용한 무인 등대로 처음 점등한 후 1955년 5월 유인등대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바다의 왕궁처럼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10초 주기로 약 1만 5천 촉광의 강한 빛줄기가 사방으로 비추며 돌아가는데, 이 빛은 약 21마일까지 도달한다. 안개가 길 때면 공기를 모아 에어폰으로 무적을 울려 항해하는 선박들의 안전 항해를 할 수 있도록 시설되어 있다. 눈을 들어 동쪽을 바라보니, 한라산이 멀리 서 내려다보고 있다. 천성 이 섬도 한라산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 했더니, 옆에서 섬이 아니라 얼핏 땅이 연결된 것 같아 보인다고 따라 웃는다.

 

 

*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라도 등대

 

▲ 한 시간 동안 머물렀던 마라도

 

 의지가 없어 그런지 바닷바람이 너무 차다. 아무래도 이곳은 여름에 오는 것이 좋겠다. 하필 오늘 같은 날씨를 골라 나이 많은 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들이 와서 어머니가 추울까 노심초사하는 걸 보면서 뭔가 마음 속으로 찡 하는 것을 느꼈다. 내릴 때 맨 앞에 작은 아들인 듯 싶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휠체어를 갖고 내려 대기했다가 제법 몸집이 크고 허리가 구부러진 어머니를 부축하고 내린 60대의 아들과 함께 번갈아 밀고 다니고 있다. 길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꽤 힘들어 보인다.   

 

 모두들 허겁지겁 배를 향해 선착장으로 가는 걸 보면 시간이 꽤 흘렀구나 싶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10분 정도 남았다. 일행 중 카메라를 맡긴 줄 모르고 찾으러 간 사람을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으로 배에 올랐다. 이번에는 따뜻한 곳에 앉아 가려고 자리를 찾아 뒤칸에 앉아 있는데, 아까 그 할머니가 몹시 굽은 허리를 하고 활개를 치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안타까운 마음이 가셨다. 비록 1시간이지만 추운 날씨에 이래저래 따뜻한 정(情)을 확인한 여행이었다.     

 

 

* 최남단비 앞으로 늦게 피어난 갯쑥부쟁이

 

♬ 미리 듣는 겨울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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