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제주 민속 신앙 유적을 찾아

김창집 2005. 12. 19. 23:57

-- 탐라문화보존회 신앙 유적 답사기(2005. 12. 18.)

 

 

* 겨울 날씨 치고는 꽤 맑은 하루였다.

 

▲ 무속(巫俗), 당시의 우주관으로 이해해야

 

 어제 저녁 추워서 땅이 얼고 눈발이 휘날리고 보니, 내일 답사가 예정대로 진행되느냐는 전화가 빗발쳤다. 무조건 강행(强行)이라고 대답하고 나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아침에 집결지인 제주시청으로 가면서 언 땅 때문에 몇 번이나 나동그라질 뻔했다. 그러나, 중심을 잘 잡으면서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그런 대로 날씨는 좋은 것 같은 예감이다. 주제가 신당이어서 그런지 연말이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32명만 참가해서 조촐하나마 같은 차안에서 얘기를 나누며 다니는 재미있는 여행이 되었다.    

 

 차가 출발할 때는 미끄러웠지만 햇빛이 비치면서 좋은 날이 될 징조를 보인다. 먼저 기사 님에게 천천히 가도록 부탁하고 나서, 참가자들에게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널 때 차 조심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70대에서부터 20대까지 연령층이 골고루 분포돼 있다보니 노인네 한 분이라도 다치기라도 한다면 답사 진행에 큰 차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 기도하듯 하늘을 우러르는 바닷가 서문 하르방당의 신목 예덕나무

 

 금년 3월부터 12월까지 한 달에 한 번씩의 답사는 모처럼 주제별로 나누어 진행해 이번이 마지막 8번째로 민속 신앙 유적 답사를 가고 있는 것이다. 제주에서의 신당(神堂)은 과거 조상들이 마을을 이룩할 때 모두 모여 만드는 곳인데,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신앙의 터전이자 환자 치료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이제 와서 들여다보면 미신적(迷信的)인 요소가 많지만 당시의 우주관(宇宙觀)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여러 가지 지혜와 철학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곳에 갈 때는 되도록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임해야 하며 당시의 우주관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중요한 일을 할 때, 돼지 머리를 올려 고사를 지낸다든가, 제사를 지낼 때 문전을 모신다든가,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고 돌아와서 고인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기 위한 귀양풀이 굿을 하는 등,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시대에도 무속은 존재하지 않는가?  

 

 

* 조금밖에 손질을 않고 만든 오석불의 하나

 

▲ 신당(神堂)이란 무엇인가

 

 신당은 신이 머무는 곳이며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신과 관련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安寧)을 축수(祝手)하고 가정의 복락(福樂)을 기원하며 자식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가는 장소다. 이러한 신당의 형태는 그 위치와 관련이 깊다. 신당의 지명들은 당의 위치한 지형과 지세에 따라 붙여진 것이며 당신(堂神)들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부정한 신은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이 당을 비밀한 장소에 감추어두고 몰래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고, 농경신이나 본향당신처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니는 당은 개방적인 장소에 존재한다.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죄목 때문에 부부신이 별거하여 하늬바람이 부는 쪽과 마파람이 부는 쪽으로 떨어져 좌정(坐定)하여 웃당과 알당 또는 동당과 서당으로 하르방당과 할망당이 나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또 신당은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지형적 조건에 따라 해변(海邊) 존재형, 천변(川邊) 존재형, 답간(畓間) 존재형, 수림(樹林) 내재형, 동산형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 자연석에 손을 얼마 안댄 오석불의 모습

 

 신당은 신의 집으로 인간이 꾸민 제의(祭儀)의 장소다. 신당은 신이 깃드는 곳에서 신이 머무는 곳으로 그 다음에는 신을 모시고 제물을 차려 굿을 하는 장소로 변모해 왔다. 그러므로 신당의 최초의 형태는 나무나 바위, 또는 굴이었고 여럿이 모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곳이었으며, 나중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제단을 만들어 당집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당의 구조는 신의 신체(神體)를 중심으로 신목형(神木型), 신혈형(神穴型), 신석형(神石型), 석원형(石垣型), 당우형(堂宇型), 복합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외에도 당나무에 걸려 있는 것으로 지전물색형(紙錢物色型), 명실형(命絲型)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색은 신에게 바치는 폐백(幣帛)으로 고운 옷감을 뜻하며, 명실은 명을 이어주는 것이므로 물색이나 명실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여신의 성격과 기능을 알 수 있다. 제주시 지역의 신당은 신의 성격에 따라 천신계(天神系), 산신계(山神系), 농경신계(農耕神系), 치병신계(治病神系), 산육신계(産育神系), 해신계(海神系)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부분의 당에는 부부신을 중심으로 모든 신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형태이다. ('신당 기행 자료집'에서)

 

 

* 많이 줄어든 와흘 본향당의 물색

 

▲ 동회천 화천사 오석불

 

 차를 타고 봉개를 지날 때까지는 눈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 했는데, 16번 중산간 도로로 접어들자 눈이 다져져서 미끄럽다. 동회천에 거의 도달할 무렵 해서 한 승용차가 빙글 돌아 길 복판에 가로 걸어진 채로 체인을 채우고 있다. 조금 넓은 곳을 찾아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는데 미끄럽기 짝이 없다. 다행히 골목길은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미끄러지지 않고 신나게 걸을 수 있었다.

 

 마침 햇빛이 비치고 날씨가 맑아져서 회원들은 신이 났다. 우리가 답사만 떠나면 흐리던 날씨도 맑아진다고 방에서 누워 TV 채널이나 돌리고 있을 친구들을 나무란다. 정말 날짜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며 멀리 뜬구름을 카메라로 잡아 본다. 옛날 수량이 풍부했을 회천 샘을 지나고 새로 포장한 절 옆길을 통해 신당으로 들어선다.


 

 

* 오석불의 하나

 

 이곳 화천사 경내에는 다섯 개의 석불과 그 신들을 보좌하는 산신과 요왕(龍王) 등의 자연 석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이곳에 와서 이 석불에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 때문에 오석불은 더 유명해졌다. 석불 때문에 절이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 동쪽 길가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을 근거로 이 마을이 설촌되었다고 하며 마을 이름인 회천(回泉)이 유래된 것이다. 나무가 우거져 있어 경관도 수려하다.

 

 오석불(五石佛)은 상반신만 좌상(坐像)처럼 만든 신상(神像)들이며 크기는 85㎝ 정도이고 좌우에 있는 산신상과 요왕상은 그보다 좀 작다. 이곳 동회천에서는 마을제를 지내는 대신 이곳에서 석불제를 지낸다.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제를 지내는데 제관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다. 제물로 돼지를 쓰지 않으며 불교적 색채가 짙다. 석불제를 지내면 무병(無病), 포태(胞胎), 득남(得男)의 효험이 있다고 하며 호열자가 창궐할 때도 이 마을은 무사했다고 한다. 특히, 석불제를 지낼 때는 이 석상에다 송낙(고깔)을 씌우고 종이 옷을 해 입히고 실로 허리를 맨다.

 

 

* 신목은 없고 제청만 덩그라니 지어진 송당 본향당

 

▲ 물색이 줄어든 와흘 본향당

 

 화천사 오석불이 있는 곳에서 나와 차를 타고 동쪽으로 진행하여 한 5분 거리에 와흘 본향당이 있다. 얼마 전에는 없었는데 입구와 후문에 나무로 엮어 살채기(나무로 만든 문)를 달아 놓았고, 들어가 보니 그 많던 물색이 다 어디로 사라졌다. 과거에 나무가 울창하던 시절에는 꽤 아늑하고 신성(神聖)스러웠는데, 잡목과 팽나무에 붙은 송악을 제거하고 보니, 너무 허전해 보인다.

 

 와흘리 본향당은 '논흘 한거리 하로산당'이라고도 하는데, '논흘'은 와흘의 본 이름이다. '하로산당'은 '한라산신을 모신 당'이란 뜻이다. 신목으로 400여 년 묵은 팽나무가 두 그루 우거져 있어 엄숙해 보이는 성소(聖所)다. 근래 들어 마을사람들이 당 주변을 단장하고 성역화해 놓았다. 남쪽으로 반원형의 제단이 마련돼 있는데, 당 본풀이에 의하면 이 당에 좌정한 신은 송당 본향당의 열 번째(혹은 열한 번째로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제십일도령 본향 신위'로 새겨 놓았다.) 아들인 백주도령을 모시며 동쪽에 조그맣게 그의 부인인 서울 서정승 따님애기를 모신다. 

 

 매년 정월 14일에는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신과세제가 열리며, 7월 14일에 목축신을 제사지내는 백중 마불림제가 열린다. 유교식 마을제는 따로 지내지 않고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참석한다. 올해 송당 본향당, 새미 하로산당, 수산 본향당, 월평 다라쿳당과 함께 역사, 본풀이와 의례, 형태, 신앙측면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해 제주도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 제주 동북쪽 마을 신당의 원조격인 송당 본향당 입구 표지석(뒤에 송당오름이 보인다.)

 

▲ 신목(神木)이 없는 송당 본향당

 

 송당으로 가는 길 응달진 곳에는 눈이 있어 매우 미끄러웠다. 그래서 덕천으로 돌아가는데 비자림 입구에까지 가서 돌아오려니까 너무 멀다. 송당마을을 거쳐 올라가다 왼쪽 마지막에 이르러  집 옆에 표지석을 세우고 송당 본향당 입구라 새겨 놓았다. 앞장서 성큼성큼 들어가려니 눈이 많이 쌓여 있고 노루 발자국이 어지럽다. 모처럼 눈 구경을 하며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자는 회원도 있다.    

 

 이곳 본향당의 당신(堂神)인 김백조(金白祖)(맑은 조상할망, 백주또)와 남편 소천국 사이에 아들 딸 18형제를 두었다. 웃송당에는 김백조가 당신으로 본향당의 수호신이 되었고, 셋송당에는 세명주(공주)가 당악(당오름) 당신이 되었고, 알송당에는 소천국이 당신이 되었으며, 남은 자녀들도 각각 다른 곳으로 흩어져 당신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 동북부 지역 신당들의 원조라 할 만하다.  


 

 

* 작년 신화축제 때 세운 백주또와 소천국의 석상

 

 이 맑은 할망당에 참배하려면 3일 전부터 육식을 금하고 목욕재계하여 미리부터 정성을 다해야 한다. 경신년 호열자가 유행할 적에도 웃송당에는 별로 피해가 없었다고 하며 4·3 때도 송당리(松堂里)는 중산간 부락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는 것은 맑은 조상할망 덕분이라고 노인층에서는 말하고 있다. 

 

 1월 13일에는 신과세제, 2월 13일에는 영등제, 7월 13일 마불림제, 10월 13일에 시만국대제(모두 음력) 등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당굿을 하는데, 이제 송당 본향당은 제주 당문화의 원조로 제주 기층문화의 상징인 제주 대표 신당이 되었다. 이 신당(神堂) 본풀이의 중요성을 인정,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하였다. 나와서 조금 남쪽에 있는 석신상을 보러 갔다. 이것은 작년 신화축제 때 세운 부인인 백주또와 남편인 소천국의 석상이다. 소를 잡아먹고 쫓겨난 남편과 부인 사이에는 냉랭한 기류가 흐른다. 

 

 

* 바닷가에서 건져 올린 돌미륵

 

▲ 바닷가에 있는 김녕 서문하르방당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고 있어 신제주시 가서 식사를 한 다음 도두로 화북까지 역(逆)으로 진행해야 했다. 미끄러운 중산간에서 탈출하여 해변으로 가는데 얼마 안가 언제 눈이 왔냐는 듯 눈 한 점이 안 남았다. 물이 없어 그런지 송당에서 해변까지는 집이 없다. 행원까지 내려가 김녕사굴 입구를 지난 뒤 옛 12번 일주도로로 가다보면 다시 새길과 합쳐지는 지점 오른쪽 바닷가에 서문하르방당이 있다. 전설 또한 신비롭다.       

 

 서문하르방은 어느 날 고기 낚으러 바다에 갔다. 백 발의 줄을 던지고 묵직한 것이 걸려 올려보니 커다란 돌멩이였다. 투덜대며 던져 버리고 나서 다시 한 참 동안 저어가서 줄을 던졌다가 올려보니 또 그 돌멩이였다. 셋째 번에도 여전히 같은 돌이 걸렸다. 자신과 인연이 있는 조상이라고 여긴 그는 그 돌을 모시고 왔다. 그 날 밤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나는 미륵이다. 제주에 있는 어느 절에 모실 미륵불인데, 파선이 되어 건너가지 못하겠구나. 나를 잘 모시면 부귀영화를 시켜주겠다."고 하였다. 어부가 그 돌을 이곳에 모셨더니 큰 부자가 되었다. 


 

 

* 신당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신목 예덕나무

 

 이후 아기를 못 낳는 사람이 이곳에 찾아와 빌면, 사내아이를 낳게 하는 효험이 있다 한다. 딱이 무엇을 닮았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의 작은 바위는 예덕나무를 배경으로 가운데 모셔져 있다. 남당하르방당이라고도 하며 서김녕리 서쪽 속칭 '영등물고개' 바닷가에 있다. 미륵돌을 가운데 모시어 신체로 삼고 그 앞에 잘 다듬은 자연석을 포개어 놓아 제단으로 삼았다. 

 

 잘 다듬은 자연석으로 일차 울타리를 쌓았고, 다시 바닷가 쪽으로 한 줄로 견고하게 더 둘러쌓았다. 안쪽 울타리의 높이는 60cm 가량 되고, 바깥쪽 울타리는 높이가 2m에 이른다. '서문하르방, 은지미륵' 2위를 모시는 당이다. 제일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택일해서 다닌다. 일곱자 걸렛배, 지전, 명실 등을 바친다. 기자(祈子)를 하거나 득남을 기원하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다. 매인심방은 따로 없다. 김녕리 주민 일부가 다닌다.

 

 

* 도두오름 허릿당의 지전물색 모습

 

8. 도두오름 허릿당과 도두 포제단

 

 신제주에서 수육 모듬과 설렁탕으로 점심과 조촐한 송년 파티를 마친 후 도두봉으로 향했다. 도두 본향당인 오름허릿당은 이름 그대로 도두오름 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수운교 쪽으로 오름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왼쪽에 보인다. 제일은 초사흘, 초이레, 대보름날이며 보리 수확을 끝내고 또 가을걷이 후에도 치성을 드린다. 당에 갈 때는 메 2그릇과 요왕메 1그릇을 가지고 가며 삶은 계란, 과일, 생선 등이 제수인데 특히 남신 몫으로는 닭고기를 여신 몫으로는 돼지고기를 올린다. 동쪽으로 20m쯤 떨어진 곳에 마을 포제를 올리는 제단이 있으며, 북쪽으로 면해 있는 동굴에는 사적인 이유로 여러 가지 굿이 행해지는 이곳 도두봉은 신들이 내려와 사는 성소(聖所)이다.

 

 오름허릿당의 당신은 생산·물고·호적을 담당하는 서편또 김씨 하르방과 동편또 오름허리 일뤠중저 송씨 할망이고, 서편또 아래는 가는 선 오는 선과 잠녀(해녀)를 관장하는 해신(海神) 요왕또이다. 오름허릿당은 제주시 서부 지역의 뿌리가 되는 당으로 가지가지 송이송이 뻗어 이호와 도두를 비롯한 여러 마을 당신으로 자리잡았다.


 

 

* 신당에서 대표로 예를 올리는 답사 회원들

 

 오름허릿당을 나와 도두봉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포제단이 있어 당은 무속(巫俗)을, 포제단은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좋은 비교가 된다. 도두1동의 유교식 마을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옛날에는 제일 전 7일간 정성을 드렸으나 지금은 3일 정성을 드린다. 마을회관을 제청(祭廳)으로 쓰며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린다. 이 마을만의 특징을 들라면 제일(祭日)인데, 음력 정월이 아닌 6월 첫 정(丁)일이나 해(亥)일을 택하는 것이다.

 

 포제 준비와 행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마을 회의를 열어 포제(酉+甫祭)를 지내는 데 필요한 제반 사항을 의논한다. 날짜를 정하고, 제관을 선출하며, 제사 비용을 마련할 방법도 의논한다. 제일은 보통 음력 정월 상정일(上丁日)이다. 마을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중정일(中丁日)이나 해일(亥日)로 연기한다. 포제 비용은 마을 공동 기금과 희사금으로 충당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가호마다 일정량의 곡식을 거두었으며, 뒤에는 일정량의 현금을 거두기도 하였다. 요즘에도 가호별로 현금을 거두어 쓰는 마을이 있다. 제관은 대체로 12명으로 구성한다. 3헌관은 연령, 덕망 등을 고려하여 선출하며, 전사관은 보통 마을 이장이 맡는다.

 

 

* 용화사에 있는 서자복 미륵

 

▲ 돌하르방보다 훨씬 큰 동자복과 서자복 미륵

 

 다시 시내로 들어오면서 처음 찾아간 곳은 용화사다. 용담동 속칭 한두기 절동산 용화사에는 높이 290cm의 큰 석상과 오른쪽으로 60cm쯤 되어 보이는 하얀 동자석이 있다. 큰 석상은 '자복(資福)', '복신미륵(福神彌勒)', '큰어른' 등으로 불리는데, 그 생김새가 특이할 뿐더러 제주 다공질 현무암으로 조각된 점이 특징이다. 건입동에 있는 동자복과 용담동의 서자복 둘 다 달걀형의 둥그스름하고 얌전한 얼굴에 벙거지 같은 감투를 쓰고 늠름하게 서 있다.   

 

 어느 것이나 다 형상과 조각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신기한 것은 동자복과 서자복이 서로 마주 보며 제주읍성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는 작은 석상은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미륵불이다. 건입동 복신미륵은 개인 주택 뒤편 좁은 공간에 위치해 있는데, 이 자리는 만수사(萬壽寺)라는 절집이 있던 곳이며, 서미륵이 있는 자리는 해륜사(海輪寺)가 있던 곳이다. 이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절은 없어지고 그 곳에 세웠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다. 


 

 

* 민가 안에 모셔져 동자복 미륵

 

 두 미륵은 민간에서 명복신(命福神)으로 숭배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동미륵은 집안의 제액(除厄)과 육아(育兒)에 특히 효험이 있다 하여 근처의 민간인들이 스스로 날을 봐서 제를 올린다. 한편 서자복은 해상어업의 안전과 풍어, 출타한 가족의 행운을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근처의 주민들이 자주 찾는다. 두 미륵불은 지방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과거 이 두 미륵은 성안을 굽어보며 높은 위치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은 빌딩이 서고 건물 자체가 높아지다 보니 바로 이웃에서도 잘 보이지 않아 찾기조차 힘들다. 동자복의 경우는 조그만 골목 집안에 있어 지금 길의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어 조금 쉽게 찾을 수 있다고나 할까? 앞장서 걸어가 울타리 너머로 미륵불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한참 동안 벨을 눌렀으나 응답이 없어 그냥 옆문을 밀고 들어가 보고 나왔다. 

 

 

* 화북 포구에 있는 해신사

 

▲ 마지막으로 찾은 화북 해신사

 

 지방기념물 제22호 해신사(海神祠)는 1975년 포구와 선착장을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순조 20년(1829) 한상묵 목사에 의해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할 목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전면 1칸 오량집 팔작지붕 아래 다시 비각을 세워 조그맣게 '해신지위(海神之位)'란 빗돌을 감싸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하기 전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내 해상안전을 기원하였으나, 10여 년 전부터는 마을의 안녕과 수복을 기원하는 유교식 마을제로 바뀌었다.

 

 화북동 민속보존회는 전통민속을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제의절차를 '해신제'(연출 한재준)로 선보인 적이 있다. 예로부터 연륙 교통의 요충지로서 조정에서 직접 명을 받아 해상안전과 마을의 안녕, 풍어를 기원하며 화북 해신사(海神祠)에서 지냈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제의는 상단제와 하단제로 나눠 해신(海神)과 무주고혼(無主孤魂, 자손이 없는 외로운 혼령)에게 올려졌다. 또 화북포구의 특성을 살린 배만들기 의식도 재현된다. 

 

 마지막 해신사를 답사하고 나자 시간은 3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옆에는 바로 화북진성이 있던 곳으로 해방 후에 화북초등학교 부지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옮겨가 버리고 성터의 돌담이 꽤 많이 남아 옛날의 역사를 말해준다. 오늘은 날씨도 좋았고 인원도 알맞아 오순도순 좋은 답사를 할 수 있었다. 답사 때마다 막걸리를 제공해온 강정숙 회원이 오랜만에 오면서 가져온 막걸리 한 상자가 또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이 공간을 빌어 감사 드린다.

 

 

* 나오다 본 화북진성 터

 

♬ 박인희 노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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