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통일을 향한 여정 (3)

김창집 2006. 2. 24. 16:11

-- 금강산 통일 연수기

 

 

* 비룡폭포 중간에 보이던 부처상을 당겨 찍은 것

 

▲ 노총각 장가 못 가 애태우는 꼴

 

 배도 고프고 내리막길이어서 오를 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목란관에 도착했다. 목란(木蘭)은 북한의 국화(國花)로 알려져 있다. 목련과의 잎 지는 떨기나무로 남한에서는 산목련 또는 개목련으로 불린다. 구룡연 초입에 있는 목란관은 구룡연의 절경을 감상하며 북측의 대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내려오는 대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아침에 바꿔놓은 표를 내고 비빔밥을 시켰다. 돈을 더 내면 비싼 것을 먹을 수 있지만 점심이라 대충 먹는다고 냉면을 시키는 선생님도 있다.

 

 이곳의 막걸리를 맛보기로 하고 주문했더니 겨울이어서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고 한다. 내친 김에 들쭉술 한 병을 시켜 이곳저곳 나눠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무난한 날씨에 잘 다녀와서 그런지 모두들 즐거운 얼굴이다. 비빔밥이 나오기 전에 만두 2개와 작은 녹두전 한 개씩을 주니 안주로는 안성맞춤이다. 등산 중 한 일반 관광객이 아이와 함께 오르다 담배를 피웠는데, 조장에게 교육 잘못 시켰다고 크게 꾸중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네 -  공화국 창건일을 맞아 새긴 글

 

 먼저 내려오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북측 사람에게서 많은 질문 공세를 받았다는 사회 선생님이 있었다. 남측 TV라도 열심히 보는지 시사(時事)에도 밝았으며 통일부장관 청문회라든지 핵문제에 대한 것도 많이 알고 있었는데, 남측 고위 인사들이 부정축재를 많이 한다고 꼬집었다 한다. 북측엔 그런 게 없느냐고 되물었더니, 사람 사는 곳에 왜 없겠느냐고 하면서 이곳에서 들키면 총살을 시키든지 아니면 수용소로 보내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더란다. 또 남측에서 북측을 여러 형태로 도와주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서 뭐 형제끼리인데 서로 도와 주는 게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이 아니냐고 대답했다 한다. 화장실까지 따라붙으면서 계속 질문을 하다가 선생님들이 내려오자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내려오다가 차를 멈추고 신계사(神溪寺) 복원 현장에 들렀다. 이건 복원이라기보다는 신축(新築)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모두 새로 짓고 있다. 옛날 신계사는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이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서기 519년 보운(普雲)대사가 이 절을 지을 때 "부처님의 도량은 가장 청정한 법계인데 어찌 물고기가 있어 냄새가 진동하는가?"라고 생각하며 주문(呪文)을 외워 바다로 몰아내었더니, 그 후부터는 바다까지 계곡이 이어져도 고기떼들이 들어오지 않은 신령스러운 곳이라 하여 신계(新溪)에서 신계(神溪)로 바뀌었다 한다.

 

 

* 우리가 점심을 먹었던 구룡폭포 입구의 북한 식당 목란관

 

 21동에 이르는 전각을 소유했던 신계사는 1951년에 전쟁의 참화로 폐허가 됐고, 부서진 삼층석탑과 그 옆의 커다란 보리수 두 그루, 그리고 만세루 돌기둥만이 남아 있는 것을 금강산 관광 시작과 함께 '전통문화를 복원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을 드높이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2004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복원은 대한불교조계종 신계사 복원추진위원회가 맡아 진행하고 있는데, 일제 때 찍은 사진을 참고로 대웅보전은 완성되었고 나머지 건물은 짓고 있는 중이었다.

 

 날씨가 좋아 빨리 내려왔기 때문에 통일 워크샵을 먼저 진행한다고 하여 문화회관에 모였다. 분위기를 잡는다고 조장 두 분이 나가서 북측 노래를 배워주며 부르도록 하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반갑습니다'와 '휘파람'이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 얼싸 안고 좋아 웃음이요 절싸 안고 좋아 눈물일세 / 어허허 어허허허허 늴리리야 /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귀에 익은 곡이라 악보를 보면서 쉽게 익힐 수 있었다.

 

 

* 구룡대에서 찍은 금강산 봉우리 - 이런 곳이 많았다.


 제주도교육청 김은표 장학관의 인사에 이어 제주 출신 통일연수원 고성효 교수가 나와 토론을 진행시켰다. 고성효 교수는 모두(冒頭) 발언에서 관광이 시작될 때와 지금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술회하고, 처음에는 지금의 10배정도 되는 군인들과 정보원들이 근무를 서면서 지켜보았고, 목란관은 분위기가 서먹서먹하고 음식도 시원치 않아서 영 달갑지 않았으나 지금은 음식도 좋아졌고 서비스도 활발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리고 통일을 결혼에 비유해 얘기했는데, 신랑과 신부가 서로 입장 차가 다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조바심을 버리고 조금씩의 변화라도 지켜보자고 했다. 수긍이 가는 얘기였다. 북측에서는 통일을 원하는 것이 진정(眞正)이 아니라 주민들을 달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책적으로 이용한다는 의심을 감출 수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곳에 장가들어야만 하는 노총각은 열과 성을 다하여 도와주고 있는 형편이다. 이를테면 김유정의 '봄봄'에서처럼 데릴사위(말이 데릴사위지 머슴)인 '나'가 혼인시킬 마음은 없으면서 정략적으로 부려먹는 마름 봉필의 속마음도 모르고 점순이를 보면서 애타는 심정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 새로 크게 새긴 금강문 글씨

 

 선생님들의 제언 중에는 "지금 전교조 같은 단체에서는 교사끼리 만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모색하기도 하는데, 적어도 교사들의 통일 연수라면 학교 방문이나 같은 교사들끼리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할 것이 아니냐?"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대한 교수의 대답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이는 통일연수원의 힘만으로는 힘든 일이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미력이나마 보태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이번 연수는 어렵게 노력한 끝에 그나마 얻어진 소중한 기회라 생각하고 남은 기간 작은 바람 하나라도 꼭 이루고 가길 원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부부가 대판 싸움하고 헤어진 후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눈만 흘기다가 양쪽 집안에서 합치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한쪽은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무슨 기회만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도와주면서라도 합치려 하고, 한쪽은 집안의 눈치 때문에 합친다고는 하면서도 합치면 자신들의 처신에 불리할 듯 싶으니까 합치지는 못하는 대신에 합친다는 걸 전제로 이익이나 챙기려 하고…. 들어올 때 비무장지대와 그에 이르는 구간에 끊어진 오래된 철길을 보았다. 그것을 다시 잇자고 거창하게 식까지 올렸는데, 조장의 말로는 남측은 거의 다 보수공사를 끝냈고, 북측에는 아직도 요원하다고 했다. 남북관계는 두 갈래의 철길처럼 영원히 합치지 못하고 평행선으로만 달릴 것인가?


 

 

 * 구룡대에 막 올랐을 때 눈 앞 바위에 새긴 글

 

▲ 저걸 연습하느라 얼마나

 

 워크샵이 끝나고 우리는 개운치 못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어내기 위해 서둘러 온천으로 갔다. 시간이 5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산에 올라갔다 와서 땀에 젖어 축축한 내의와 방금 있었던 워크샵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내일 기회가 없고 보면 금강산에서 온천욕을 할 마지막 기회다. 우리는 냉탕과 열탕을 번갈아 부지런히 오가며 재빨리 목욕을 끝내고 그 유명한 모란봉 교예단 공연을 관람했다.

 

 모란봉 교예단(牡丹峰巧藝團)은 북한이 자랑하는 공연 단체로 1989년 2월에 창립되었다. 평양 교예단과 함께 북한을 대표하는데, 평양교예단은 빙상·수중·동물 교예가 중심인 것에 비하여 모란봉 교예단은 육체로 표현하는 미적인 예술성과 역동적인 체력 교예가 중심이다. 1982년 군의 종합예술단체인 조선인민군 협주단에 신설된 교예부로 출발하였고, 1989년 2월 조선인민군 교예단으로 승격·독립되었는데, 1990년대 초부터 해외공연 및 국제대회 참가 등 활발한 대외 활동에 맞추어 모란봉 교예단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 곳곳에 새워놓은 교시탑 - 수령 동지의 말씀을 새긴 것


 단원은 250여 명이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부 소속이며 본부는 평양특별시 모란봉 구역에 있다. 조직은 창작·기량·요술·조명·분장 부문으로 구성되었고, 단원은 주로 조선인민군 예술학원과 평양교예학교 출신자 가운데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나 현역 사병에서 특채한 경우도 있다. 공연은 모란봉 교예극장이라고도 부르는 전용극장에서 상설 공연을 하고 있는데, 1999년 8월부터는 현대그룹의 남북경제 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일부가 떨어져 나와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남한 관광객을 대상으로 공연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현대아산과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90여분간의 공연을 하루 두 차례 실시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공연 종목은 공중 철봉 전회 비행, 땅재주, 손재주, 원통 돌리기, 외바퀴, 자전거 타기, 눈꽃조형(세계 교예축전 입상작), 봉 재주, 장대 재주 등이 있는데, 특히 공중 철봉 전회 비행은 제24차 몬테카를로 국제교예축전(1999년 1월) 은상과 중국에서 열린 제9차 국제교예축전 금사자상을 수상하여 모란봉 교예단의 대표 공연 종목이 되었다. 모란봉 교예단에서는 자신들의 교예를 "단순한 서커스(곡예)가 아니라 미술, 음악, 연극, 체조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고 말한다.

 

 

* 다 끝나고 나서 모여 인사하고 손을 흔드는 단원들 - 중간에는 사진을 못 찍게 했다.

 

 막이 열리고 생음악 연주에 맞추어 화려한 한복을 입은 사회자가 나타나서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북한 특유의 톤으로 모란봉 교예단 금강산 소조의 공연을 알리자, 두 명의 인민배우와 수명의 공훈배우들을 포함한 전 공연단이 차례로 나와 인사를 한다. 나중에 조장의 설명으로 알았지만 인민배우는 우리나라로 치면 장관급 대우를, 공훈배우는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끔 TV를 통해 보기도 하였지만 현장에서 보는 공연은 실로 가슴을 조이는 스릴의 연속이었다. 공중 춤으로부터 시작된 공연은 그들이 자랑하듯 정말 최고의 수준이었다. 손에 땀을 쥐면서도 저걸 연습하느라 얼마나 피땀을 쏟았을까 하는 생각에 내내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최고의 장면을 뽑으라면 남자 인민배우가 눈가리개를 하고 다섯 개의 원통 위에서 중심을 잡고 앞에 놓인 북을 향해 7개의 공을 던져 되받는 장면이었다.

 

 

* 새로 지은 신계사로 가는 선생님들 - 삼층석탑이 전쟁을 치르며 저렇게 되었다.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라 모두 자신감이 넘치고 익숙하게 하면서 관객을 시종 압도하였다. 조장의 얘기로는 5∼6세 때 선발하여 10년 동안 기초 체력을 다진 후 각각의 재능에 따라 한가지 기예를 부여받고 또 다시 10년에 걸쳐 그 기예를 훈련하여 성공한 사람만 뽑아 공연을 하게 한다니까 이들이 그 동안 들인 공을 생각하면서 본다면 더 많은 감동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의도한 바겠지만 어려운 봉(棒) 공연을 끝내면서 통일을 의미하는 한반도 지도 위의 "하나"라는 현수막은 많은 사람들을 뭉클하게 하였고, 마지막 '반갑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는 빨리 끝나는 것이 아쉽기도 한 90분이었다.

 

 자주 보아온 내용들이지만 생음악과 함께 현장에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북측 사람들이 몸 하나를 무기로 죽어라 연습해서 그런 대로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한편으로 가엾기도 하고 한편으로 가상하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작고 왜소해 보인다. 저녁은 식권을 가지고 아무 데나 가서 돈을 더 주든 말든 마음대로 해도 되기에 모처럼 같이 간 우리 학교 선생님 셋이서 온정각 동관에 가서 생태찌개를 먹었다. 남측에서 운영하는 곳이어서 적당히 매운 것이 소주 한 잔에 아주 잘 어울린다.


 

 

* 구룡폭포가 막 떨어지기 시작하는 곳

'국내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봄 마지막 금강산 설경  (0) 2006.03.04
통일을 향한 여정 (4)  (0) 2006.02.26
통일을 향한 여정 (2)  (0) 2006.02.22
통일을 향한 여정 (1)  (0) 2006.02.20
신흥사(新興寺)의 사천왕상  (0) 2006.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