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목시물굴 해원상생굿

김창집 2006. 4. 11. 10:50

 

 

* 청미래덩굴 너머로 날리는 상생굿 기

 

▲ 찾아가는 현장 위령제 - 4. 3 해원상생굿

 

 4. 3을 붙들고 연작 소설을 쓴 지도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 때 특별법 열기가 식을까봐 전전긍긍하며 4. 3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고, 4. 3은 현재진행형이라고, 그런 사연들을 취재하며 밥벌이의 시간을 쪼개 소설로 쓰는 작업을 하다가, 특별법이 통과되어 작년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듣고는 혼자 가슴 뿌듯해 하던 기억이 어제 같은데, 1년이 지나 다시 4. 3이 돌아왔다.

 

 4월 3일 월요일 아침 모처럼 아침 2시간이 비어 있길래 행사장인 4. 3공원에 다녀오리라 다짐했는데, 대통령이 오기 때문에 차량이 현장을 왕복하는 버스만 운행된다기에 속상해도 포기하고 전국으로 중계되는 TV를 보며, 이번 2주째 노는 토요일에는 목시물굴 해원상생굿이나 가보자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둔 터였다.


 

* 제차를 이끌며 신원해주고 있는 심방(무당)

 

 4월 8일 토요일. 날씨는 의외로 화창했고, 왕벚꽃 축제다 들꽃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하는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북제주군 조천읍 선흘리 목시물굴로 차를 몰았다. 이곳에서는 제주민예총과 4. 3문화예술제 사업단의 해원상생굿 기획팀이 주관하는 해원상생굿이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번 주요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제주작가회의 김경훈 시인의 목시물굴 학살을 주제로 이들의 영혼을 위무(慰撫)하는 시를 지어 낭송하며, 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인 김윤수와 10여명이 참가하는 위령굿, 풍물패 신나락의 소리굿, 가수 최상돈과 놀이패 한라산이 벌이는 놀이굿, 참배객과 현지 주민의 분향 및 소지 사룸, 거욱대 제막식 등이 이루어졌다.

 

 

* 입구에 설치해놓은 대나무로 만든 문

 

▲ 왜 해원상생굿을 하는가

 

 그것은 예술의 쓸모 있음에 대한 모색이면서 동시에 예술이 쓸모 없음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신화에서 세속의 시간으로 내려온 인간의 시간 - 역사의 길을 예술이 연어처럼 거슬러 신을 울리고 영계를 울릴 수 없음에 대한 지독한 독백이요, 절망에 대한 다른 몸부림이다. 다시 굿을 얘기하는 것은 예술이 원초적인 인간의 원혼을 치유할 수 없으리라는 어떤 예감, 그 한계에 대한 나름의 처방전이다.

 

 예술은 보다 근원적인 느낌을 향하여 늘 질주하고자 하는 관성(慣性)을 지니고 있다. 해원상생굿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해원상생굿은 극(劇)이 아니다. 즉, 연출되지 않는다. 해원상생굿의 미학(美學)은 '날 것'의 미학이다. 짤 만들어진 공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한 느낌을 만나는 일이다. 4. 3 당시에 죽임을 당한 제주의 주민들은 역사를 만났을 뿐이다. 그 당혹감과 처참함은 인간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환경이며 역사적인 공간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 목시물굴로 들어가는 숲속에 전시된 당시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 

 

 해원상생굿은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학살의 터'를  찾아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장소, 즉 땅인 자연까지도 함께 치유하는 상생의 굿이다. 그러므로 이 굿은 인간과 자연이 동시 치유되어야 할 대상임을 일깨우는 일이며, 죽음의 터전이 되어 끔찍한 기억에 몸서리치는 죽은 땅을 살리는 제의(祭儀)이기도 하다.

 

 해원상생굿은 예술가들이 미의식으로 역사적 비극을 치유하는 예술화 과정이다. 굿이라는 장르 분화 이전의 미의식과 전통적 의미인 춤, 소리, 시를 동원하는 것으로 역사, 사건, 의례를 예술적으로 전유하는 과정이다. 또한 죽임의 공간에 각종 설치 상징을 통하여 공간과 의례의 조형화를 추구한다. 즉, 조형성과 연행성, 시간과 공간성, 정치성과 예술성을 공히 추구하는 미적 전유의 과정이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의식의 재 규정이다. (안내 글에서)

 

 

* 억울하게 죽은 영혼에게 올린 월미

 

▲ 4. 3 유적지 '목시물굴'

 

 목시물굴은 조천읍 선흘리 산26번지에 위치한 자연동굴로, 선흘리 초토화(焦土化) 이후 선흘리민들이 은신(隱身)해 있다가 희생당한 곳이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 일대가 토벌대에 의해 불탄 이후 선흘리민들은 선흘곶 일대의 곶자왈과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다. 하지만 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1948년 11월 25일 목시물굴에서 1㎞ 남짓 동쪽에 이웃해 있던 도틀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밤새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이 목시굴의 존재를 토해냈다.


 

 

* 숲속에 위치한 목시물굴의 또 다른 통로 

 

 11월 16일 아침,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들은 길잡이를 앞세우고 선흘곶을 향했다. 전날 도톨굴에서의 희생 소식을 이 날 아침에야 감지한 주민들이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더러는 식사준비를 하던 중에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토벌대는 선흘굴을 향해 박격포를 쏘면서 목시물굴로 향했다. 

 

 목시물굴은 도툴굴보다 작은 굴이지만 200명 이상 대부분의 선흘리 주민들이 은신(隱身)해 있는 굴이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慫慂)했다. 나가면 죽을 것이 뻔한 것을 안 주민들을 버텼다. 먼저 나간 사람들은 총살을 당했다. 이 날 목시물굴에서 희생된 사람은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아기로부터 50대 넘은 노인들까지 40여 명이다. 따라서 4. 3 때 희생당한 이곳 선흘리 주민들은 200명을 넘는다.

 

 

* 진행중인 해원상생굿의 현장

 

▲ [추도시] 집 - 선흘리 목시물굴에서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네
내가 거처할 곳이 아니라네 잠시
살러온 것뿐이라네.
저기,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두 참 남짓
멀지 않은 곳이라네
굴에서의 삶은 입에 곡기(穀氣)가 없었다네
굴속에서 끌려나온 나의 몸이 총탄을 실컷 먹었다네
그건 나의 집의 밥이 아니었다네
그 위에다 휘발유,
내 몸 위에 불이 얹어졌다네
그건 나의 집의 온돌이 아니었다네
그 위에 나의 시신(屍身) 위에
살아남은 자들이 흙을 덧씌워줬다네
그건 나의 집의 이불이 아니었다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잔디 입혀 이장한 이 무덤이 아니라네
여긴 내 집이 아니라네
나의 집은, 저기
두 참 바로 못 미처
내가 살던 바로 그 집
마저도
불에
타버렸지만

 

                                                        김경훈

 

 

* 목시물굴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유족들

 

▲ 이제 해원상생의 길로

 

 10시에 시작되는 행사에 시간이 조금 늦은 감이 있어 봉개동에서 16번 중산간도로를 이용해 속도를 내며 동쪽으로 달렸다. 4. 3 제58주년 예술제 행사 중의 하나인 '찾아가는 해원상생굿'이 올해는 북제주군 조천읍 선흘리 "목시물굴" 현장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행사는 2002년에 "다랑쉬굴", 2003년에는 "북촌학살터", 2004년 "잃어버린 마을 화북 곤을동", 그리고 작년에 "표선 한모살 백사장" 등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 간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직접 영혼을 위로하고 해원하는 행사를 가져왔다.

 

 선흘리를 지나 얼마 안 되어 왼쪽 덕천으로 빠지는 길에는 굿 장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대나무에 매단 흰색과 검은색 기(旗)가 현장까지 듬성듬성 걸려있어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양쪽에는 이미 수많은 차량이 서 있어 차례로 주차하고 행사장으로 들어가는데, 신(神)의 방문할 수 있도록 대나무로 열두 대문을 만들어 놓았다. 


 

 

* 위패 대신 세워 놓은 이름을 적은 말뚝들

 

 문을 통과하자 아는 얼굴들이 보이고 이미 굿은 진행 중이었다. 오전 10시부터 다섯 시간에 걸쳐 행해지는 해원상생굿은 도민들과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분들의 유족들이 모여 굿의 제차(祭次)를 지켜보고 있었다. 병풍 대신 죽은 자의 명단이 적힌 판들을 두르고, 위패(位牌) 대신 이름을 적은 나무 말뚝들을 세워 놓았다. 58주년이란 연륜이 말해주듯 이제 머리가 허연 유족들은 안도(安堵)의 한숨을 내쉬며 처음으로 소지를 살라 원혼들을 저 세상으로 인도했다. 

 

 당시 조천 등 해안가 마을로 미리 소개(疏開)가서 목숨을 유지한 유족들을 이제까지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풀어내며, 이제는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는 듯 묵시굴 현장에서, 굿판에서, 당시의 상황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恨)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제 막 물오른 나뭇가지에 싱싱한 싹이 돋아나듯 그렇게 '잔인했던 4월'은 위무(慰撫)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저 흐드러지게 핀 벚꽃처럼 홍조를 띤 채 매듭을 하나둘 풀어내고 있었다.


 

 

* 목시물굴 숲에서 벗어나면 밝은 세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