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비양도를 한 바퀴 돌고나서

김창집 2006. 9. 16. 01:03

-- 섬 속의 섬 '비양도' 답사(2)

 

 

 

* 남쪽에서 본 비양봉(위)과 서쪽에서 본 비양봉(아래)

 

▲ 그 섬에 가면 - 오석균

 

그 섬에 가면
숭어처럼 떼를 지어 바다 위를 오가는
삼월 안개를 볼 수 있다
안개는 배를 이끌어 인정의 닻을 내리고
마른버짐과 꽃 먼지 알레르기 푸석한 살갗을 덮어
한줄기 바람으로 지난밤을 세수하라 한다
그 섬에 가면
실뱀처럼 가벼웁게 골짜기를 넘도는
사월 달래 향을 만날 수 있다
눈이 짓무르고 귀가 먹먹한 갈매기들이
반듯한 두부 모 같은 오후 위를 날다가 지쳐
바다로 바다로만 자라난 솔가지에다가
미련 함 움큼 욕심 한 움큼 걸어 놓고
위로하라 한다 자신을
달래라 한다

 

 

 

* 서남쪽 바닷가의 파도(위)와 돌담 아래의 강아지풀(아래)

 

그 섬에 가면
그 섬에 가면
지친 사십 년을 부두에 매어 놓고
엉키어버린 그물, 뒤섞여버린 줄가리를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날줄로 매어놓고
강인함은 강인함대로 씨줄로 세워 달며
파도에 흔들리며
흔들리는 대로
출항을 기다리는 작은 섬
내 아이를 볼 수 있다

그 섬에서 보낸 한 철

 

 

 

* 비양도를 지키는 초병(위)과 남쪽 해안에 이는 파도(아래)

   
▲ 백 년만에 한 번 꽃피우고 죽는 용설란 

 

 비양오름에서 내려오면서 좀 전에 먹은 것도 있고 시간도 남아 남쪽 해안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늘 따라 물은 나가지 않고 거의 만조 상태여서 때 맞춰 불어오는 서북풍에 바닷가에는 파도가 신나게 부서지고 있었다. 해안(海岸)을 한 바퀴 두른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걷다가 바다를 지키는 초병을 만났다. 어디서 왔는지 바다 건너 저 고향집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지나가는 갈매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협재해수욕장이 보이고 하얀 모래 때문에 바닷물이 한층 밝게 보인다. 햇빛만 비친다면 에메랄드빛일 텐데 아쉽다. 젊은 날 수영 팬티 하나만 걸치고 저 해수욕장에서 이곳까지 헤엄쳐 온 내가 아닌가? 작살로 고기를 잡을 때 서너 시간은 보통 물 속에서 지내며 자란 탓에 오래 헤엄치는 요령을 터득해서 경기도 양평에서 군대 생활할 적에는 한강을 가로질러 왕복하는 내기를 해서 막걸리 한 통을 딴 적도 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걷다 보니 드디어 인가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용설란이 꽃을 피운 뒤 꽃대가 마른 채로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 후손을 위하고 나면 자신은 죽고 만다. 백년만에 한번 꽃을 피운다는 이 용설란은 그 꽃대의 길이가 거의 국기 게양대 길이다. 아아! 온 몸을 던져 피우는 꽃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극 열매에는 얼마나 진한 사랑이 스며 있을까? 저 마른 꽃대에서 화석이 된 꽃은 오늘 이곳을 걷는 우리들에게 숭고한 사랑을 가르친다.

 

 

 

* 옛 포구 쪽에 새워놓은 낚싯배(위)과 봄날 촬영지를 알리는 표지(아래)

 

▲ 오분자기 죽에서 보말 죽으로

 

 옛 포구에는 낚싯배 몇 척이 조르르 매어져 있다. 1976년 처음 올 때만 해도 이 조그만 포구 바닥은 모래여서 보리멸(제주에서는 모살치)이 곧잘 잡혔다. 조그만 다래끼를 가져다 물을 떠놓은 뒤 도마 위에는 된장에다 마늘과 식초를 약간 넣어 장만한 것을 가져다 놓고, 숫제 1.8ℓ 소주병을 심어 놓은다음 컵에 따라 반쯤 쭉 들이킨 뒤, 얼른 대나무 낚싯대의 줄을 물 속으로 집어던지면 두어 마리 모살치가 금새 달라붙었다.

 

 얼른 낚아 올려서 양쪽 비늘을 삭삭 털어 내고 머리를 싹둑 잘라 칼끝으로 내장을 긁어내 두어 도막으로 자르면 여지없이 담백한 보리멸 회(膾)로 변하는 것이다. 아직도 저 조그만 방파제 끝에 가면 아침저녁으로 심심찮게 낚인다. 밤이면 주인 아저씨를 따라 배를 타고 한치 낚시를 가든지 아니면 밤 12시에 잡은 놈으로 2∼3kg 갖다 달래서 방파제 등불 밑에서 한껏 회를 즐겼다.

 

 부둣가에는 지난번에 이곳에서 촬영했던 '봄날'에 대한 상징 기념물이 서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에서는 그물에 박힌 꽃멸치를 떠느라 분주했었는데, 지금은 잡히지 않는지 오늘은 허리가 꾸부정한 할머니 한 분만 외롭게 작은 정자를 지키고 있다. 처음 이곳에서 민박할 때 마지막으로 먹는 점심 식사는 전복을 닮은 오분자기로 쑨 죽이었다. 그러던 것이 5∼6년 전부터 보말이라는 고둥으로 만든 죽으로 바뀌었다. 호돌이 식당의 보말죽이 맛이 있다고 모두들 그릇을 싹싹 비운다.

 

 

 

* 비양봉의 신당(위)과 기다란 펄랑지(아래)

 

▲ 바닷물이 조금씩 오가는 '펄랑지'

 

 멀리서보면 비양도는 비양봉 또는 가재봉이라고 부르는 오름 하나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와보면 그게 아니다. 한림항과 협재 쪽을 향한 섬의 남부는 제법 평평하고 넓은 대지를 갖고 있다. 이곳에 마을과 밭 몇 뙈기가 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일행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섬 일주에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는 길목에 초등학교 비양분교가 있는데, 얼마 전에 봄날을 찍었던 세트만 있고, 지금은 다니는 학생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온 학생들 몇이서 축구를 하고 있다. 학교를 둘러보며 아이들이 가꾸었던 화단과 화분의 꽃을 찍고 나왔다. 학교를 갓 나온 곳에 소나무 몇 그루가 있고 발전소가 있는데, 왼쪽 펄랑지와 이어지는 곳에 금릉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김씨할망을 모시는 비양도 신당(神堂)이 있다. 좀 빛이 바래었지만 지전물색이 달린 것으로 보아 아직도 사람들이 오가는 모양이다.

 

 이어지는 펄랑지에는 사방을 둘러 나무로 산책로 겸 철새 관찰로가 만들어져 있다. 인기척을 의식했는지 왜가리 두 마리가 저쪽 숲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렇게 나무로 만든 길로 사방을 둘러 안온한 보금자리를 엿보는데 어떤 철새가 와 머물까? 엄청난 돈을 들이면서까지 이렇게 만든 걸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길이 5백m, 폭 50m 정도의 펄랑호는 돌 틈으로 물이 조금씩 가고 오기 때문에 간만의 차에 따라 물의 높이가 차이가 난다.

 

 

 

* 동북쪽 바닷가의 파도(위)와 비양분교(아래)

 

▲ 화산이 터지기 전부터 있던 섬

 

 펄랑지 주변에 다 자라지 못한 자생 황근(黃槿)들이 보이고, 펄랑호와 길이 맞닿은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해녀콩이 한창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고 있다. 분홍색의 커다란 꽃은 자생하는 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원예종 꽃이라 해도 곧이 듣겠다. 한 켠에 해국도 심어 놓았다.  누가 건드려 놓았는지 순비기 열매 향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초여름 이곳에는 자생 참나리가 주변을 장식한다.

 

 이곳 해안가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오래 전 제2기 화산 분출기에 흘러와 바닷가에서 멈추며 굳어진 검은 현무암 위에 천년 전에 다시 흘러와 굳어진 붉은 빛이 도는 화산석이 확연히 구별이 된다. 색도 틀릴 뿐만 아니라 돌 위에 덧 씌워진 부분이 드러나 구별되는 것이다. 모 신문사에서는 비양도에서 신석기 유물을 확인하여 기사로 발표까지 했다.

 

 고개를 들어 동쪽으로 멀리 해안선을 보면, 귀덕 2리 쪽 진질코지와 그 너머 한담 코지가 보인다. 그 한담 코지 안쪽이 내 고향 곽지해수욕장인데 비양도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한 임신부가 해변을 걷고 있는데, 마침 커다란 섬이 둥둥 자기 앞으로 온다. 깜짝 놀라 "어! 저기 섬이 이쪽으로 떠온다!"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섬이 놀래어 둥둥 떠가 이곳에 멈췄다는 것이다. 이 섬에서 화산이 분출한 여파로 해일이 일어나 그곳의 모래를 부락 안까지 덮어버리는 바람에 겁이 난 주민들이 중산간에 흩어져 살기도 하였다.

 

 

 

* 여러 가지 바위(위)와 애기 업은 돌(아래)

 

▲ 천연기념물 제439호 애기업은 돌

 

 지금 비양도는 북쪽으로 많이 깎이어 새로 뽑은 길 위까지 물결이 넘친다. 하지만 처음 이곳 화산이 터졌을 당시에는 저기 등대가 있는 곳까지 길게 화산재가 덮여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섬의 서북쪽 끝 한림에서도 다시 서북쪽에 자리한 이 섬은 겨울철 하늬바람으로 몸살을 앓는다. 망망대해의 사나운 바닷바람이 집채만한 파도를 몰고 와 계속해서 오름을 깎아 사방으로 흩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무른 살을 가진 오름까지 많이 침식되었고, 애기 업은 돌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애기 업은 돌은 오름이 중심부에 위치한 분화구의 용암이 굳어진 것이다. 화산활동이 멈추면서 채 못 빠져나온 용암은 굳어져 비교적 밀도가 높은 바위가 되었고, 비교적 무른 화산재를 파도가 전부 끌어가 버리고 나니까 그 자리에 이렇게 남아 애기 업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다.    

 

 비양도 용암기종(飛揚島熔岩氣鐘)이라고 불리는 이 바위는 2004년 4월 9일 천연기념물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1,323㎡으로 한림읍 협재리(挾才里) 산 127∼128번지에 인접한 용암기종 주변이다. 기종의 높이는 약 8m, 최대 너비는 3m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고, 최상부는 속이 비어 있다.

 

 

 

* 코끼리바위(위)와 그 옆 낙타바위(아래)와

 

▲ 섬 속의 섬, 또 그 섬 속의 섬들

 

 그곳으로부터 길을 만들면서 묻히거나 주변에 뒹구는 보기 좋은 화산탄과 돌을 전시대를 만들어 쭉 세워놓았다. 이 지역에서는 용암기종을 중심으로 다양한 모양의 화산탄 군락지와 특수한 구조의 용암류 등 전형적인 화산지역에서 나타나는 지질구조를 함께 볼 수 있어 오래 전부터 경관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되어 왔다. 누구는 자연스럽게 놔두기를 원하고 누구는 이렇게라도 보존해야 한다는데 어떤 게 좋은 것인지?
    
 그곳을 벗어나면서 조그만 여[嶼]들이 나타난다. 아 바위섬들은 큰자재여, 밧서비녀, 안서비녀 등으로 불려지며, 구멍이 뻥 뚫린 제일 큰 코키리여, 그 남쪽으로 옆에서 보면 꼭 낙타를 닮은 낙타여, 그곳으로 가는 곳에 제주도에서는 제일 크다고 생각되는 화산탄이 이제 썰물이 되었는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물이 나가면 그곳까지 걸어 들어가 여 꼭대기에도 오를 수 있다.

 

 파도가 칠 때는 물이 넘치는 길을 겅중겅중 걸어 들어가는데, 이곳의 나이 많은 한 할아버지가 파도에 뿌리뽑혀 밀려온 감태를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감태(甘苔)는 갈조식물 다시마목 미역과의 여러해살이 해조로 깊은 바다 속에서 자라는데 다 자라면 길이 1∼2m나 된다. 줄기는 원기둥 모양이고 밑동은 뿌리 모양이다. 해조류를 구성하는 중요한 식물이며 주로 전복과 소라 등의 먹이가 된다. 알긴산이나 요오드, 칼륨을 만드는 주원료가 된다.

 

 

 

* 여러 가지 섬과 파도 치는 바위들

 

▲ 약 130년 전에 사람이 살기 시작  

 

 이곳저곳의 기록을 참조해 보면 비양도에는 고종 13년(1876)에 서(徐)씨 일가가 처음 입도했다고 전해 온다. 이곳 비양리 본향당 당신(堂神)은 바다 건너 마을 금릉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얘기가 있는데, 금릉당은 임씨하르방이 당신으로 있다. 금릉당과 비양당 당신(堂神)이 합쳐지면 도깨비불이 되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 한참 동안 놀다 간다고 했다. 도깨비는 고기잡이와 연결되지만 이 전설에서 보듯 혹 금릉에서 서씨 가족이 건너온 건 아닐까?

 

 한 때 비양도 북쪽과 그 주변은 바다가 비교적 낮아 옥돔 같은 고급 어종의 황금어장이었다. 그러던 것의 귀덕쪽으로부터 한경면이 끝나는 곳까지의 배들이 와서 마구 잡는 바람에 지금은 많이 황폐되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도 관행을 내세워 다른 곳과 달리 바닷가까지 공동어장으로 남아있는 사실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안타깝다. 비양도는 몇 척의 어선이 고기를 잡는 것을 제외하면 잠녀들이 물질로 생산해내는 전복, 오분작, 소라 등이 주산물이다.  

 

 부두에는 이곳에 식수 공급을 위해 바다 속으로 파이프를 이어준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새긴 비석이 서 있다. 1965년 해역사령부가 나서서 협재에서 이곳으로 해저파이프를 연결, 식수 공급이 가능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구름이 낀 날이어서 그냥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에 주저앉아 "물이 나갔으면 보말 몇 줌 잡을 텐데…." 하면서 섬을 바라본다. 오름의 짙푸른 풀밭과 바다의 하얀 포말은 한여름 더위에 시달린 우리에게 더없이 시원함을 선사한다.

 

 

 

* 북서쪽에서 본 오름(위)과 서남쪽 평평한 곳(아래)

 

▲ 아직도 인정이 넘치는 섬

 

 3시 15분에 출발하는 도항선을 타기 위해 오전에 걸었던 곳을 다시 천천히 걷는다. 섬을 좋아하는 이생진 시인이 '그 섬에 가고 싶다'를 느릿느릿 읊조리며…. '자나깨나 섬 생각/ 섬에서도 섬 생각/ 나말고 그런 사람 있다 하기에/ 그 섬에 가고 싶다/ 휴가철에 찾아간 섬에서 눌러 살기!/ 어쩌면 제비 같고 어쩌면 구름 같다(이하 생략).'

 

 마을 초입에는 동네 청년들 몇 사람이 모여 술 한 잔 하고 있었다. 한 젊은이가 양푼에 담겨있는 열 마리 정도의 한치를 씻어 도마에 놓으면 다른 사람이 칼로 썰어 소주 안주로 먹고 있다. 그곳에 이르렀을 때 나에게 "한치 한 점 먹엉 갑서!" 하고 말을 건낸다. "괜찮수다." 하고 그곳을 넘어오는데 간곡한 말로 권하기에 못 이기는 척 하며 돌아가 한치 두 점에 소주 두 잔을 얻어 마시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 하고 돌아섰다.

 

 돌아와 그 말을 하니, 모두가 입을 촉촉 다신다.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추렴을 하드래도 한치 몇 점 먹고 왔을 것이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 파도가 심하여 거의 선실로 들어가 버리고 나와 몇 분만이 배의 고물을 지켰으나, 파도가 심해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비양도의 뒷모습을 찍지 못했다. 15분이면 돌아올 왕복 30분의 '섬 속의 섬' 비양도. 우리는 왕복 3천 원이면 다녀올 이 섬을 바쁘다고만 하면서 마냥 뒤로 미루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위)과 돌아올 때 찍은 비양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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