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 탐라순력도 (20) 모슬점부(摹瑟點簿)

김창집 2004. 5. 2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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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력도 중 '모슬점부'

 

▲ 상전벽해(桑田碧海)된 모슬진성 터

 

 탐라순력도 중의 하나인 '모슬점부'의 그림을 펼쳐놓고 보면, 대정현성을 떠난 점검자 일행이 모슬촌을 지나 반도(半島)처럼 되어있는 모슬진으로 막 진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지금의 오른쪽 바다는 축대를 쌓아 동네 어선들을 매어놓는 내항으로 사용하고, 멀리로 방파제를 둘러 많은 어선들이 접안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림에 둥그렇게 성을 둘렀던 곳은 어구 가게들과 항구식당, 부두식당 같은 식당을 비롯하여 수협 수산물 위판장이 일렬로 들어섰고, 가파도와 마라도를 연결하는 연락선 사무실도 있다.

 

 성의 흔적이라면 내항 선착장을 쌓아올린 성담으로 추측되는 돌들이 전부라고나 할까, 다른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신영물로 시작되었던 왼쪽 갯벌지대와 바닷가는 작년에 매립 사업이 끝나 말끔히 포장까지 완료된 상태다. 민간 자본을 유치해서 환경단체의 반대도 무릅쓰고 시행된 이른 바 '하모 공유 수면 매립 사업'은 약 108억 원을 투자해 2만6천여 평의 새 땅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매립지에서는 작년과 재작년 2차에 걸쳐 '최남단 모슬포 방어 축제'가 열렸고 앞으로도 이어나갈 것이라 한다. 최남단 모슬포의 생산력과 함께 '의향(義鄕)’모슬포 정신 문화의 저력을 확인하고, 참여민주주의 축제 문화를 올바르게 정착시켜 스스로 일하면서 참여하는, 새로운 시대의 축제 문화를 창출한다는 취지 아래 열린 작년 제2회 축제는 11월 14일부터 3일 동안 '풍어제'를 시작으로 '방어 이어달리기', '국제 선상 방어 낚시대회 행사'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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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슬포항 일부

 

▲ 어업 전진기지가 돼버린 모슬포

 

 모슬포(摹瑟浦)는 태평양으로 열려 있는 제주도의 서남단에 위치해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지가 되어 왔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에는 중국 침략 거점으로 알뜨르 평야에 일본 해군 항공대 비행장 설립을 계획 193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에 걸쳐 1차 공사를 하였고, 1937년에 확장 계획을 세워 기존 20만평에서 1945년까지 80만평으로 넓히며 가미가제(神風)호 조종사들의 훈련장으로 활용했다. 한편, 이곳에서 훈련받는 일본 큐슈 사세보 항공대원들의 막사로 활용하기 위해 모슬봉 앞에 오오무라(大村) 병사(兵舍)도 설립했었다.

 

 한국전쟁 때는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와 부산의 제3훈련소,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해 1951년 3월 21일 육군의 단일 신병훈련소로 육군 제1훈련소가 이곳 모슬포에 설치됐으며, 교육연대 8개 대대, 하사관학교 1개교, 교도연대 2개 연대, 미군고문관(100명)이 배치되고, 이어 지원부대인 수송대, 헌병대, 통신대, 의무대인 육군 제98병원 등이 잇따라 들어왔다. 또 6월 20일 신병 제5연대가 창설된 것을 시작으로 10월까지 6∼9연대가 증설되고 1954년 5월에는 육군 제29사단이 창설되기도 했다.
 
지금 모슬포항 중심부에 가보면 '수발(水發) 김묘생(金卯生) 공덕비'가 서 있다. "대한민국 최남단 대정읍 가파리 해협을 흔드는 거친 파도소리. 아∼ 저 소리들! 가파리에서 거친 파도에 시달리면서 살아온 그의 삶에의 숨결이리라."로 시작되는 공덕비의 내용은 동력선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멸치 잡는 방식(분기초망)과 자리돔 잡는 방식(들망)을 개발해 이곳 어민들에게 획기적으로 어획고를 올리는데 공헌한 그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폭풍주의보가 갓 끝난 부두에는 수많은 어선이 묶여있었지만, 벌써 그물을 걷어온 재빠른 어선에서는 펄떡이는 조기를 막 떼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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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발(水發) 김묘생(金卯生) 공덕비

 

▲ 모슬진을 점검하는 그림 '모슬점부'

 

 1702년(숙종 28년) 11월 13일, 사흘 동안 묵으며 네 가지 큰 행사를 치른 목사 일행은 명월진으로 떠나면서 전만호(前萬戶)인 유성서(柳星瑞)를 보내 모슬진을 점검하게 한다. 이 그림에는 대정현에서의 네 그림과는 달리 주변의 바닷가 모습과 포구, 그리고 방어시설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모슬봉의 봉수와 행어포(行魚浦)와 심포(深浦) 사이의 동산에 무수연대(茂首烟臺)도 그리고, 모슬포구 반도에 자리한 둥근 성을 두른 진영(鎭營)에는 객사(客舍)와 병고(兵庫)도 표시해 놓았다.

 

 이곳에 있던 모슬진은 동해방호소(東海防護所)를 옮긴 것이라 한다. 처음에는 강정동에 있었던 것을 장림(張琳) 목사 때 중문동 회수경으로 옮겼다가, 윤창형 목사 때 어사인 이선(李選)의 건의로 방호소를 철폐했다가 1678년(숙종 4년)에 다시 이곳 모슬포로 옮겼다. 이 날 점검한 내용으로는 조방장 오세인(吳世仁) 이하 방군(防軍)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24명과 군기(軍器) 집물(什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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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잡아 올린 붉은조기들

 

▲ 유일하게 현장이 확인되는 신영물

 

 암반에 진을 설치했기 때문에 성안에 먹을 물이 없어 성밖의 신영물(神靈水)을 길어다 마셨다는 '원대정군지'의 기록을 따라 찾아보았더니, 새 매립지로 들어가는 오른쪽 무지개다리 아래로 '오좌수행적비(吳座首行蹟碑)'가 샘터를 지키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왜구(倭寇)들이 제주도 연근해에 나타나 침탈하기 시작했는데, 고종 24년 8월에는 가파도에 가막(假幕)을 지어 왜어선 6척이 주둔하기도 했다. 이들은 주로 모슬포에 상륙하여 민가의 돼지와 닭, 또는 부녀자들을 약탈하여 갔다. 신영물은 모슬포 주민이 거의 이용하여 식수 뿐 아니라, 빨래도 하는 곳으로 부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다. 일본 어민들은 물을 길어간다는 핑계로 부녀자들을 능욕하곤 하였다.

 

 이에 이만송(李晩松)과 이흥복(李興福), 정종무(鄭宗武), 이성만(李成萬), 이성일(李成鎰) 등 다섯 젊은이가 보다 못하여 일어나 그들과 싸우다가 이만송의 머리가 잘리는 참변을 당하여야 했다. 사건이 조정에 알려지자 사망한 이만송의 아들 이평원(李平元)과 함께 싸웠던 네 사람에게 좌수(座首) 벼슬을 하사하니 이것이 '오좌수(五座首)'가 된 내력이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모슬포청년회의소에서 세운 이 오좌수 공덕비는 소설가 오성찬이 글을 짓고 김태윤이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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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물에 세워진 오좌수 행적비

 

♬ Visions - Cliff Rich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