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19) 대정강사(大靜講射)

김창집 2004. 1. 28. 16:49


 

(새로 짓기 전의 추사적거지 초가집)

 

▲ 지명으로 살펴보는 관아터

 

 대정현 관아의 소재지였던 보성·인성·안성리에 갈 때마다 이곳이 성읍민속마을처럼 옛 모습이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 그 정도는 못 되더라도 옛 건물 하나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의지해서 옛날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대정현의 네 그림을 보면, 대부분의 관아 건물은 지금의 보성리에 치우쳐 있다. 모든 그림의 가운데를 점하고 있는 홍살문은 지금 '홍사문거리'라는 지명으로 그나마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지명으로 보건대 관아는 거의 보성초등학교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자리가 '동헌터', 운동장 서남쪽이 '옥터', 학교 뒤편이 '객사골', 서문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보성리 하동 1054번지 일대의 '서뭇골', 창고는 보성리 하동 1647번지에 속칭 '창두(덕)골', 그 골목 안에 '과원골'…. 그 외로도 보성리 일대의 '사직단', '남문골' 등에서도 옛 관아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다. 

 

『남제주군의 문화유적』(남제주군·제주대학교박물관, 1996.)에 의하면 지금 남제주군 대정읍 무릉리에 있는 무릉향사(武陵鄕舍)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대정현 객사(客舍)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향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에 합작지붕이다. 기둥과 평방·창방 일부는 옛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모자란 부분은 새 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떤 연유에선지 모르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 두지 못하고 옮겨야 했던 현실이 아쉽다.

 


 

(여러 가지 비석을 모아 세워놓은 곳)

 

▲ 대정현은 충·효·열의 고장

 

 유배 온 분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그 꼿꼿한 성품을 본받아서인지 대정읍 관내에는 유난히 의사비와 효자비, 열녀비가 많다. 의사비로는 앞서 소개한 삼의사비(三義士碑)를 빼고도 구제국묘비와 김만석비가 있다. 구제국(具濟國)은 1812년 홍경래란 때, 근왕병을 창의하여 출병하기로 하고 전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출병하려던 분이고, 김만석(金萬石)은 1907년 고종(高宗)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 퇴위를 당했을 때 의병을 일으키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총살을 당한 분이다.

 

 효자비로는 문달복비, 문달민비, 현재옥비, 강인홍비, 박창진비가 있는데, 문달복(文達福)과 문달민(文達敏)은 종형제로 편모 슬하의 문달복은 어머니가 위독했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소생시킬 정도의 효자이면서 철종의 국상 때 자진하여 나아가 토역(土役)한 충신이고, 문달민 역시 부친이 위독하게 되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소생시킨 효자이다. 현재옥(玄才玉)은 부모의 공양을 남달리 잘해서, 강인홍(姜仁弘)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도 커서 할아버지를 잘 봉양해서, 박창진(朴彰振) 역시 병든 아버지에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6년간 목숨을 연명하게 한 이름난 효자들이다.            

 

 열녀비로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다 살아남아 시부모를 극진히 모신 신평리 박성림의 처 오씨(吳氏), 역시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다 병든 시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하고 죽어 장사를 지낸 후에 남편을 따른 창천리 강응주의 처 김씨(金氏)의 비를 들 수 있다.    

 


(새로 지어 지붕을 덮고 있는 추사적거지 초가집) 

 

▲ 다시 짓는 추사적거지의 초가

 

 취재를 위해 12월 14일에 다시 대정성지를 찾았을 때는 마침 추사적거지 초가 개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남제주군에서 추진하는 금년 중요 시책사업 중 미진된 사업으로 '추사적거지 초가 보수'가 들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12월 중순이어서 그런지 금년 내로 사업 완공을 위해 서두르는 흔적이 역력했다. 이 날은 나무로 틀을 세운 위에다 지붕을 덮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렸을 적 초가집을 짓는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전에 지어졌던 집은 1948년 4·3때 불타버린 것을 1984년에 추사가 적거할 당시 집주인이었던 강도순의 증손자의 고증에 따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지은 지 30년만에 다시 개축하게 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거니와 저렇게 급작스럽게 지어서야 제대로 지어질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추사적거지는 작년 4월 17일 제주도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곳이다. 철저히 고증을 한 뒤 옛 방식대로 차근차근 지으면 얼마나 좋을까? 

 

 비단 추사적거지 개축만을 놓고서 꼬집거나 탓하러 드는 건 아니다. 지금 제주도 곳곳에 벌여놓은 문화재 복원의 현장을 보면 겁부터 난다. 예산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고증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지 거의가 원형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해놓은 것을 제대로 아는 학자들이 와서 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일년에 한번 주민들이 자청해서 몰려들어 집 줄을 놓고 지붕을 덮는 일을 축제화 시키면 어떨까?  

 


 (활쏘기 광경을 그린 대정강사)

 

▲ 대정현 사원들의 활쏘기, 대정강사

 

 대정현성에서의 마지막 행사인 대정강사(大靜講射)는 11월 12일에 행해졌다. 이 날의 행사에는 대정현의 도훈장이자 대정현감을 역임했던 문영후(文榮後)를 필두로 대정현 각면의 훈장 5인과 강유(講儒,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42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정현에 소속되어 있는 교사장 5인의 인솔 아래 사원(射員) 21인이 참가하여 실력을 겨뤘다. 과녁은 홍살문 건너 남문 쪽에 세워져 있는데, 지금의 안성리사무소 북쪽에 속칭 '사장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곳이 아닌가 추정된다. 

 

 대정강사 그림을 보면 대정현성의 다른 세 그림에 없는 주변의 지명과 섬이 그려져 있다. 왼쪽에 산방산(山房山)을 위시해서 그 옆에 조그맣게 형제도(兄弟島), 단산 너머로 대정향교, 그 뒤로 송악산(松岳山)을 그리고 봉수대인 저성망(貯星望)을 표시했다. 저성망(貯星望)은 저별망(貯別望)의 오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다음에 마라도(摩羅島)와 개파도(盖波島)를 그려 표시하고, 맨 오른쪽에 모슬포(摹瑟浦)를 약식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다른 세 그림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추사적거지 옆의 나무들, 소나무와 귤나무 종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