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18) 대정양로(大靜養老)

김창집 2004. 1. 20. 21:09


 

 

(보성리 어느 골목길 안 풍경)

 

▲ 대정현 네 그림의 배경이 된 단산

 

 탐라순력도 그림 중 대정현에서 있었던 네 가지 행사의 그림에는 배경으로 단산(簞山)이 병풍처럼 그려져 있다. 그로 미루어 단산은 대정고을을 멀리서나마 감싸안은 형국이다. 그림에는 모두 파군산(破軍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주변에서는 보통 '바굼지오름'으로 부른다. 그림을 보면 단산이 '뫼 산(山)' 자의 상형문자(象形文字)처럼 그려져 있는데, 그 세 봉우리의 모습이 마치 박쥐가 날개를 편 모습 같아서 아이누족의 '박쥐'를 뜻하는 말 '바구미'에서 '바굼지오름'이 되었다는 박용후 선생의 견강부회식 해석이 있는가 하면, 바구니 같이 생겨서 바굼지오름으로 된 것 같다는 오창명 선생의 조심스런 지적도 있다.

 

 그러나, 바굼지오름은 보통의 오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단산은 주변에 있는 산방산 용암돔과 용머리 응회암층의 형성연대와 직접 대비되는 것으로, 제주화산도의 기반 형성을 유추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대지상 현무암 위에 솟아 있는 단산 응회구 및 응회환 봉우리들인데 풍화작용에 의해 무른 부분이 깎여 나갔기 때문에 골격만 남은 것이다. 북쪽에 있는 부분은 단산 응회구이고 서쪽의 나지막한 것은 금산(琴山) 응회환으로 서로 연결되어 양쪽의 응회암층이 서로 교호(交互)되어 있다. 이들의 구조는 별개의 두 화산 분출 중심지에서 형성된 것이다.

 


 

(가까이서 본 단산의 모습)

 

 여러 곳으로 오를 수 있으나 보통 단산과 금산이 이어지는 부분의 단산사(壇山寺) 옆으로 해서 능선을 따라 오르면 좋다. 첫 봉우리에는 체력 단련 시설을 해놓았고, 북쪽 바위 밑에 일제 말기에 파놓은 땅굴이 있다. 이는 일본 본토 사수작전의 하나로 행해진 '결7호 작전'에 의한 것이다. 계속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158m 최고봉을 지나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면 향교 옆 석천(石泉)이란 샘으로 가는 길이 있다. 능선으로 계속 진행하면 동쪽 봉우리까지 갈 수는 있지만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장비 없이 함부로 올라서는 안 된다.

 


 

(단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대정향교)

 

▲ 옮겨 지은 지 꼭 350년이 된 대정향교 

 

 대정향교(大靜鄕校)는 원래 조선 태종 16년(1416) 조원 목사 때 대정성 내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장소가 마땅치가 않아 북성에서 동성 밖으로 동성 밖에서 또 서성 밖으로 옮겨다니다가 효종 11년(1653) 이원진 목사 때 비로소 사계리 지경인 단산 아래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삼읍 향교 중 전학후묘(前學後廟) 즉, 앞쪽은 공부하는 명륜당 뒤쪽은 공자 이하 성인을 모시는 대성전의 형태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1971년 8월에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제주도 향교재단에서 운영한다. 대정향교는 이전 후 수 차례 중수와 개축을 하게 된다. 먼저 현종 10년(1669) 이연 목사 때 현감 조문혁이 대성전을 중수했고, 숙종 14년(1688) 목사 이희룡도 중수하였다. 그리고, 영조 28년(1772) 현감 이빈(李賓)은 명륜당과 전사청, 서재를 중건했으며, 또한 헌종 원년(1835) 목사 이장복(李長復) 때 현감 장시열(張時悅)이 대성전을 중건하였다.

 

 순조 때 현감 변경붕이 주자필을 본받아 명륜당이라는 액자를 게시하였으며, 대정 사람 훈장 강사공(姜師孔)은 이 고장에 유배 왔던 완당(阮堂)에게 청하여 의문당(疑問堂)이란 액자를 걸었다. (대정향교 건물과 세한도를 닮은 소나무) 경내에는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은 도내의 건축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1고주(一高柱) 5량(樑)집의 구조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5성(五聖)과 공문(孔門) 10철(哲), 송조 6현(宋朝六賢), 신라, 고려, 조선의 18현을 봉안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제와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강사공은 1811년(순조11)은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대성전 뜰에 심었는데, 지금은 팽나무는 거의 살아 남았는데 비해 소나무는 완당의 '세한도'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한 그루만이 치료를 받으며 힘겹게 서 있다.

 


 

(단산을 배경으로 그린 대정양로)

 

▲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푼 대정양로(大靜養老) 

 

 1702년(숙종 28년) 11월11일 대정현에서 첫밤을 보낸 목사 일행은 숙종 임금의 재혼을 축하하는 대정배전 행사를 마치고 노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이날 초대에 응한 노인은 80세 이상이 11명, 90세 이상의 노인 1명으로 도합 12명에 불과하다. 물론 인구 비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제주목에서의 80세 이상 183명, 90세 이상 23명, 100세 이상 3명에 비하면 너무 적은 편이다. 또, 정의현에서의 80세 이상 17명, 90세 이상 5명에 반수 정도밖에 안 되어 장수(長壽)를 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목사나 관찰사의 순력시 노인을 모셔놓고 잔치를 벌이는 일은 조선시대에는 관례화 되어 있었다. 역사상 유일하게 효절공(孝節公) 시호를 받은 농암 이현보 같은 사람은 맹자의 '남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섬긴다(老吾老以及人之老)'는 말을 잘 실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경상도 관찰사까지 지낸 그가 1519년 안동부사에 봉직시, 남녀귀천을 따지지 않고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모두 초청하여 성대한 양로연을 베푼 일이 있다. 이왕 차린 잔치이기에 이웃 예안현에 있는 80세 된 자신의 부모까지 모시고는 고을 원님의 신분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까지 추었는데, 이 '색동옷의 희롱'은 중국의 '노래자(老萊子)의 효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풍 '매미'가 지나간 뒤의 대정현성의 박)

 

 예나 지금이나 제주는 장수지역으로 알려져 왔다. 허정 서울대 명예교수는, "장수촌은 그 고장에서 태어나 3대, 4대까지 함께 대가족을 이뤄 외부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전통을 지키며 사는 고장으로, 어릴 때는 많이 죽을 수도 있으나 크고 나면 그 고장의 풍토에 맞게 섭생하면서 오래 사는" 그런 곳이 진짜 장수촌이라 했다. 

 

 국제자유도시를 건설하면서 장수 지역 이미지를 활용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 제주장수문화연구센터를 세웠다. 이를 잘 활용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도내 노인들의 복지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할 줄 믿는다.  

 



(대정현 거욱대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