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특집]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 답사(4)

김창집 2001. 9. 11. 18:15

지난(濟南, 제남)과 츠보(緇博, 치박)

 

2001년 6월 3일(일요일) 맑음

▲이정기(李正己), 그는 누구인가

: 중국에서도 덥기로 유명한 '4대 불화로(火爐)'의 하나이자 산둥성의 성도(省都)인 도심 인구 1,400만의 지난(濟南). 어제 저녁 이곳에 가까워질수록 더위 이전에 어디로부터인지는 몰라도 내 가슴을 달구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것도 같고 고향처럼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 것은 비단 나뿐이었을까. 좀처럼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가지고 혼자 끙끙댔다. 그렇다면 혹시 그 정체가 바로 이 땅이 고구려의 아들 이정기 장군이 나라를 세워 3대를 이으면서 58년을 이끌어 나간 곳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는지?
: 요즘 교과서 왜곡을 서슴지 않은 일본 사람들 중에는 우리 나라에 오면 꼭 자기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아버지가 이곳에 근무할 때 유년 시절을 우리 나라에서 보낸 사람의 얘기겠지. 일본 놈들은 아시아를 경영하기 위한 야욕을 갖고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36년간 우리의 인권과 주권을 마음껏 유린했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은 그렇지 않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또 흩어진 고구려 유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려고, 이들의 힘을 결집시킴으로써 이 드넓은 중국 땅 한 모퉁이에 나라를 세울 수 있던 것이다.


: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高仙芝) 장군과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선지 장군은 고국을 멸망시킨 당나라에 충성해서 자신의 영달을 꾀했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싸우다 한계를 느끼고 죽어갔지만, 이정기 장군은 적어도 패망한 조국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원수의 나라에 버젓이 나라를 세우고 고군분투한 진취적인 인물이 아닌가.
: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당나라에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패망한 조국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이들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길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결집을 위해서는 할 수 없이 힘을 길러야 했다. 이정기는 일직부터 무예를 익혀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황태자와 당시의 총신인 양국충(楊國忠)이 그에게 모반(謀反)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고 현종과의 이간을 획책하였기 때문에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켜 하북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래서 요동에 있는 평로절도부와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양쪽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정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 군대는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하여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은 틈을 이용,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 이미 고국 땅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세워 당당히 크고 있기 때문에 이정기는 요동땅에 다른 나라를 세우지는 않았다. 내심으로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본토에 또 다른 고구려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761년에는 고국의 정예군 2만 병력이 중국 산둥성에 들어오게 된다. 당시 산둥성 부근에는 고구려 패망 당시 당나라에 끌려갔던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망해 버린 줄만 알고 숨을 죽이고 살았던 유민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 이로써 유민들은 힘이 절로 솟았고, 하나로 더욱 굳게 뭉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2만의 군사는 그렇게 큰 힘은 아니었다. 당나라는 한 주에 몇 만의 병력을 갖고 있었기에 그 2만의 병력을 가지고 중국의 한복판으로 쳐들어간 것은 고구려의 정신을 다시 찾은 유민들의 단결력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이정기의 고구려 군대는 10여 만의 당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참에 이정기 장군은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 781년, 이정기는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게 된다. 대운하는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과 장안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그가 점령해 버렸으니,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장안을 향하여 20만 대군으로 총 진격을 개시한다.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며 변주의 20만 군대를 고립시키고 낙양으로 진격하던 중,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둔 채 4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고, 장수를 잃고 힘을 잃은 그의 군대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다음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李納)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정기 장군이 죽음을 맞은 지 한 달도 채 안 돼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는 바람에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게 된다. 성격이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님이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둔 배 3천여 척이 가을 장마에 떠내려 가 버려,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되기에 이른다.
: 이납은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아 제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41세로 단명하였다. 그 뒤를 이어 다시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제위에 올라 부국강병책을 씀으로써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재위 14년 만인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이복 동생인 이사도(李師道)가 자리를 잇는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로 부인이 중국인 위씨(魏氏)인데,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친척들을 데려다 요직에 앉혀놓고 이사도의 말년에는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였다.


: 이사도는 당 헌종이 제(齊)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준비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이라는 150칸이나 되는 큰 창고의 200만 섬의 군량미를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낙양성을 기습하여 궁궐을 불사른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 제국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국 공격을 명하였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의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사라졌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 지 58년만에 끝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뒤를 잇게 된 것이 장보고 대사인 셈이다. 장보고 대사는 이정기 장군이 실패를 교훈으로 이곳에 나라를 세우는 일은 단념하고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무대로 동부 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상의 왕이 되었다. 중국천하를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리라.

△중호대주점(中豪大酒店)에서 맞은 지난(濟南)의 아침

: 중국에서 왜 호텔을 대주점(大酒店)이라 하는지는 10여 년 전부터 품어왔던 의문이었다. 그런데, 지난시 중심지 해방로에 자리한 홍콩 쌍둥이별 호텔 그룹에서 운영하는 343객실을 가진 이 중호대주점에서 그 문제의 단서를 발견하였다. 호텔 안내 책자를 보니, 가장 공을 들여 선전한 부분이 '복원주가(福苑酒家)'라는 미식(美食)을 정선한 중국음식을 위주로 양식과 바를 겸한 식당이다. 선전에 따르면 나이트 클럽이나 가라오케, 그 외 부대시설도 술을 마시고 즐기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긴 제일 중요한 돈벌이가 먹고 마시는 것에서 나오니까.
: 호텔 뷔페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일요일 아침을 맞는 거리 풍경을 살피기 위해 호텔 앞 거리로 나섰다. 양쪽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으로 비교적 넓은 자전거 도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도시 전체가 대부분 평지로 되어 있어 자전거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오랜만에 천으로 두 대를 이어놓은 시내버스와 2층 버스를 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타고 가는 자전거도 가지각색이고, 그것을 탄 사람들의 패션도 가지가지다. 여인들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바람결에 부끄러운 부분이 드러날까 봐 얇은 천으로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이 애교스럽다.


: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은 황하의 남쪽, 태산의 북서쪽에 있으며 물이 풍부한 대도시이자 철도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옛날 춘추전국시대에는 낙읍(落邑)이라 불렀고, 제나라 서울로 번영했었다. 한대에 들어와서는 제수 남쪽에 위치한데서 제남(濟南)이라 불렀으며 물이 풍부한 곳이라 또 다른 이름을 천성(泉城)이라고도 했다. 시가의 동부는 명대(明代)에 건설된 내성(內城)을 중심으로 하는 공원·대학 등이 있는 문화지구이고, 서부는 상업지구이며, 그 남쪽이 주택지구, 선로의 북쪽은 공업지구이다. 방직·제분·착유·제지 등의 경공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오늘날은 공작기계·자동차·시멘트·화학 등 중공업이 발달하였는데, 교통의 요지로 산둥성 서부 농산물 집산지이기도 하다.
: 이번에 중국 산둥성에 오게 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세 가지를 기대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 4대 문화 발상지의 하나인 도도한 물줄기 황하 유역을 돌아보는 것과 또 하나는 우리 나라 조선 전기의 문인이며,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에 나오는 세계 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는 태산, 그리고 공자의 탄생지로서 유명한 취푸(曲阜, 곡부)의 공자 고택(故宅)에 주나라 때 세워진 커다란 문묘(文廟)와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을 보는 꿈이었다.


: 사실 이 세 가지는 이곳 지난에서 하루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다. 황하(黃河)는 이곳에서 차를 타고 북으로 30분 정도 달리면 볼 수 있다 한다. 비록 강 양쪽에는 제방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 흐름은 글자 그대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황색 탁류의 웅대한 경관일 테니까. 강둑 사이의 폭은 약 500m 전후이고, 넓은 곳은 폭 1㎞ 되는 물줄기에 1982년에 완공되었다는 길이 2.4㎞의 황하대교(黃河大橋)의 위용을 못 보는 것이 못내 아쉽다.
: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인 태산은 다이중[岱宗]·타이웨[太岳]라고도 부르며 비록 높이는 1,532m에 지나지 않지만 5악(五岳)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서, 도가(道家)의 설(說)에 따라 제왕이 된 사람은 산꼭대기와 산기슭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행할 만큼 중국 역사상 의미가 있는 산이다. 산꼭대기에는 태산부군(泰山府君)의 딸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옥황묘(玉皇廟)가 있고, 매년 3월에 열리는 묘회(廟會)에는 전국에서 수십만의 참배자들이 몰려든다.


: 춘추시대에 노(魯)나라의 도성이었으며, 세계 4대 성인의 하나인 공자의 고향인 취푸는 이래저래 관심을 끄는 곳 중의 하나이다. 유적인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등이 있고 유교의 발상지인 이곳은 과거 우리 나라 사신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곳이엇으니까. 그리고, 동양의 고전이나 유교에 대한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리라. 하지만 이번 답사는 단순히 관광이 아닌 장보고 대사의 자취를 찾아보는 주제가 명백히 정해진 행사이기에 주최측에 누(累)가 되는 요구는 않는 게 예의라는 생각으로 다음을 기약하지 않을 수 없다.

△따밍후(大明湖)-- 지난의 역사를 말해주는 공원

: 지난이 자랑하는 따밍후는 호텔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 도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원 면적 86ha, 호수 면적 46ha에 울창한 숲과 화초와 물이 일구어낸 자연미와 정자, 누각 등의 인공미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하고 있었다. 표돌천·천불산과 더불어 제남의 3대 명승지로 알려진 만큼 따밍후는 샘의 도시 지난의 100여 군데 샘에서 흘러 넘치는 물이 한데 모여 이루어진 도시의 핵인 셈이다.
: 성문처럼 되어 있는 입구에 들어서니 눈앞에 황금색이 묻어나는 글이 촘촘히 새겨진 커다란 향로 하나가 떡 버티고 서서 대국 특유의 위압감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호수 바닥은 화성암으로 되어 있어 장마에도 물이 불지 않고 가뭄에도 고갈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양버들이 늘어지고 삼면에 연꽃이 마음놓고 자라는 6개의 섬을 거느린 호수이자 전체가 공원으로 시민들의 안식가 된다. 누가 지은 글인지 '四面蓮花三面柳(사방엔 연꽃, 삼 면엔 버들) /山色半城湖(온 성이 산빛, 성의 반은 호수)'이란 시구가 잘 말해 주듯 모든 게 잘 조화된 공원이다.


: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이 곳을 찾았던 유명한 시인 묵객들의 비갈(碑碣)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청나라 하소기가 쓴 두보의 시구와 철보서 대련(對聯), 하소기, 옹방강 등의 글이나 필적이 남아 있어 격조 있는 문화와 높은 예술 수준을 느낄 수 있다. 공원의 주요 볼거리로는 패방, 하원, 가헌사, 철공사, 역하정, 북극묘, 남풍사, 회파루 같은 누각이나 정자와 이곳에서 해마다 갖는 설맞이 문화 축제라든지 민속 문화 행사 등 많다.
: 왼쪽으로 돌아 연꽃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기석(奇石) 전시관이 있어 들어가 보니, 넓은 땅 중국 각처에서 모은 수석과 괴석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석도 적산 법화원 앞에 있는 '세렴아석관(世廉雅石館)'의 것보다는 훨씬 대작이 많았고, 아예 동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종류석이나 석주들이 있었다. 짧은 시간에 15위안의 본전을 뽑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고 감상을 하는데, 좋은 돌이 많았으나 옅은 구름 속에 은은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드러난 수석이 내 눈길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혼이 났다.


: 호수 가운데에 있는 역하정(歷下亭)은 이름난 해우고정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가 서기 745년에 이곳에서 서예가 이옹(李邕)과 함께 연회를 베풀다가 읊은 '海右此亭古(바다 오른쪽엔 옛 정자 많고) /濟南名士多(제남에는 명사가 많네)'로 중국 천지에 알려져 이름 있는 곳이 되었다. 또, 남풍사는 이곳 출신 송나라 문인이며 당송8대가 중 한 사람인 증공을 기려 세운 것이다. 그는 강서 남풍 출신으로 1072년 이곳의 지주로 있을 때 북수문을 수리하여 대명호의 수환(水患)을 처리하고 민심을 얻기도 했다.
: 그러나 유심히 수면을 바라보니 이곳 따밍후도 역시 도시 문명의 후유증을 앓아 호수의 반이 녹조로 덮여 있었다. 예로부터 뱀이 살지 않고 울던 개구리도 이곳에 오면 울지 않는다는, 또 울지 않던 개구리도 이곳을 뜨면 운다는 이 신비한 호수에도 서서히 문명의 바람이 들이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지각없는 사람들이 있고, 하수도 정책이 도시 발전 속도를 따라주지 못하는 결과이리라. 이런 제남시의 보물이 냄새를 풍겨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코를 막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정문을 나섰다.

△표돌천(足勺突泉) 공원의 샘물과 경극(京劇)

: 표돌천은 지난에서 가장 유명한 샘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녹수(洛水)라고 이름하여 옛날부터 지난 72천의 으뜸이고, 천하 제일의 샘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송(宋)나라 때 세워진 녹원당(洛原堂)의 남쪽에 있는 것은 지금도 매초 1600ℓ의 샘물이 솟아 나온다. 표돌천을 중심으로 동전의 뜸과 가라앉음으로 점을 치기도 하는 수옥천(漱玉泉)과 그외의 마표천(馬足勺泉) 등 16개의 샘과 명·청 때의 고건축, 회랑 등이 모여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원내에는 북송(北宋) 말기의 여류시인 리칭자오(李淸照)의 기념당도 있다.
: 이와 더불어 옆에 자리한 흑호천(黑虎泉) 공원도 유명한데, 세 개의 호랑이 머리 모양이 새겨진 샘의 구멍에서 밤낮으로 물이 뿜어 나온다. 물도 좋지만 주변을 운하처럼 다듬어 가로수를 세우고 아치형 다리를 올려 노 젓는 배를 띄운 것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짧은 거리지만 마치 이탈리아의 수상도시를 지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 고원은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버드나무와 먹구슬나무가 늘어져 있었는데, 한 샘은 가뭄 때문인지 물이 줄어 풀이 솟아나 있고 고기가 있었으나 기름기가 떠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개인이 조성해 놓은 정원이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나무들은 비록 화려하진 아니나 비교적 잘 가꾸어진 아담한 정원이다. 긴 회랑을 따라 그림이 걸려 있고 한 쪽에는 분재를 모아 분위기를 돋군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오면서 샘을 들렀다. 한참 물이 많을 때는 분수처럼 위로 솟아오른다 하나 지금은 수량이 많이 줄었다.
: 그러나 이곳 저곳에 크고 작은 샘이 여럿 있어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고, 수옥천 말고도 동전을 집어넣어 길흉을 점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금붕어나 비단잉어를 기르는 데도 있다. 또 한 곳을 가보았더니, 잘 다듬고 지붕까지 지어놓은 오래된 우물이 있었는데, 더러워진 물만 고여 있다. 밖으로 나오는데, 역시 더위가 엄습하기 시작한다.


: 표돌천 곳곳에는 사람 키의 거의 배나 되는 대형으로 만든 탈이 세워져 있다. 나중에 알아보았더니, 이곳에서 정기 공연되고 있는 경극(京劇)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가면(假面)으로 그 밑에 각각 이름이 적히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경극(京劇)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 연극으로 일찌기 베이징[北京]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경극이라고 하며, 서피(西皮)·이황(二黃) 2가지의 곡조를 기초로 했으므로 피황희(皮黃戱)라고도 한다.
: 경극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원나라 때의 잡극인 원곡(元曲)의 뒤를 이어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걸친 300년 동안은 쑤저우[蘇州] 곤산(崑山)에서 일어난 곤곡(崑曲)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왕후·귀족의 위안물이 되고 형식에 치우쳐 쇠퇴하게 되자 18세기 중엽(청나라 중기)에는 많은 지방극이 앞 다투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무렵 안후이성·후베이성 등 양쯔강 연안지방에 남곡(南曲)의 익양강(陽腔) 계통을 이은 이황조(二黃調)가 성행하여, 안후이성의 여자역 남자배우 고낭정(高朗亭)의 일단과 함께 베이징에 들어왔다.


: 다른 많은 전통 극종과 마찬가지로 노래·대사·동작·액션 등으로 구성되는 형식연극으로, 노래가 중시되고 무용에 가까운 동작은 격렬하면서도 아름답다. 호궁과 징·북을 중심으로 한 반주의 선율과 리듬이 극의 기조를 이룬다. 상연되는 각본은 모두 피황조에 의거한 구성·문체·시형이며, 현존하는 1,000여 종은 대부분이 작자미상이다. 대개는 사전(史傳) 소설과 전설에서 소재를 따거나 원곡과 전기(傳奇)를 개작한 것으로, <수호전>, <삼국지연의> 등의 부분 각색이 적지 않다. 대표작으로 <추강(秋江)>, <손오공>, <타어살가(打魚殺家)>, <사진사(四進士)>, <우주봉(宇宙峰)>, <패왕별희(覇王別姬)>, <귀비취주(貴妃醉酒)>, <안탕산(雁蕩山)> 등이 있다. 모두 1시간 내외의 짧은 연극으로 연출과 연기 모두 지극히 서사적인 표현양식을 쓰고, 장치도 없이 상징적인 연기형식에 의하여 상황이나 행동을 나타낸다.
: 의상은 명(明)나라 때의 복장을 기초로 한 초시대적인 전통극 고유의 것이며, 색과 무늬에 따라 인물의 신분과 직업 등을 알 수 있다. 배역은 크게 생(生:주역), 단(旦:여자역), 정(淨:호걸·악한), 축(丑:어릿광대), 말(末:단역)으로 나뉘고, 각기 문무(文武)의 2계통 이외에 다시 세분화된다. 정과 축은 배우의 얼굴에 물감으로 선을 그리는데, 역사상 유명한 얼굴의 선을 그리는 형식은 정해져 있다. 노래·대사·춤·액션 등 어느 것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배역에 따라 결정되며, 배우는 어릴 때부터 소질에 따라 전문적 배역을 익힌다.


: 중공정권수립 후에는 새로 설립된 중국희곡연구원·중국경극단 등을 중심으로 '백화제방(百花齊放)', '추진출신(推陳出新)'의 기치에 따라 극 내용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봉건적인 내용을 추방하고 국민의 창조에 의한 것을 발굴한다는 각도에서 고전상연목록의 정리개편이 적극 행해졌으나, 경극무대에서 현대인과 현대인의 생활을 표현하는 일은 극도로 세련된 격조 높은 형식으로 보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958년경 소위 '대약진운동' 때 현대화의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론과 신중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4년 베이징에서 열린 현대경극 경연대회를 계기로 현대경극은 중국의 문화계를 석권하여 예술의 새로운 선구자가 되었다.
: 인민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내용과 등장인물의 현대화에 따라 상징적인 스타일이 줄어드는 대신 연기는 사실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가사에는 고전적인 격조가 남아 있으나 대화는 알기 쉬운 현대 표준구어(標準口語)이다. 대개 2∼3시간의 장편이며 극적 요소가 강하여 자연히 대화 부분도 많아졌으나 노래나 무용적인 동작, 화려한 액션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문화혁명에 의한 경극의 변질은 전통을 상실하게 하였으나, 80년대 이후 그 고유 형태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 산둥성 박물관과 우리 유물과 닮은 꼴 찾기

: 그날은 칭따오까지 가야 하는 바쁜 일정이어서 우리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이번 우리들의 견학에는 산둥성 박물관 부관장님이 특별히 우리들에게 박물관을 소개해 주기로 되어 있어 시간에 맞춰 도착해 보니, 정문 입간판에다 그들이 좋아하는 붉은색 바탕에 노랑 글씨로 '열렬히 환영한다'는 글을 붙여 놓았다. 이 박물관은 1954년에 개관했는데, 1992년 10월에 유명한 천불산 아래 위치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관은 비교적 높게 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태산(泰山) 사진이 걸려 있는 곳에서 가이드 윤 선생의 통역으로 부관장의 이야기를 대충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 이곳 지난은 중국 산둥성의 성도(省都)로 황허강[黃河]의 하류이자 샤오칭강[小淸河] 남안에 위치해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이곳에 인류의 거주가 시작되어 춘추전국시대에는 제(齊)나라 서부의 도시로 번영하였고, 한대(漢代)에 와서 도시 북쪽에 지수이강[齊水]이 흐르고 있다고 해서 지난이라 하였다. 이후 수(隋)·당(唐)·원(元)·송(宋)·명(明)·청(淸) 등의 시대를 통해서 번영하였다. 따라서, 이곳 박물관에는 신석기 시대 이후 중국 역대 유물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다.


: 산둥성박물관에는 전성(全省)에 걸쳐 있는 문물(文物)은 물론, 자연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들의 표본을 중심으로 전시했다는 것으로 보아 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을 합쳐 놓은 형태이다. 박물관의 소장하고 있는 문물 21만 건은 전체 산둥성 유물의 3분의 1에 해당되며, 그 중 국보급이 3건, 급장품(級藏品)이라 하여 우리 나라로 치면 보물이나 지방문화재급이 1,388건, 장서 12만 권이 소장되어 있는데, 유물로는 중국에서 7위, 급장품으로는 4위의 규모라 한다.
: 전시는 역사시대 이후의 것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이 산둥성박물관이 자랑하고 있는 소장품은 선사시대 4∼50만년전 원인(猿人)의 두개골과 어금니 화석을 비롯하여, 신석기 시대 유물, 아름다운 채색 도기와 백도기·흑도기들, 5천여년 전 상대(商代)의 뼈나 향로 등에 새긴 갑골문(이 갑골문은 전국에서 제일 많음), 박물관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병추동월( 醜銅鉞, 못난이구리도끼), 지금부터 약 2,700∼2,400년을 오르내리는 춘추시대의 구리그릇들, 당나라시대의 자기병들, 원나라 때의 자기류와 명·청대의 옥제품들까지 실로 다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주마간산격으로 관람을 하면서도 우리 것과 비슷한 것이 나오면, 혹시하고 돌아서서 다시 살펴보았다. 지난 3월 서울대 신용하 교수가 발표한 글 중에서 '고조선 영역은 산둥반도까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대목이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신 교수가 '한국학보' 봄호에 '산둥성 출토 토기 문양으로 보아 고조선 도읍지인 '아사달' 아니었을까' 하는 문제 제기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 1961년 중국 산동성 황하유역의 선사유적지 능양하를 발굴하던 중국 고고학자들은 알쏭달쏭한 문양이 새겨진 팽이꼴 토기를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높이 57cm의 토기 상단에는 특이한 문양이 있었다. 왜 이런 문양을 새겼을까. 궁리 끝에 학자들은 이곳이 청동기시대 고대중국문명의 터전인 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지이자 갑골문자를 고안한 은나라 문화기반임에 착안해 토기문양을 한자 원형으로 점찍었다.


: 그러나 이런 문양의 의미는 기존 한자 체계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토기모양도 다른 지역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난점이 남았다. 산동성 능양하 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 특유의 팽이형 토기. 신용하 교수가 아사달 문양으로 추정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민족기원사 연구에 천착해온 신 교수는 최근 이와 관련해 이 능양하 토기의 문양이 바로 고조선의 도읍지로 기록에 언급된 아사달을 뜻한다는 이색견해를 제기한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그는 고조선 산동 진출설을 주장한 신채호 선생의 주장을 연계시켜 동이는 고조선 후 국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신 교수는 이전부터 여러 논문에서 한·맥·예 3부족 연맹으로 성립한 고조선이 만주, 중원에 후국을 거느린 거대문명권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한국학보의 글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 그 동안 주류 사학계에서는 신 교수 주장에 대해 고고학적 논증이 미흡하고, 지나치게 민족중심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러나 산동고대문화의 주역인 동이족 실체에 대해서는 억측 또는 무관심의 극단적 태도가 엇갈려왔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성찰의 여지를 남긴다. 팽이형 토기 양식 논란을 주류학계가 정밀한 검토 없이 사실상 묵살해왔다는 점에서도 중국지역의 고조선 문화연구의 허술함을 겨냥한 신 교수의 주장은 일단 검증하고 재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 제나라 역사 박물관과 순마갱

: 츠보(緇博, 치박)로 가는 길 양쪽에는 밀이 누렇게 익어 수확하는 광경을 이곳저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 시골 풍경과 다른 점은 산이 별로 없고 넓은 벌판이 계속된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어떻든 우리 나라 농촌과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 츠보는 중국 환 발해지구의 독특한 풍격을 지닌 공업 도시로서 국무원에서 지정한 산둥반도 연해개방도시로 도자기와 실크가 유명하다. 츠보시는 산둥성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셈인데, 기후는 난온대이고 우리 나라처럼 4계절이 분명하다고 되어 있다.
: 제나라 역사박물관은 츠보시 임치구 '제도진' 정부소재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제나라 고성(古城)의 궁성(宮城) 유적지 동부에 제나라 고성유적지박물관의 문물 진열관을 기초로 해서 새로 지은 건물이다. 또한 제나라 고성의 대성과 소성이 연접한 특수한 형태를 모방했는데, 외각이 옛 성의 그림과 같다. 우리 제주시에도 목관아지를 복원하면서 <탐라순력도> 같은 그림을 참조로 재현시키고 있다. 다양성, 생동성, 형상성을 높이는 진열 형식을 따랐다는데, 주 진열품으로는 제나라 역사를 위주로 한 시대 순서로 선제시기와 후제시기로 나누었다. 이 두 시기를 중심으로 서주·춘추·전국 3시기를 표현하였는데, 마지막이 진·한 시기로 되어 있다.


: 전체 15개 진열실은 서관(序館)·용산문화실·환관패총실(桓管覇叢室)·소악실(韶樂室)·무위실(武威室)·성곽청·직하청·과학기술청·화우진청(火牛陳廳)·예속청(禮俗廳) 등이다. 진열된 문물은 약 300여 종인데, 이 박물관은 제나라 800여 년의 휘황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반영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하(華夏) 문화상의 제나라 문화의 중요한 지위를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 제(齊)나라는 중국 전국시대의 7웅국(七雄國)의 하나로 진(陳)나라에서 제나라로 망명한 대부 전씨(大夫田氏)가 BC 5세기의 전걸(田乞)·전상(田常) 부자(父子) 시대에 점차 제나라의 실권을 잡고, BC 391년에 전화(田和:전상의 증손)가 주왕으로부터 정식으로 제후로서 인정을 받아 성립된 나라이다. 본래의 제(齊:姜齊)와 구별하여 전제(田齊)라고 한다. 제나라의 영역은 산이나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고 도읍지인 임치(臨淄)는 대상업도시로서 번창하였다. 특히 위왕(威王)·선왕(宣王) 시대가 전성기였으며, 타국으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직문(稷門)에서의 토론은 '직하(稷下)의 학'이라 하여 유명하다. 이웃나라인 연(燕)·위(魏)와 대립·교전하였으나 BC 3세기말에 서쪽으로부터 진(秦)나라 통일의 손길이 뻗쳐서 BC 221년 마침내 진에 항복하였다.


: 제경공순마갱(齊景公殉馬坑)은 제나라 고성 동북부에 위치한 임치구 제도진 '하령두촌'에 위치해 있어 시골길을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밀밭 사이사이로 채소밭이나 비닐하우스가 보여 눈길을 끈다. 그러나, 경지 정리가 되어 있어 우리 나라처럼 꼬불꼬불한 시골길은 보이질 않는다. 우리는 어제 이미 지난으로 가는 도중에 고차박물관에서 순마(殉馬)를 봤기 때문에 크게 기대는 않으면서도 그 규모를 생각하며 각기 다른 상상을 하였다.
: 나무가 우거진 마을이 나타나고, 이 가뭄에도 수로에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우물을 파다가 발견했다는 이 순마갱은 춘추시기의 제나라 공후(公侯)의 20여 개의 묘군 중 5호분이다. 설명을 듣고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보니 남북의 길이 26m, 동서 너비 23m되는 갱에 말 뼈다귀가 포개지듯 두 줄로 나란히 드러나 있다. 1964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앞뒤로 84m를 발굴하였는데, 순마 228필이 발굴되었다는 설명이다.


: 이 말들은 전쟁시 사용하던 말로 모두 수말이며, <좌전(左傳)> 노양공(魯襄公) 25년의 '최씨측장공우북곽(崔氏側庄公于北郭)'의 기록에 의하면, 이 묘지는 춘추시기 제나라 국군(國君) 제경공의 묘인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105필의 순마를 전시하고 있는데, 모두가 순간적으로 쇼크사 시킨 다음 차례차례 묻었다는 얘기다. 순마갱 전체의 길이와 현재 발굴된 말의 밀도로 계산하면 이곳에는 원래 600여 마리의 말이 묻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규모가 이처럼 큰 순마갱을 보면서 당시 제나라가 얼마나 강성하며, 사치했는가를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또, 한편으로는 저 세상에까지 자신이 타던 말을 가지고 가서 부려보겠다던 당시 엘리트들의 사고(思考)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 위는 따밍후의 버드나무이고, 아래는 제나라역사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