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특집]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지 답사기(1)

김창집 2001. 9. 11. 18:21

 * 법화원에 있는 장보고 영정 

△ 웨이하이(威海)를 향해 인천항을 떠나면서

  2001. 5. 31. 목요일. 18:00.


 올 스텐바이(All standby)!


 파나마 선적의 위동 훼리 화객선(貨客船, 화물과 짐을 싣는 배) '뉴 골든 브리지Ⅱ'가 고동 소리도 없이 예인선의 부축을 받으며, 슬며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선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누구랄 것 없이 모두 갑판 위로 뛰쳐나왔다. 이제 황해바다 망망대해를 건너는 18시간의 긴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은 해상왕 장보고를 기려 그 날짜를 정했다는 뜻 깊은 제6회 '바다의 날'. 서쪽 하늘에 지는 해가 장도(壯途)를 축복이나 하는 듯 더욱 빨갛게 타오르고, 동쪽 하늘 위로 윤4월 초열흘 달이 수줍게 배웅한다.


 예인선은 천천히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육중한 배를 갑문식 독으로 인도한다. 낮에 공식 모임이 끝나고 해양수산부에서 특별히 이번 답사에 참가한 선생님들을 2대의 버스에 나누어 태우고 인천항 이곳 저곳을 견학시켰는데, 갑문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 간만의 차가 심한 이곳 인천항의 물높이를 유지시키면서 내수 면적 276만㎡나 되는 1종항을 다스리는 시설인 셈이다.


 이곳에 항만 건설을 착수한 것은 1906년이라 했다. 그러나 상업항으로의 개항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종지부를 찍은 뒤인 1883년(고종20) 1월 1일이었다. 부산·원산항에 이어 한국에서는 3번째로 개항을 보게 된 인천항은 조선 전기에는 제물포(濟物浦)라고 호칭되면서 당시 한국 유일의 군항(軍港)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884부터 1911년까지 민자 또는 정부 투자로 인천항 개발 사업을 시행하였으나 보통 설비만으로는 조석간만의 극심한 차 대문에 하역 작업하기가 곤란하여 전천후 하역 작업이 가능한 항만시설이 요구되었으므로, 다시 1911년부터 10개년 계획 사업으로 제1독[dock]이 축조되었다. 그 후 1974년에 총공사비 149억 원을 투입,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거(閘渠)를 축조하고 묵은 항로를 없애 기존 제1독을 포함한 인천내항 전체를 선거화한 공사가 완공됨으로써 5만t급 1기, 1만t급 1기의 초현대식 갑문이 건설되어 5만t급을 비롯하여 대형 선박 30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배가 독을 벗어나 정상적인 속도로 항해를 시작하자 희끄무레한 안개와 구름 때문에 사방을 조망하기 힘들어 모두들 선실로 들어갔다. 오늘 출발하여 6월 5일까지 5박6일 동안 해상왕 장보고의 자취를 찾아 중국의 산둥반도를 돌게 되는 제1차 답사 행사는 (재)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하고 해양수산부가 후원하며, 위동항운 유한공사와 (주)지학사가 협찬하는 행사이다. 이번 답사단은 전국 초·중·고 선생님 67명과 인솔 교수, 주최측 재단과 동아일보 기자단, 해양수산부 담당자와 추천 인사, 그리고 안내와 진행을 담당한 여행사 '굿모닝차이나' 직원을 합쳐 83명의 대식구가 되는 셈이다.

 * 법화원에서 본 앞 산의 능선(누워있는 사람 얼굴의 모습이라 한다.) 

 

▲ '장 보고' 가는 '재당 신라인'의 후예들

 들어가면서 유심히 보니, 선실 복도와 휴게실 같은 빈자리는 검은 보따리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 그 주인들은 벌써 자리를 잡아 라면이나 김밥으로 저녁 식사를 때우는가 하면, 벌써 술자리나 고스톱 판을 벌인 축들도 있다. 내가 중국과 우리 나라가 수교하기 직전인 1992년 7월 29일, 제주도교육청 중국답사반의 일원으로 바로 이 항로를 거쳤는데, 그 때는 우리 나라에 돈 벌러 들어왔다 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지고 가는 물품도 가전제품이나, 옷, 라면 등 내용물이 드러났었는데, 지금은 무엇이 들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듣기에 이 보따리 장사들이 인천과 웨이하이(威海) 사이의 항로를 유지시켜주는 단골 고객이라 한다. 한 때는 중국에 사는 동포뿐만 아니라 본국 사람들까지 나서서 "우리가 살길은 해외시장 개척뿐이다"라는 주위의 부추김에 무턱대고 이 길로 들어섰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사실 수억의 중국 시장에 라면 1개씩만 팔아도 장사가 될 것 같은 섣부른 계산 때문에 기존 소비 라인을 갖고 있는 현지인들을 당할 수가 없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제통화기금체제 이후 중국 시장을 대상으로 한 보따리 무역이 연간 10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조사를 보면 현재 한중간 보따리 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IMF 이전에 비해 배 이상 늘어난 2,0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국적별로는 한국인이 56.1%, 대만인 36.3%, 중국인 7.2%, 기타 0.4%. 보따리 무역의 주거래 품목은 의류와 원단이 80%로 가장 많고 그밖에 화장품(5%) 및 문구류, 투자기업의 원부자재 및 샘플, 일부 가전제품 같은 것으로 조사됐다.


 보따리 무역 종사자의 60∼70%는 청도(靑島) 지역과 거래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대련, 단동 등과 거래한다. 보따리 무역 종사자는 꽁떠우(工斗)라고 불리우는 중간책과 이들로부터 위탁을 받아 상품 운반을 전담하는 따이꽁(帶工)으로 분류된다. 이 같은 꽁떠우와 따이꽁 등 전문 보따리상 외에 최근 한국의 여행사에서 모집을 해 20∼40명씩 단체로 중국에 들어가거나 개별적으로 보따리 무역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보따리 무역 제품이 대부분 남대문과 동대문 등의 도매시장이나 재고 처리 물건이 대부분으로 한국 제품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소비자들도 이제는 재고 물량임을 알아보고 구매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의류제품의 경우 중저급 제품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침체 상태에 있는 중국시장 내에서 보따리 무역상들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가격도 급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현지에서 5,000원에 팔리는 상품을 중국에서 50위안에 파는 정도로는 마진이 거의 없으며 환차 정도의 이익만 보는 상태라는데 애로가 있다.


 사실 해상왕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기의 재당 신라인들이 동북아권의 물류를 장악하고 그것을 중계하는 규모였다면, 지금 이 후예들은 두 나라에서 남아도는 물건들을 가지고 조금의 이익을 보려는 얄팍한 상술에 다름 아니다. 다 먹고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수준이 아닌가. 해상왕 장보고 같은 인물이 등장해서 각처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규합하여, 그 힘으로 점차 세계의 무역을 리드해 가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 지난에 있는 따밍후

 

▲ 지금 우리가 장보고를 찾아가는 이유

 들어와 TV를 켜니, 마침 뉴스 시간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꽤 멀어졌는지 화면이 떨리며 점점 흐려지고 있었는데, 마침 김대중 대통령의 '바다의 날' 연설 요지가 흘러나온다. 전남 여수 오동도에서 열린 제6회 바다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김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선박 금융 제도를 확충해 국적선의 증가와 선박의 질적 향상을 실현함으로써 2005년에는 세계 5위의 해운 강국으로 도약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해설자가 나와서 "한국의 여수시가 2010년 세계 해양 박람회를 신청했는데, 여야를 막론하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유치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와 함께 중국·러시아·아르헨티나가 신청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만약 유치가 될 경우 올림픽 이상 가는 고용 창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1985년 일본 쓰쿠바 세계해양박람회의 경우, 관광객만 수백만 명에 이르고, 해양 관광 분야를 포함해 여러 직종에서 5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돼 오늘날 일본이 해양 관광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다. 글쎄. 이 계획이 꿈으로 끝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회의실에서 선상 세미나가 있다는 방송이 있어 가보니, 세계일보 편집국 인터넷 팀장인 황상석 교수님의 '장보고가 해상왕으로 재평가되고 있다'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기와 1990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가 비슷한 시기'라고 전제한 후, 그 이유를 '①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공무역 중심에서 벗어나 민간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인 점', '② 세계화의 원조 장보고가 활약했던 시대 정신과 지금의 시대정신이 같은 점', '③ 발해와 통일신라가 대립하던 시기엔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남한과 북한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린다. 특히 우리가 처한 난관을 극복하고 경제 우위에 살아가려면 장보고 대사로부터 한 수 배워야 한다. 그의 삶에는 강대국인 중국, 일본과 어울려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비결이 숨겨져 있다. 현재 우리 나라 동포는 142개국에 널리 퍼져 있다. 이미 우리 선조인 재당 신라인들은 중국, 백제와 가야 유민들은 일본의 경제권을 장악한 세력이다.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동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 나라 언어와 생활 문화에 익숙해 있는 그들을 통해 우리가 그곳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덧붙여, '그러기 위해서는 장보고가 활동했던 그 시기의 성공비결을 찾아내야 한다. 세계로 진출해 성공한 나라는 바다로 진출한 나라였다.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으로 옮겨 그곳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의 무역을 중계하고 받아들였듯이, 오늘의 좋은 호기(好機)를 오른쪽에 중국, 왼쪽에 일본을 껴안는다면 앞으로 또 한번의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눈치다.


 낮에 인천해양수산청 대회의실에서 있었던 세미나에서 인솔 교수인 윤명철 동국대 교수도 '장보고란 누구인가'라는 강의에서 '재당 신라인과 재왜 동포들을 장악한 정치적 수완과 상인적 능력을 가진 장보고 세력은 모든 시스템을 장악할 수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과거 황해는 얼어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트이었다. 앞으로는 해양 중심의 세계가 온다. 이에 우리는 오늘 해상왕 장보고의 궤적을 찾아보고 그의 정신을 본받아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 산둥반도에서 해를 맞는 천진두

 

▲ 재당 신라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바다를 건넜을까

 12시 가까워서 잠을 자려고 누워 눈을 감아보았지만 쉽게 잠이 올 리 없었다. 주위 환경이 바뀐 탓도 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여행을 좋아하는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사실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만 나는 순전히 여행 체질인 것 같다. 아프다가도 차나 배나 비행기만 타면 씻은 듯이 나아버린다. 그리고, 서너 달만 섬 밖으로 안 나가면 여기저기 쑤시고 고인 물처럼 남보다 뒤쳐지는 것 같아 답답하다. 이른바 역마살(驛馬殺)을 타고난 것일까.


 아래 층 침대의 선생님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기어 밖으로 나왔다. 달은 어슴푸레 안개 속에서 빛나고 별은 북두칠성만이 그 윤곽을 가늠할 수 있었다. 배가 일으키는 하얀 물살을 바라보며 재당 신라인들이 고국을 출발해 미지의 땅으로 가기 위해 이 바다를 건너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곰곰 상상해 본다. 오늘 내가 가는 길은 18시간이라는 예정된 시간을 아무런 두려움과 고통 없이 건너고 있는데, 그들은 몇 차례의 밤을 더 지샐지 모르는 막막함과,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불안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폭풍의 횡포에 몸을 떨며, 오로지 새로운 세계로 가서 자유롭게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버텼으리라.


 어선 두어 척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 이곳이 200해리를 벗어난 공해상이 아니라면, 중국 연안의 고갈되어 가는 수산자원 때문에 우리 해역에 자꾸 출몰하여 쌍끌이 저인망으로 고기 씨를 말리는 막무가내의 저 중국 어선들을 혼내주기 위해서라도 장보고 대사 같은 분이 나타나야 한다. 장보고 대사는 20세 전후에 당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연구자들은 그 시기를 서기 810년경으로 추측한다. 당시 신라 사회는 기근과 홍수가 끊이지 않아 각처에 도적이 날뛰고 반란이 잦아 귀족 출신이 아닌 젊은이들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난세에 포부를 지닌 젊은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해외진출이란 모험적 도전이었다. 신라 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 여기서는 아무도 멀미를 않는다. 바람과 조류를 의지하여 이 넓은 바다를 건너야 했던 당시 신라인들에게 이런 날씨는 얼마나 답답했을 것인가. 다행히 동풍이 건듯 불어 돛을 한껏 부풀리고 이 맑은 바다를 미끄러질라치면 팽팽하게 당겨진 돛줄에서 핑핑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으리라. 그러면 그들도 신이나 '에야누 야누야'를 흥얼거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가끔은 비가 오거나 파도가 몰아쳐 온 몸을 적셔 젖어 눅눅한 옷을 걸치고 찬바람에 덜덜 떨며 두고 온 고향 산천과 부모형제를 그리는 날도 많았으리라. 그러면 자신을 이 황해 바다로 몰아낸 조국을 원망하며 자꾸만 초라해져 가는 자기의 몰골을 얼마나 저주했으랴. 그런 때 장보고 대사라도 옆에 있어 선단을 이끌며 "동포 형제들이여!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바다를 건너는 길뿐이다.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라. 지금 영화를 누리는 일부 귀족들의 권력 다툼 때문에 대다수 이름 없는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남아서 핍박받고 굴욕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희망의 땅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자. 평등과 노력한 만큼 살 수 있는 기회의 땅이 거기 있나니."라고 다독거려 주면 좋으련만.

 *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중국 경극 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