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특집]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지 답사기 (2)

김창집 2001. 9. 11. 18:23

 * 법화원

 

위해(威海) 편

 

□ 2001년 6월 1일 금요일 맑음

▲ 말끔하게 정리된 위해시(威海市)

 4시간이나 잤을까? 시계를 보니, 정확히 새벽 4시 반이다. 30분여를 뒤척이다가 모처럼 배에서 맞는 일출을 홈 비디오 카메라로 잡을 수는 없을까 하고 조심조심 2층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배가 가는 반대쪽이 동쪽일 거라 가늠하며, 배가 갈라놓은 물결을 따라 수평선 쪽을 바라보았으나 희붐하게 날은 밝아가는데 해무(海霧)와 구름으로 가리어져 일출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배가 가는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니 육지가 보였다. 그렇다면, 저기는 산둥반도의 끝자락 성산두(成山頭)일 터이다. 나는 혼자 멀리 보이는 육지를 바라보며, 신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가슴 설레였다. 그로 미루어 생각한다. 어렵게 황해를 항해한 지 며칠이 흘러가버린 어느 날 새벽, 문득 중국 땅을 보게 된 장보고의 마음은 어떤 상태였을까?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두근거렸으리라.


 산둥반도는 북으로 묘도군도를 통해서 요동반도와 이어지고, 동으로는 바다 건너 한반도의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항구를 갖고 있다. 이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교류했을 가능성이 크며, 고조선 시대에도 교역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백제 등과 관련을 맺고 있어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곳이다. 북쪽으로 등주(봉래시), 동쪽 끝에 성산, 남쪽 청주 부근의 밀주 등이 우리 나라와 연결되던 항로였다. 사실이지 신라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리 민족이 지배했던 곳이 아닌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 일가가 새운 소왕국 번진[齊]이 55년간 통치했으며, 장보고가 법화원을 세워 일대의 정치경제를 장악했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세수를 하고 하선 준비를 서둘렀다. 먼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본다. 해안선 가까운 곳에는 다시마나 미역으로 추정되는 양식장 부표(浮漂)가 끝간 데 모르게 퍼져 있다. 황해 그리고 한참 들어온 이곳 위해만의 바다는 잔잔할 수밖에 없겠다. 중국은 표준시각이 우리보다 1시간 늦기 때문에 시간을 한 시간 뒤로 돌렸다. 배가 서서히 접안 준비를 하는데 시가지를 바라보니, 너무 깨끗하고 밝다. 저번에 왔을 때 한창 철근 구조물이 올라가고 건설 붐이 일더니, 새로 조성되어서 그런지 도시 전체가 환해 보인다.


 배를 대고 내리는 계단을 선체 옆에 붙인 뒤 흰옷 입은 아저씨들이 올라와 옆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그물을 둘러친다.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은 사람은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짜증이 안 날 수 없다. 좋게 말하면 그들의 '느긋한 천성'이요, 나쁘게 말하면 '게으름'인 이른 바 '만만디(慢慢的)'를 벌써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바쁘랴, 어차피 그들은 그 그물만 쳤다가 거두면 업무가 그만인 것이다. 이 만만디는 내려 200m쯤 떨어진 출입국관리사무소로 가는 버스 속에서 다시 한번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 버스가 갔을 때 심사 받을 사람이 조금 줄을 잇자, 버스를 세워 문을 닫고는 내려주질 않는 것이다. 꼭 기계가 돌아가다 정전이 된 꼴이었다. 그래 냉방도 안된 차에서 꼬박 20여분을 갇혀 있을 수밖에.


 버스 안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 양쪽에 서 있는 두 군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하나는 코도 크고 검은빛을 띤 아라비아인 같고, 하나는 코가 납작하고 얼굴이 노란 만주족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한족(漢族)들이다. 일찍이 중국을 통일했던 몽고족이나 만주족도 오히려 한문화(漢文化)에 먹혀 한족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90% 이상이 한족 행세를 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단체여서 그런지 의외로 입국 절차가 빨리 진행되어 밖으로 나오니, 보따리 장사를 기다리는 무수한 환영객들을 볼 수 있었다.

 

△ 위해박물관의 장보고관과 옌닌관

 지난번에 왔을 때는 맨 처음, 위해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환취루(環翠樓) 공원에 갔었는데, 오늘은 위해박물관에 가서 장보고관과 옌닌관을 보게 되었다. 현지 가이드 교포 3세들의 안내를 받으며 부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박물관으로 갔다. 거리는 깨끗이 정돈되었으며 아카시아 같은 가로수가 늘어서 있었다. 위해시는 환치구(環翠區)를 중심으로 문등시(文登市), 유산시(乳山市)가 서쪽으로 연태시(烟台市)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영성시(榮成市)가 해안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다. 지형상 여름에는 바다를 끼고 있어 시원하며, 겨울에는 온화하다. 그리고, 해수욕장이 많아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 받고 있단다.


 위해박물관 앞에는 해태상과 같은 석상이 계단 입구 양쪽에 여의주를 물고 앉아 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검은 옥으로 조각한 산천초목의 모습이 놓여 있고 커다란 자기병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바로 전시실이다. 고대 유물은 별로 없는지 사진과 글이 태반이었는데 조금 지나서야 작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토기인지 자기인지 구분이 안 되여 더러 섞여 진열된 것이 동시대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음에 나타난 것이 산둥성 모형지도였는데 각 곳에 존재했던 나라의 유물 출토지를 표시해 놓고 있었다. 그 옆에 관이라하기엔 너무 초라한 장보고란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속 일본서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번천문집(樊川文集) 등에 나타나며, 특히 옌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일본 교토 적산서원에 있는 신라명신상의 사진과 법화원에 모셔져 있는 월전 장우성 화백의 장보고 영정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옌닌의 '입당순례행기'에 나오는 편지글 "저는 생전에 직접 각하를 뵈옵는 영광을 갖지 못하였습니다만 각하의 위대함은 전부터 들어왔기에 저의 흠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뜻해졌는데 엎드려 바라옵건데 대사의 존체가 평안하시길 빕니다."는 부분의 사진도 나와있다.


 옌닌은 일본의 구법승(求法僧)으로 나이 45세가 되던 838년 견당선(遣唐船)을 타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두 차례에 걸쳐 항해에 실패한 뒤 세번째 항해에서 난파 상태로 해류에 떠밀려 겨우 양자강 부근의 육지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래서, 847년 불경 장소(章疎)·전기(傳記)·만다라 등 580부 794권의 불교 관련 자료를 모아 9년만에 귀국하여, 일본 천태종 3세 좌주(座主)에 올랐는데 일본 불교의 중흥조(中興祖)로 일컫는 스님이다. 그는 당나라에 있는 동안 매일 일기를 기록해 4권 8만 자에 이르는 '입당구법순례기'를 남겼는데, 이 자료에는 장보고의 위상과 함께 산둥반도 대운하지역을 중심으로 한 재당 신라 교민들의 역동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곳곳에 자기나 토기 같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쪽에는 진시황제가 신하들과 함께 성산두에 올라 황해를 바라보는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시켜 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가제도구서부터 지도, 상장, 증명서 등 서류에 이르기까지 민속박물관에나 소장할 만한 물품들이 제대로 정리도 되지 않은 채로 빽빽이 진열해 놓아 난삽한 느낌이 들었다. 나오다가 보니, 1층에는 현대 서화를 걸어놓고 있었고, 판매대와 그 둘레에는 옛 것 지금 것 구분 없이 유물과 작품과 상품들을 모두 섞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 산둥성의 밀밭

 

▲ 영성시 성산두에서 황해(黃海)를 바라보며

 성산두(成山頭)는 산둥반도 최동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성산산맥의 머리라는 뜻이다. 반도 끝에 가까워질수록 미역과 다시마를 널어 말리는 현장이 자주 목격된다. 가다가 중간에서 중국에서 첫 점심 식사를 했다. 식당은 이제야 지어 비교적 깨끗하게 되어 있었는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실물 크기의 옥좌(玉座) 세트가 놓여 있어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처음으로 중국에 와서 식사를 하는 선생님들 중에는 잘 못 먹을까봐 긴장하는 눈치를 보였으나 그런 대로 모두 잘 들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어서 그것을 재료로 요리를 한다고 했다.


 성산두 입구로 들어서면서 보니까 양쪽에 시멘트로 제작한 진시황릉의 병마용(兵馬俑)과 같은 입상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다. 얼마 안 가 가이드로부터 시황묘(始皇廟)가 여기라는 설명을 들었다. 원래는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찰을 하며 머물었던 행궁인데 후에 백성들에 의해 시황묘로 복구되었고, 현재는 중국에서 유일한 진시황의 사당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진조(秦朝) 암석 외에도 몇 점의 청대(淸代) 문화재들이 진열되어 있다 한다.


 성산두는 중국 바닷가에서의 최동단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일출을 보는 곳으로 예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곳', 또는 '중국의 희망봉'으로 불리어 왔다. 고대로부터 성산두는 태양신이 거주한다고 하여 사서에도 중국 역대 제왕들이 여러 차례 이곳을 시찰했다고 기록돼 있다. 제일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도 두 번이나 이곳으로 순행하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생불로초를 구하려 하였다. 이는 물론 이 지역이 동방의 해상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성산두에 다다라 보니 해를 볼 수 있게 길게 회랑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그것이 끝날 즈음에 성산각을 지어 놓았다. 마당에는 두 개의 탑과 진시황이 양쪽에 신하를 거느리고 멀리 바다를 가리키는 커다란 구조물, 또 옆에 제를 지내기 위해 예를 올리는 한무제의 모형이 서 있었다. 성산두의 끝 부분으로 한두 사람 지나 다닐 정도로 가느다랗게 이어지면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들어서는 입구 가운데에는 성기와 같은 옥돌을 박아 놓아서 얼마나 만졌는지 오고가는 사람의 손길에 윤기가 흐른다. 해당화가 한 그루 바위 사이에서 자라 꽃을 피우고 끝머리에는 중국 전임 총서기인 호요방(胡耀邦)이 쓴 '천진두(天盡頭)'라는 글씨가 위엄을 보인다.


 기념 촬영을 마치고 윤 교수의 열강을 듣으면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고요한 밤이면 황해도 장산곶의 개짓는 소리와 새벽 닭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곳. 성산두는 예로부터 군사요충지로서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많은 전쟁을 겪었다.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조선과 전쟁을 벌인 한무제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으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소정방이 13만의 수군을 거느리고 출발한 항구도 이곳이다. 청·일 갑오전쟁의 황해대전도 성산두의 동쪽 해상에서 벌여져 중국의 민족 영웅 등세창(鄧世昌)도 이곳에서 순직하지 않았는가.

 

△ 석도진 적산 기슭에 자리잡은 법화원(法華院)

 영성시 석도진(石島鎭)은 산동반도 동남쪽 끝 석도만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 한반도와 중국을 가장 빈번하게 오간 항구로 1,200년 전 바로 장보고의 대륙 진출 거점이었다. 석도진 항구 부근에는 신라인들의 자치기관이었던 신라소와 배를 짓고 수리하는 조선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고 포구는 해수욕장을 변해 버렸다. 석도만 앞에는 조그만 모야도라는 섬이 있는데, 일본 스님인 옌닌(圓仁)은 장보고 선단의 배를 타고 이곳을 정오에 출발했는데 그 다음날 오전에 신라의 땅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과는 가깝다는 얘기이리라.


석도진으로 들어가는데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안온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진입로는 계곡 주변에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도로 주변엔 온갖 과일나무가 심어져 있어 비교적 잘 자라나고 있었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 때 장보고 대사가 지은 절로 창립 초기에 법화경을 읽었다 하여 유래된 것으로 당시 산둥지역에서는 제일 큰 불교 사원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돌의 색깔이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적산이라 이름하였고, 당시 이 절이 영험이 있다하여 항해의 안전을 위하여 많은 신자들이 찾아 들었다고 전한다.


 법화원 입구 맞은 편에는 일본 스님 옌닌의 기념비가 간판대에 액자를 달아놓은 것처럼 세워져 있었다. 838년 옌닌 대사 일행은 견당사로 입당하여 이곳에서 3년 가까이 묵는 동안 법화원에 많은 신세를 지게 된다. 옌닌은 당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익히면서 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법화원을 상세히 묘사해놓았다. 귀국 후에도 옌닌은 적산법화원의 은혜를 잊지 못해 일본 교도의 소야산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웠다. 1988년 영성시에서는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선조들의 위업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차원에서 일본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원래의 위치에 법화원을 세웠다.


 적산법화원의 주건물인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상이 모셔져 있으며, 관음전에는 관음보살, 북쪽 벽에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장보고 대사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절을 모두 구경하고 돌아서서 윤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누가 보아도 명당 자리임에 틀림이 없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되어 있고 올라오는 곳이 좁고 험하니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법화원을 나온 우리가 찾은 곳은 바다가 그림처럼 내다보이는 동산에 자리한 장보고 기념탑이었다. 1991년 한국 성신여대 교수인 세계한민족 연합회 회장 최민자 교수가 세운 것으로 한·중 친선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멀리 거울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1,200년 전 이곳에서 꿈을 펼쳤을 재당신라인들 생각에 잠시 빠져본다.

* 성산두의 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