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특집]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 답사 (3)

김창집 2001. 9. 11. 18:18

봉래(蓬萊)와 임치(臨緇)

 

*****2001년 6월 2일(토요일) 맑음

△위해를 떠나 엔타이(煙臺/연대)로 가는 길

: 우리가 중국에서 첫날밤을 묵었던 호텔은 합경산장(合慶山莊)으로 지은 지 오래 되지 않은 10층 정도의 제법 큰 호텔이었다. 뷔페로 아침을 일찍 마친 우리는 밖으로 나와 앞에 호수처럼 펼쳐진 위해만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줄 맞춰 점점이 떠 있는 양식장의 부표(浮漂) 사이로 통통배가 지나가는 무척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진다. 바위 아래로 이어진 물이 너무나 맑아 발길을 잡아끈다. 내려가면서 보니 나무나 풀도 역시 눈에 익은 것들이다. 해변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소나무가 순을 쭉쭉 펼치며 자라고 있었다. 아래로는 나팔꽃을 닮은 갯메꽃이 가끔씩 피어나고 꾸지뽕나무는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 쑥을 뜯어 향기를 맡아본 정 선생이 진해서 약쑥으로 그만이겠다고 거든다. 한가로이 낚시하는 사람이 있어 가보기로 하여 건너가는데, 바위 위로 갯강구가 기어다니고 굴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주중에 낚시하는 사람도 다 있다 싶어 나중에 물어보니 1995년부터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다가서서 보니, 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크릴새우를 미끼로 놀래기 한 마리와 불가사리 하나를 잡아놓고 있었다. 어디나 이 불가사리가 말썽인가 보다 하고 바라보는데, 낚싯대가 제법 휜다. 얼른 잡아채니 볼락이 푸드득거리며 올라온다.


: 생각해보니 요즘 중국 사람들은 오랜만에 느긋한 생활을 즐기는 셈이 아닌가 싶다. 오늘 근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고 자유로이 거니는 사람이 많다. 버스를 타고 거리로 나섰다. 국화가 꽃을 피우고 장미도 다양한 종류가 심어져 있었는데, 오래 가물었는지 시기가 늦었는지 꽃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아래는 곳곳에 보라색의 큰괭이밥이 피어 있다. 우리 나라의 원산은 약간 분홍빛이 도는 우윳빛에다 갈색 줄이 힘줄처럼 세로 나 있는데, 언제 우리 나라에 분홍빛 큰괭이밥이 들어 왔는지 걷잡을 수 없는 세력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 위해에서 엔타이(煙臺/연대)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거의 바다 곁으로 이어져 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이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홍콩에서 자본을 끌어 들였으며, 그 비용으로 50년간 임대를 주었기 때문에 사용료가 꽤 비싸다고 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황 교수님이 마이크를 잡고 '아침 일찍 일어나 위해를 거닐면서 1,200년 전 장보고 대사가 된 기분으로 선생님과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 오늘 아침에 눈만 멀뚱히 뜨고 텔레비전이나 보던 자신을 나무랐다. 그 전엔 안 그랬는데….


: 엔타이(煙臺)는 중국 산둥성 북동부에 있는 도시로 인구 약 45만 2천(1990) 정도로 보하이만에 면한 산둥반도 굴지의 양항이며 어항이기도 하다. 명나라 때 해적의 내습을 알리기 위한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대(煙臺)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다.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하여 개항되었다가 1876년 영국과의 지푸[芝]조약에 의하여 반환되었다. 항구는 1915년 네덜란드인이 건설한 부동항(不凍港)으로 대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다. 대안의 랴오둥 반도와 연안 각지로 항로가 열려 있다.


: 엔타이시는 자연 자원이 풍부하고 황금 생산량이 중국에서 상위를 차지하며 유명한 생선과 과일의 생산지다. 예로부터 산둥반도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원료로 한 포도주 산업이 활발하여 세계에서 인정하는 제품을 내놓고 있다. 그 외에도 생사·비단·콩기름·땅콩·배·사과 등을 선적하고 석유·석탄·무명·설탕 등을 받아들인다. 근래에는 시계·베어링·전기 기구 등의 경공업도 행하여지고 수산 도시로도 발전하고 있다. 차를 잠시 세웠는데 체리 파는 아주머니들이 죽 늘어서 있어 체리를 사서 맛을 봤다. 지난번에는 이곳 연대를 거쳐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갔었는데…….

▲등주(登州)- 발해(渤海)와 관련된 이야기

: 버스는 옛 등주였던 봉래(蓬萊)에서 멈추었다. 이곳은 봉래각과 등주수성, 그리고 등주 고선 박물관이 있어 중국에서는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봉래각이 공원처럼 되어 있는 데다 시원히 바다도 들여다 볼 수 있어 주변 사람들까지 몰려드는 것이다. 관광 버스도 몇 대 세워져 있고 주변에 기념품 상점도 늘어섰다. 얼마 안 가 성문이 나온다. 중국에 있는 고원이나 성문은 그 규모부터 대형이다. 성문을 지나는 데만도 한참 걸린다. 성문을 지나 다리가 나타나면서 양쪽으로 배를 대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가 옛날 우리의 선조 발해의 배가 매어질 때도 있었을 터이고, 그런 날이면 해동성국 발해 사람들이 흥청댔으리라. 그것을 인정이나 하듯 어디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연거푸 들린다.


: 대조영(大祚榮)은 천문령에서 당군을 괴멸시킨 후 진국(震國)을 건설하고 돌궐·신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당을 압박했다. 당은 발해·신라·돌궐이 서로 연합 전선을 맺자 국제적으로 고립되기에 이른다. 어쩔 수 없이 정책을 바꾸어 발해에 우호적인 손을 내밀자, 대조영 역시 자신의 아들 무예(武藝)를 당에 보낸다. 당은 713년 낭장 최흔을 보내어 대조영의 '발해 군왕' 책봉을 돕는다. 이에 두 나라는 적대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었으며, 진국은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발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 719년 발해 고왕(高王)이 사망한 후, 2대 무왕이 즉위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는 다시 대립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특히, 흑수 말갈을 두고 발해와 당의 신경전은 치열했다. 당이 흑수 말갈에 흑수 도독부를 설치하자 발해 무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부를 복속시키고, 732년 9월 대장 장문휴의 지휘로 발해 해군이 당의 등주를 점령하면서 외교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하지만 3대 문왕이 즉위하면서 중국과의 외교 관계는 우호적인 관계 이상으로 발전하였다. 문왕이 통치 초기 군사적 행동을 일단락하고,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욕구를 중국을 통해서 해결한 셈이다.


: 발해는 56년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 측에 49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외교 관계는 중립적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당측에서 발해에 기병 4만 명을 요청했지만 발해는 관망하고 있었다. 당시 신라는 3만의 군대를 파병하였다. 763년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후, 발해와 당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이것은 발해가 안록산을 간접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 중앙 아시아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안록산은 비단길이 통제되는 상황에서 발해의 담비 길을 통해서 우회한 후 보급로를 유지하였으며, 이 길은 발해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묵인하에 보급로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즉, 발해가 안록산의 보급로를 묵인하였기 때문에, 당의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외교 관계는 곧 회복되었으며,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에서 문왕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외교 정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당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놀아나는 입장이 되었다.


: 당은 발해와 신라의 대립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841년 이후 당은 대규모의 농민 반란 및 전란으로 발해의 외교 사절 파견은 점점 줄어들어 평균 7년에 한번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905년 당의 멸망 후, 발해는 후량과 후당과의 외교 관계에 주력하는데 이것은 거란의 침략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 지역의 혼란으로 인하여 지원 없이 홀로 거란과 전쟁을 치르면서 발해는 926년 멸망하게 된다.


: 당과의 교역은 713년 발해 고왕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의 경제 교역은 조공 형태를 띈 궁실 무역과 일반 상업 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책부원귀>를 참조하면 당과 발해 왕실의 무역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주로 지방 토산물을, 당은 농산품, 방직품, 공예품을 주었다. 이런 궁실 무역은 상대방의 왕실 및 귀족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추진한 것이다. 상업 무역은 중국의 산둥반도에 있는 등주, 청주를 중심으로 교역을 하였는데,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보면 등주에 발해의 교관선이 정박하고 있으며, 발해관이 있다고 전한다.


: 그리고 원인이 청주에 갔을 때 "발해 왕자가 이제 도착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칙사가 오기를 기다려 떠나려 한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중국의 산둥반도와 발해의 압록강구를 중심으로 일반 무역 역시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정기 같은 경우 발해 솔빈부의 명마를 수입하여 군사력을 유지하였는데, 해마다 교역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봉래각(蓬萊閣)과 등주수성(登州水城)

: 새소리가 나는 장난감들이 짹짹거리는 속을 비집고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도니 왼쪽으로 수족관이 늘어서 있다. 우리 나라 같으면 분명 횟집일 텐데 이곳도 혹시? 수족관 앞에 놓인 커다란 그릇 속에는 조개들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어느 어촌의 모습과 별다름이 없겠다. 다만 고기의 빛깔은 우리 나라 서해에서 잡히는 고기처럼 그 빛이 어둡다. 봉래각 입구 정문엔 '인간봉래(人間蓬萊)'란 현판이 걸려 있고 그 뒤로는 빨간 등이 줄에 매달려 오는 손님을 맞는다.


: '봉래(蓬萊)'라는 이름은 옛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바다 가운데 있는 산 이름인데, 중국 전한 때 한(漢) 문제(文帝)가 이곳에 와서 이 신선산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실지로 존재하지 않는 신선산이 보일 리 없으니, 경치가 수려한 지금 이 곳을 '봉래'라 명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당조 때에는 이곳이 봉래진으로 불리우다 후에는 등주(登州)로 불렀다. 이곳에 있는 봉래각은 바로 중국의 4대 명누각 중의 하나이다.


: 잘 조경 되어 가꾸어진 숲길을 돌아 오르며 고궁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얼마 안가 멋진 글씨로 '단애선경(丹崖仙境)'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 단애선경방에 이르렀다. 이 목재 대문은 여러 번 훼손되었는데 현재 있는 것은 1981년에 수리한 것이다. 현판의 멋진 글씨는 중국의 부주석 동필무(董必武)가 1964년에 봉래각 시찰 때 남긴 글이다. 용왕궁은 동해 용왕이 거주하는 용궁으로 거실, 침실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는 또한 현지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거나 출항시 안전 항해를 기릴 때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정전, 침실, 휴전, 자손전, 무대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 용왕궁의 건물들은 서기 1122년경에 건축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천후(天后)는 남쪽 바다를 다스리는 여신 이름이며, 남부지역에서는 바다를 향해 기우제를 지낼 때 천후에게 불공을 드리는 경우가 많다. 여기 천후궁은 중국 북방에서 제일 큰 천후 사당의 하나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독특하게 지어져 있었다. 이곳의 사당들은 보통 입구 양쪽에 사천왕이나 인왕상 같은 험상궂은 모습을 만들어 세우고 있으며, 본당 양쪽으로 신하들이 늘어서서 시중드는 형국의 상들을 배치하였다. 본당 앞에 지붕까지 만들어진 대향로에는 향이 묶인 채로 여럿 타고 있어 사방에 연기가 자욱하고 향냄새가 진동한다.


: 마지막 제일 안쪽 높은 곳에 2층으로 된 봉래각이 서 있었다. 아래층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시인 묵객이나 인사들의 글씨들과 이곳 주변의 경치를 담은 사진들이 설명과 함께 액자에 넣어져 보는 이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한다. 2층인 마지막 누대(樓臺)에 올랐을 때, 남쪽 앞으로 보이는 나무가 우거진 주변 경치와 뒤쪽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는 육지에서 자란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선경으로 비칠 것이다. 누대 중심부에는 당시 문왕 일행이 놀던 모습이 실물 크기로 만들어져 오른 사람들의 사진 배경이 되어 주고 있었다.


: 중앙에 '신주승경(神州勝境)'이라고 쓴 현판을 살피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바다에 떠 있는 보트들이 시원히 물살을 가른다. 봉래각은 주요한 관광지로서 송조 때 건축되었는데 신선들이 주연을 베풀던 곳으로 전해져 이 누각에 오르면 마음이 후련하고 신선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는 웅장하고 멋드러진 중국의 유명한 누각이다. 특이한 것은 이곳의 등주 수성의 정상부라는 점이다. 내려오면서 원씨의 시조를 모신 '원문비조(元門鼻祖)'와 여씨의 시조를 모신 '여조전(呂祖殿)'을 들렀다.


: 샛길을 걸어 성의 수문이 되는 다리로 들어섰다. 옛 등주항은 지금의 봉래 북쪽의 해변가에 위치하여 있었는데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연결시키는 노철산 수로의 출발지였다. 5000여년 전부터 요동반도와 해운업을 하였는데, 주변지역에서 선박관계 유적들이 발견됐다. 고조선도 이 곳을 통해 교역을 하였으며, 진나라 때의 서복(徐福) 일행도 이곳에서 출발하여 제주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갔다고 한다.


: 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칠 때 수군을 파견한 곳도, 고구려와 수·당나라가 동아시아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일 때 대규모의 수군을 발진시킨 곳도 바로 이 일대였다. 또한 732년에 발해의 장군 장문휴가 수군으로 공격하여 점령하고 자사인 위준을 죽인 곳도 바로 이 등주성이다. 그 후 등주는 이정기 세력이 장악하면서 발해 및 신라교역 등을 관장하였다. 때문에 이 일대의 항구들은 예로부터 조선업과 해운업이 발달했다.


: 일본의 견당사도 중국으로 오려면 거쳐야 할 항구이기도 하다. 사서에 의하면 이쪽에서 남쪽의 초주, 양주, 명주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에는 많은 일본의 승려들이 이곳을 거쳐 낙양이나 장안에까지 갔다고 한다. 확실치는 않지만 당나라 때 등주를 거쳐 장안으로 간 신라의 견당사는 30여 차례에 달하였고, 일본의 견당사는 7차례나 된다. 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봉래에는 많은 신라 상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곳을 '신라방'이라고 하고, 그들을 접대했던 여관과 무역 기관이 있는 곳을 '신라소'라 했으며 많은 신라인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장보고 세력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에는 고려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송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상인들이 거주하였다.

▲ 등주수성 시설과 등주고선박물관

: 등주항은 자연 항만인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예부터 해군의 요새였다. 수성은 두 개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한 부분은 항만이며 갑문, 부두, 방파제 등이 포함되었고, 두 번째 부분은 육지 시설인데 성벽, 적대, 성문, 병영, 지휘소, 등대 등이 있었는데, 이 두 부분은 완벽한 해안군사 방어체제를 구성하고 있어 평시에는 수군을 주둔시키고, 선박을 정박시켜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시에는 언제나 출동할 수 있고 또한 후퇴하면 성을 근거지로 저항전을 벌이기도 유리하였다.


: 다리를 건넌 곳에는 대포를 전시해 놓아 이곳이 치열한 작전지역이었음을 넌지시 말해준다. 멀리 바다로 돌출된 곳에는 연대가 이어져 있다. 그리고, 육지 쪽으로 오면서 보니, 북문인 수문은 선박의 출입 성문이지만 전략적인지는 몰라도 너무 좁게 느껴진다. 육지로 통하는 커다란 남문은 사람과 마차의 출입 성문이 된다. 한 곳에 모여 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이곳 저곳을 살핀다. 저 멀리로 적들이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벽인 적벽과 포대가 보였으나, 그 때 물의 수위를 조절했다는 갑문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 등주수성은 명조 때부터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점차 비교적 완벽한 해상방어 체제를 형성하였으므로 당시 산둥 연해에서 6만여 명의 군사를 주둔시켰고, 등주에만 거의 3,000명의 군사가 있었다. 명나라 때 유명한 장군 척계광은 등주 사람으로 척가군을 창설했는데 왜구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근대에 이르러 등주항은 얕고 모래와 흙이 많이 쌓여 큰 선박들을 정박시킬 수 없어 점차 연대항에 큰 선박들이 물리면서 봉래의 군사, 정치, 교통의 역할은 점차 작아지고 지금은 중요한 관광지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 등주고선 박물관은 1988년 7월부터 건축하여 1990년에 완공되었는데, 통나무배와 용선, 차륜선, 모래선 등 4가지 선박들을 화강석으로 조각해놓고 있으며, 봉래수성모형도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봉래 원나라 전선(戰船)은 1984년 등주 항만 정리작업 중에 진흙탕 속에서 두 개의 고대선박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만 건져 다시 원형으로 복구하였다. 이 고대선박은 돛대가 세 개인 목조범선으로 출토된 부분의 길이는 28.6m, 넓이는 5.6m이고 14개 선창으로 나뉘어져있다. 추측에 의하면 이 선박은 원 길이가 35m, 넓이가 6m, 수심이 2.6m인데 만재시의 적재량은 173.5톤에 달한다고 한다.


: 현재 전시되어 있는 것은 5:1의 비례로 복구한 것인데 추정에 의하면 원조 때 만들어진 해군전선이라고 한다. 봉래원조전선의 출토와 복구는 중국 근래 발견된 중대한 문화재의 하나이다. 지금 진열한 석재 닻과 목재 닻 두 가지 외에 여기에 있는 네발 철 닻은 높이 2.15m, 456kg의 무게로 수백 톤의 해상 선박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고선 모형, 포석기(抛石機 : 화약이 발명되기 전에 돌을 뿌렸던 기계), 명초 대포와 굴 껍질이 닥지닥지 붙은 자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지난(濟南)으로 가는 도중에 들렀던 임치중국고차박물관

: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는 둥주 수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중국 음식에 적응이 된 상태여서 모두들 즐겁게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그런데, 이번엔 뜬금 없이 까지 않은 마늘이 한 접시 놓여 있었다. 우리 모두는 무슨 기름진 음식이 나오려나 기대하면서 모두 하나씩 까서 자기 접시에 놓았다. 먼저 나온 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이곳 사람들이 즐긴다는 밀빵이었다. 그저 간만 조금했지 설탕은 넣지 않았다. 차는 역시 자스민 차였다.


: 오늘은 어떤 것이 나오나 하고 기대했던 첫 요리가 나온다. 가자미 조림이었다. 다음에 나온 것은 가리비 조개를 살짝 데쳐놓은 것, 이어 해삼 말린 것과 피망을 썰어 볶은 것, 두부 조림, 밥, 조개탕, 고추와 꼴뚜기 볶음, 해파리와 피망 무침, 돼지고기와 야채 볶음, 파래와 계란 흰자를 풀어놓은 국, 마지막으로 수박이 나왔다. 중국 요리는 그 지역에는 산물에 맞게 조리한다는데, 지금까지 산둥반도에 들어와서 먹은 것은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가 많은 것으로 보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 이제 지난으로 가다가 임치(臨緇)에 있는 중국 고차(古車) 박물관만 들리면 오늘 일과는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긴 반도를 가로지르는 거리여서 엄청난 시간이 요구될 것 같다. 넓은 들판에는 밀이 누렇게 익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 강수량의 거의 반밖에 안 되는 이곳에서는 비교적 건조한 곳에서도 잘 견디는 밀 재배가 성행한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콤바인이 많지 않아 먼저 익는 남쪽으로부터 밀을 베기 시작하여 이곳에는 며칠 뒤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이다. 땅이 젖지 않았는데도 사람이 끌고 뒤에서 밀며 밀밭 이랑에 열심히 옥수수 씨앗을 파종하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땅콩도 심어 자라고 있었고 더러는 포도, 사과 등의 과수원을 조성한 곳도 있었다.


: 고속도로 위에는 가끔 차량이 하나둘 마주칠 뿐, 텅 비어 있었다. 아직은 이용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특히 외국의 관광 차량은 이용요금이 비싸지는 것이다. 이곳 택시를 보면, 기사가 앉아서 운전하는 운전석과 승객석이 차단되어 있다. 아마도 빈번했던 택시 강도를 예방해 보자는 차원인 것 같다. 드디어 임치에 이르렀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정지작업을 하다 발견한 것을 그 위에 그대로 집을 지어 길옆에 박물관을 차린 것이다.


: 임치구 제릉진 후이관장에 위치한 박물관은 현재 중국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제일 정확하고 완전한 차마유적(車馬遺跡)과 문물이 일체화된 고차박물관이라 한다. 이 박물관은 1991년부터 1994년 9월까지 4년에 걸쳐 완공되었으며, 건축 면적은 3,600㎡이다. 지하로 내려간 입구 오른쪽에는 기묘한 나무 뿌리의 형상을 살려 만든 재미있는 목상(木像)이 우리를 맞는다. 먼 길을 온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환영한다는 웃음을 선사하려는 여유를 누가 부렸을까? 어둑한 전시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차 바퀴와 함께 길게 묻혀 있는 말들의 앙상한 뼈에 놀란다. 머리를 바깥쪽으로 하여 발을 맞대고 두 줄로 거의 같은 형태로 누워 있다.


: 이곳 춘추순마갱에는 전시에 사용됐던 전차 10대와 말 32필이 매장되어 있는데, 규모가 큰데다 시설이 견고하고 장식품의 화려함으로 당대에 으뜸이며, 전국 10대 고고학적 발견의 하나로 치고 있을 정도라 한다. 고차 진열실에는 후이차마갱(後李車馬坑)에서 출토된 고대 차량의 복원 차량과 전국에서 나온 각종 고대차량을 그림, 모형, 유물들과 함께 진열해 놓고 있어, 중국 차량의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세계 차량 발전사상의 선진적 차량 제조 기술의 지위를 잘 말해준다.


: 박물관에서 나와 다시 고속도로를 달린다. 시간이 지루하고 보는 것이 단조로워서인지 모두들 잠 속에 빠진 눈치였으나, 자는 것도 한계가 있어 모두 깨어나고 만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없는지 물으니, 중간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는데, 주유소가 있고 건물은 이제야 지었으나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화장실을 다녀온 선생님들이 식당으로 가서 서툰 중국말로 물어 보았으나, 이용객이 없어 장사가 안 되기 때문에 치워버린 모양인지 눈만 멀뚱거린다. 저쪽 맞은 편 상점과 음식점을 보니, 사람들이 오가는 것으로 보아 장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길 아래로 나 있는 미로를 찾아 뛰어 갔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곳 식당에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 나는 얼른 고량주 여섯 병을 사고 뛰어와 1호 차에 3병을 나누어주고, 우리 차로 돌아와 한 잔씩 맛보게 하였다. 아직도 남은 3시간 여의 여행을 위해 희생하는 나를 보고 저 선생님은 알콜리스트가 아닌가 의심하는 분도 계셨다. 나는 여행지에서의 술은 잘 챙기는 편이다. 술이야말로 그 고장 모든 문화의 정수(精髓)가 아닌가. 집에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도 않는 체질인데, 여행길에만 오르면 도지는 병이다. 나를 얽매는 모든 굴레를 벗어버린 해방감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변명해 두자.*

**사진 위는 봉래각과 등주성이고, 아래는 치박에 있는 고차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