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靑島) 일정
2001년 6월 4일(월요일) 맑음
▲ 칭다오(靑島)와 우리 나라
: 거리에 하나둘 나붙은 한글 간판.
옌볜(延邊) 갔을 때가 그랬다. 엊저녁 도착하여 우리가 묵을 귀도대주점(貴都大酒店)까지 가는 동안 거리에는 우리 글로 된 간판이 여럿 눈에
띄었다. 아니, 옌볜에는 우리 글을 쓰고 간자(簡字)를 밑에 써놓았지만 이건 숫제 한글로만 된 우리 나라 어느 거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간판이다. '자갈치 매운탕', '남성 공구점', '신나는 노래방', '속풀이 해장국집'……. 거리도 많이 정돈되어 깨끗한 것이 이 도시의 수준을
어느 정도 알려준다. 교통 신호를 잘 지키지는 않는다지만 건널목의 신호등 밑에는 남은 시간을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 있다.
: 칭다오(靑島)는 산둥반도 남안 자오저우만[膠川灣]에 위치한 산둥성 동부를 대표하는 도시로 도심 인구는 약 220만이나 되며,
우리 나라 경기도의 크기로 보면 된다. 비교적 수심이 깊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원래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8년 독일이
자오저우만의 조차권(租借權)을 얻어 상항(商港) 및 군항(軍港)으로 삼고 시가지와 칭다오∼지난 간 자오즈[膠濟] 철도를 건설한 이래 중국의
주요무역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도 이곳에 진출하였던 곳이다.
: 개방 후 많이 바뀌어졌지만 주요 공업은 섬유 분야이며, 상하이[上海]·톈진[天津]과 더불어 섬유공업의 3대 중심지를 이룬다.
그밖에 제강·알루미늄·터빈·기관차·방적기계 등의 금속기계 공업이 발전하였고, 화학비료·약품·식품·담배·고무 등의 공장이 있다. 철도는 자오지
철도의 종점에 해당하며, 뤼다[旅大]·톈진·상하이·롄윈강[連雲淃]·옌타이[煙臺] 등과의 정기항로도 열려 있어 대외무역도 활발하다. 경치가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기 때문에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 중국이 개방을 선언하자 여러 나라의 기업들이 이곳 칭다오로 몰려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홍콩, 한국, 대만, 일본, 미국,
싱가폴 순으로 진출해 있고, 우리 나라의 경우 해외 시장에 진출한 중에 이곳 칭다오가 가장 많은 기업이 나와 있다.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은 이곳을 대부분 제조업체들의 해외기지로 개척돼 기업들의 해외투자도 점차 선진국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 우리 나라의 기업은 2000년 말 현재 허가 기준에 맞춰 약 2,500여 개 업체가 진출하고 있으며, 투자 업체 및 상사
주재원과 그들의 가족 약 10,000명과 유학생 약 250여명이 살고 있다. 정기 항공노선은 서울∼청도간 대한항공 주 7회, 중국민항 주 7회,
부산∼청도간에 중국민항이 주2회, 해운으로는 인천∼청도간 정기 여객선 주 2회, 인천∼청도간 정기 콘테이너선 월 3회, 부산∼청도간 정기
콘테이너선이 월 3회 운항된다.
: 그러고 보면, 자국인 중국을 제외하면 매일 운항되는 비행기로 소요 시간이 1시간 3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제일 가까운 거리에
우리 나라가 있는 것이다. 물론 해상왕 장보고 당시와는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르지만 그 후예들이 이곳에서 열심히 길을 열고 부지런히 개척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당시 이곳에 신라방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으면서도 시대와 상황이 차이로
상권(商權)을 휘어잡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나 할까.
△천혜의 자연 환경과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 칭다오
:
중국내에서도 칭다오는 맥주로 더 알려진 곳으로 산둥성 동부 해안에 위치하며 성도(省都)인 지난에 이어 산둥성 제2의 도시이다. 지금은 산둥성의
공업 중심지이자 인근에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휴양지로서도 각광받고 있다. 1899년 독일의 조차*지였기에 지금도 가끔은 독일풍의 건물을 볼 수
있다. 칭다오는 산둥성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해양성 기후로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도 가장 더울 때가 25℃ 정도여서 휴양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수영을 즐기기에 좋은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이며 이때가 되면 청도 시내와 해변이 피서객들로 크게 붐빈다고 한다.
: 칭다오는 자오저우만에 위치한 관계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항구도시이며 공업도시이다. 칭다오는 위도상 우리 나라 남부
지방과 비슷하며, 중국 동부 연해의 중요한 경제 중심 도시이자 오랜 역사와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절경의 관광도시이다. 인구는 대략 690만
정도이며 7개의 구와 5개의 현급시로 구성되어 있다. 칭다오는 온대 기후에 속하고 연평균 기온은 12.2。C, 연평균 강우량은 775.6㎜로
춥지 않고 살기에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름에는 물안개가 끼는 날이 많다.
: 칭다오는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청도의 대문구문화(大文口文化)나 용산문화(龍山文化), 동구문화(洞丘文化)를 통하여
중화민족의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동주시대(BC. 770∼BC. 256년)에는 제국(濟國)의 통치하에 있었고, 그때 당시 산동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인당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의 황제로 잘 알려진 태시황(太始皇)은 중국을 통일한 후(BC. 221년) 일찍이 세 번에 걸쳐
지금 청도의 랑아산에 오른 적이 있다고 전해지며, 태(泰)나라의 서복조씨(徐福曺氏)도 함대를 거느리고 랑아사에서 기항하여 동쪽의
고조선(古朝鮮)과 일본에 갔다고 전해진다. 한(漢)나라 때에는 한무제가 지금의 청도시의 불기산 교문궁(不基山 交門宮)에서 제사를 비롯한
제천의식을 행하였다고 한다. 당·송·명·청나라 시기의 도교사원과 암자 등이 칭다오시 곳곳에 퍼져 있어 문화적 중심지로 칭다오가 태동해 왔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특히 칭다오는 청나라 말기 이후부터 번화한 도시로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1891년 6월 14일(청무제 17년), 청나라는
주요 병력을 칭다오로 이동 주둔하게 함으로써 칭다오는 해양 방위의 요충지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곳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897년 11월, 독일이 칭다오를 강점하자 그때부터는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당시 독일은 자국의 선교사 두 명이 중국인들에게 살해당한
것을 빌미로 칭다오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칭다오를 점령한 독일군의 속셈은 극동지역에 독일 해군의 전진기지를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 독일군이 칭다오에 진주하면서 그 전까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에 현대식 도시가 세워졌다. 항구시설이 갖추어지고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자연히 상업지구가 형성되었다. 독일군의 주둔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칭다오와 지난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11월에는 일본이 독일 치하의 칭다오를 차지하였으나, 1920년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5·4운동으로 칭다오를 되찾게 되어
1929년에는 국민당 정부가 칭다오를 관할 특별시에 편입시켰다.
: 1938년 1월, 일본이 다시 칭다오를 점령하였으나 1945년 국민당 정부가 다시 이를 차지하여 관리함과 동시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되었다. 1949년 6월2일에 이르러서야 칭다오는 비로소 중국에서 말하는 완전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 이처럼 역사는 칭다오에서 수많은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국가제도의 각양각색의 건축물을 남겨 놓았다.
20세기 2∼30년대의 수많은 저명한 문인들이 칭다오에 운집해 있었을 정도로 칭다오는 상해 다음으로 가는 유명한 신문학 운동의 도시로서 중국의
신문학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 *조차(租借) :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 일부분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 지배하는 일.
△종교의 성지
노산(山勞山)**, 그리고 용담폭포
: 아침 종교의 성지 노산으로 가는 길은 붐비지는 않았지만, 이곳도 중국 관료들 특유의 만만디가
기대에 부풀어 있는 우리들을 약간은 짜증나게 했다. 우리 같으면 직원 누구든 방문 목적과 인원을 묻고 거기에 합당한 요금만 받고 얼른 통과
시켜, 이쪽이나 저쪽이나 시간을 벌어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다. 이건 더운데 차를 세워놓고 딴청을 피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인다. 가이드들이 다
동원되어 한참만에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 노산은 산둥반도 동남부 황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데, 노씨(山勞氏)성의 근원이 되는 명산이며, 중국 도교(道敎) 발상지의
하나이다. 노산은 지형이 독특하게 형성되어 바다에서 직접 산으로 이어져 다른 산과는 달리 독특한 자연 경관을 이룬다. 해발 1,133m인데
87.3km의 해안에 접하여 있기 때문에 아주 높아 보이며 쉽게 오를 수 없다. 노산은 기이한 산봉우리와 암석, 산과 바다 정취의 결합, 맛있는
노산 샘물이 유명하여 피서의 명승지로 이름이 높다.
: 유명한 노산 광천수와 청도맥주는 바로 이 노산의 샘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자연 풍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산은 예부터 '신선의
고향' 또는 '동천복지(洞天福地)' 등으로 불리며 제왕들과 시인묵객들의 동경하는 곳이었다. 당나라 시선 이백(李白)은 이곳에서 유명한 시구를
남겼고, 청나라 때 소설가 포송령(浦松齡)도 이름난 문장을 남겼다. 불교와 도교가 서로 세력 다툼을 했던 이곳에는 한 때 70여 개의 사찰이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 중국의 종교는 전통적인 것으로 불교·도교(道敎)·이슬람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16세기 이후 들어와 전파되었다. 중국 헌법
제36조에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문화혁명 과정에서
사원·교회 등이 홍위병(紅衛兵)에 의해 공격받아, 모든 종교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 이후 종교도 과거에 비해 활발한
추세를 보이고 있고,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인들도 중국으로 다수 몰려들고 있다.
: 노산은 벌써 왼쪽에서 비스듬히 이어지고 있었고, 해안 가까이 난 도로 오른쪽으로는 맑고 잔잔한 물위로 양식장의 부표가 점점이 떠
있다. 해수욕장도 벌써 몇 군데 지나쳤다. 가끔씩 초라한 인민복을 입은 전형적인 중국의 촌로들이 우마차 위에 짐을 잔득 싣고 가는 풍경들이
보인다. 칭따오 시내에서 한 시간 나마 걸려 해변가 태청궁(太淸宮) 입구 비교적 넓은 주차장에 다다랐다. 노산을 배경으로 동쪽기슭 바닷가에
자리한 태청궁은 기원전 140년경부터 생겨난 중국 도교(道敎)의 본산이며 발상지이기도 하다.
: 일요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내는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으며, 특히 중국 연인들의 쌍쌍이 구경다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입구에서부터 수염을 길게 기르고 검은 도복(道服)을 입은 도인(道人)들이 자주 보였고, 역사가 말해주듯 수 천년 된 향나무들이 제각각 고상한
모양을 하고 고사찰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찰 뒤편 중턱쯤에는 노산을 오르는 케이블카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곳에 가면 쉽게
올라가 볼 수 있겠다.
: 가이드의 얘기를 빌리면, 이곳 노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사흘도 모자란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도교의 이름난 전진파의 창시자 구처기(九處機)가 이곳에 와서 수강하면서 이곳은 도교의 수련하는 명지가 되었다는데,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서로
태청궁을 차지하게 위하여 불교의 스님과 도교의 도인들 사이에 서로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늙은 고목들이 많았는데, 그중
비스듬히 누워 있는 용 모양의 늙은 푸조나무와 흰꽃이 피는 석류, 그리고 무궁화가 기억에 남는다.
: 돌아오다가 들른 곳은 용담폭포(龍潭瀑布)였다. 계곡 옆 바위 길을 따라 노산 한 귀퉁이를 올랐다. 가는 길 양쪽 요소요소마다
음료수를 비롯한 각종 기념품을 늘어놓아 파는 모양이 꼭 우리나라 설악산 흔들바위로 오르는 길목 같이 느껴졌다. 서너 곳에서는 젊은이들이 옛날
우리 나라의 두껑 없는 가마인 남여(藍輿) 비슷한 것을 들고 30위안을 외치고 있다. 조금 더 가니, 이번엔 20위안만 내란다. 타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가만히 보았더니, 웬 아주머니와 비교적 젊은 남자가 타고 가는 것을 올 때 확인할 수 있었다.
폭포에 이르니, 마침 가뭄으로 물줄기는 가늘었으나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볼 수 있어 그래도 갈증을 면할 수가 있었다.
비가 오면 많은 계곡에서 합쳐진 물들이 120m의 높이의 천차청과 북천문 사이 계곡을 흐르면서 약 30m 높이, 5m의 넓이로 폭포를 형성한다고
한다. 90도 경사의 절벽 위에서 아래의 홈으로 떨어지는데, 그 기세가 백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아 그 이름을 용담 폭포라
했다 하나 오늘은 전혀 그런 위용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 **노산의 '노'자는 '山'변에 '勞'를 붙인 글자인데, 뜨지 않아
그냥 두 개를 썼음.
△중국에서 칭따오의 이름을 드높이는 칭다오 맥주
: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중국사람들은 단연 칭다오 맥주라고 답할 것이다 .그 만큼 칭다오는 중국 최대의 맥주 생산지이다. 지난 해 중국의 맥주 생산량은
2,230만 톤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을 자랑한다. 현재 중국에 있는 맥주 회사는 중국 기업만 해도 500개 이상이며 외국
합자 기업도 90개가 넘는다. 그만큼 시장쟁탈을 위한 브랜드 경쟁이 치열하다.
: 중국 맥주하며 떠오르는 브랜드는 일반적으로 칭다오다. 요즘은 규모면에서 최대를 자랑하는 베이징 근교에 위치한 중국 최대의
맥주기업인 옌징(燕京) 맥주의 추적을 받고 있지만 전통 깊은 맥주이며, 최고 수준의 유명한 축구단을 거느리고 있는 칭다오의 몇 째 안 가는
기업이다. 점심 때 여행사 사장님의 배려로 청도맥주를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선입감을 가지고 마셔서 그런지 시원하였다.
: 칭다오 맥주 축제는 석노인 국가여행도 기구에서 열리는데, 1991년에 결성된 이후 해마다 7월8일부터 2주간 대규모 개막 의식은
물론, 중국 드럼 콘서트와 불꽃놀이, 다양한 민속 예술 공연들이 펼쳐져 칭다오 여름의 최대 축제라는 명성을 굳혀가고 있다. 이 행사 기간에는
세계 곳곳에서 초청된 많은 맥주 브랜드들이 선보인다. 칭다오 여름 예술 축제는 맥주 생산에 대한 강연, 해변 스포츠 행사, 모래 조각 콘테스트,
중국 서예 전시회와 미술 작품 전시회 등이 열리는데, 중국 전통 민속 공연, 맥주 마시기 경연대회가 곁들여진다.
: 맥주 축제는 1903년 중국 최초의 맥주가 탄생한 칭다오 맥주의 명성과 지방 관광 활성화를 위해 199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열리고 있다. 청도는 독일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 동안 있었기에 맥주 가공기법이 뛰어나 지역 특산물로 개발하게 된 것이다. 축제기간 동안 청도는
매년 30개의 맥주 회사와 50만 명의 사람들이 이 축제에 참가하는데 이 축제는 세계적으로 칭다오를 알리는 계기와 더불어 경제와 무역 증진과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맥주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맥주 마시기 경연대회가 꼽힐 것이다. 청도의 맥주 축제는 독일
뮌헨의 옥토버 페스티발과 거의 흡사한데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기간 내내 각종 스포츠를 즐기다가 결전의 날이 다가오면 일렬로 서서 마시기 시합을
한다. 이 경연 대회는 누가 빨리 호흡 조절을 하며 잘 마시는가를 평가 기준으로 하며 우승자는 축제 기간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된다.
△칭따오의 전망대 소어산 공원과 소청도 공원
: 중국에서 마지막 점심을 마친 일행은 버스를 타고 소어산(小魚山)
공원으로 달렸다. 원래 이 작은 산은 이름이 없었다가 동네 이름을 따서 붙였다는데 조그만 공원으로 규모는 작지만 서울의 남산 공원을 연상시킨다.
들어서자마자 나무가 우거지고 높은 동산으로 이어져 동네 사람들의 아침 산책 코스로 알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왼쪽에는 벌레집이 숭숭 뚫어져있는
삭은 나무널빤지 모양의 돌이 이상한 모습으로 서 있고 곳곳에는 현무암 비슷한 괴석들이 세워져 있다.
: 정상에 오르니, 칭다오의 시내가 다 보인다. 왼쪽으로 해수욕장도 있고 오른쪽으로 소청도 공원의 정자도 보인다. 안개인지 아직도
황사현상의 영향인진 모르나 멀리 바라다 보이는 시내와 바다 그리고 섬이 뿌옇게 흐려져 똑똑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우거진 나무 사이로
시내를 구경하고 중앙에 뾰족하게 3층으로 지어놓은 전망대로 오른다. 각층에는 기념품을 팔고 있고 맨 위층인 3층에는 사방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 소어산 공원에서 내려온 우리는 마지막 답사지인 청도(靑島)로 향하면서 바로 이 도시 칭다오(靑島)란 이름의 유래를 듣는다.
칭다오 서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소청도라는 조그마한 섬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곳 섬이 아주 푸르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푸른 섬'이라는 뜻의
청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보다는 너무도 슬픈 비련의 전설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 '옛날 이 섬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하늘에 사는 선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서로 이루어 질 수 없는 비밀스런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신의 분노를 사게 되고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선녀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선녀가 죽은 이후에 선녀가 살아 생전에 님을
기다리며 연주하던 비금소리가 이 섬 주위에서 들리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이 아름다운 비금의 섬이라는 의미로 금도(琴島)라고 불렀다.' 한다.
그런데 이 금이라는 발음이 중국어로 청이라는 소리와 거의 비슷하여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가운데 청도란 이름으로 바뀌어 불러진다는
사연이다.
: 소청도로 가려고 긴 다리를 지나는데 오른쪽으로 몇 개의 묵은 군함이 보여 가이드에게 물으니, 저기가 바로 칭다오 해군 박물관이라
한다. 칭다오는 중국의 주요 해군기지가 있는 곳이다. 해변가에 있는 해군박물관은 육지의 상설박물관과 바다에 떠 있는 옛 군함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섬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은 것은 이외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부는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는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품이었다.
그 주위에는 소라를 비롯한 각종 고둥의 모양을 시멘트로 크게 만들어 잔디 위에 늘어놓았다. 남쪽 끝에는 호주 시드니 항에 있는 야외음악당의
모습을 약간 흉내낸 정자가 있었고 섬의 주위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오솔길을 만들어 놓았다. 일행 중 빨리 서둔 선생님들은 벌써 모터보트를
타고 한 바퀴 섬을 돌고 있었다. 우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섬 가운데 우거진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팽나무, 푸조나무, 꾸지뽕나무 등이
우거진 섬 중앙에는 옛날에 세워놓은 등대가 지금도 서 있어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알림> 다음에는 답사를 총
결산하는 <6> '돌아오면서 - 카훼리에서' 편이 이어집니다.
**사진 위는 태청궁 신상과 용담폭포이고, 아래는 노산
태청궁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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