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성산읍 관내 방어 유적 답사 (1)

김창집 2001. 10. 31. 09:23

▲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 거야

아침 여섯시
태양은 수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끄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 통오름(桶岳) -- 물매화, 그리고 설레는 억새들

성읍민속마을을 가로지르는 국도 16번 도로를 따라 난산리로 내려가는 고개. 왼쪽과 오른쪽에 통오름과 독자봉이 있어 오고가는 길에 자주 들른다. 작년 문학의 밤을 마치고 이튿날 행사에 참가했던 시인들을 모시고 성산포로 가다가 이곳 통오름에 들렸을 때 오름 전체에 깔려 있는 쑥부쟁이를 보고 어느 시인이 '서리가 내린 줄 알았다'고 탄성을 지른 곳이다.

오늘 쑥부쟁이는 고비를 넘겼고, 물매화가 한창이다. 하얗다 못해 파리하기까지 한 물매화가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다. 제주중학교 학생 32명까지 일행 80명을 모두 불러모아 들꽃의 아름다움을 얘기한다. 모시대와 섬잔대는 지금 드물어지고 딱지꽃과 쥐손이풀꽃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다만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카네이션의 원종 패랭이꽃이 앙증맞은 모습으로 여기저기 눈에 띈다. 늦은 봄에 산야 여기저기 피는 것은 술패랭이다.

꽃향유나 쑥부쟁이, 섬잔대 등 가을에 피는 꽃은 자줏빛이나 보랏빛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 보이는 유일한 노랑꽃은 미역취다. 오는 길, 동부산업도로변에서 토종국화의 하나인 들국화가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이런 풀밭에서는 보이지 않고 미역취만 꽃덩어리를 이루어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또, 하나 들꽃과 어울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찔레덩굴 열매이다. 풀밭에 줄을 뻗쳐 자라는 이 덩굴형 찔레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처럼 빨갛게 익어 들 꽃밭의 포인트가 된다.

성산읍 난산리 1976번지 일대에 비고(실제 산체의 높이) 43m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오름이지만 둘레 2,748m의 비교적 넉넉한 모습이다. 꽃밭을 지나며 물매화를 밟지 않으려 애를 쓰다보니, 자주쓴풀도 보인다. 내가 지금 일행들에게 보이고 싶어 데려가는 곳은 오름 기슭에 있는 어느 할머니의 무덤이다. 네모나게 담을 두른 이 무덤엔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 꽃을 좋아했는지, 완연한 꽃무덤을 이루었다. 팔월 초하룻날 벌초를 했을 텐데도 쑥부쟁이가 골고루 퍼지고, 꽃향유, 섬잔대, 물매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관심을 갖고 기웃거린다.

오름 전 경사면이 완만한 기복을 이루면서 둥글고 낮은 5개의 봉우리가 화구를 에워싸고 있고, 깊게 패어 있는 화구는 거의 원형 분화구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서쪽으로 좁은 골짜기를 이루며 용암 유출 수로가 형성되어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다. 동쪽사면 일부에는 소나무 숲을 이루고, 그 외 사면은 풀밭으로 되어 있으며, 화구 안에는 줄지어 조림된 삼나무를 경계로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철조망을 통과하여 북쪽 봉우리로 돌아가는데, 그곳에는 아주 작은 무덤들이 대열이 있다. 길 확장공사를 하면서 무연 분묘의 유골을 옮겨놓은 것이다.

산 모양이 물통, 밥통 같은 통처럼 생겼다 하여 통오름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둘레가 둥글 나직하고 가운데에 굼부리가 우묵하게 패어 있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오랜 옛날 섬의 산야가 물에 잠겼을 때 표선면에 있는 매오름은 꼭대기가 매의 머리만큼 물 위에 남았고, 성산읍의 본지오름은 본지낭(노박덩굴) 뿌리만큼, 통오름은 담배통만큼 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매끄러운 풀밭을 지나 동쪽 봉우리로 간다. 이 봉우리의 서면과 남면은 온통 띠와 억새로 이루어졌다. 멀리서 바라보는 억새밭은 때마침 세차게 불어오는 동풍에 살아나 너훌너훌 춤을 춘다. 바람은 억새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억새는 황폐한 저 비탈에 죽은 듯이 엎드렸다가 일진광풍이 불면 미친 듯 일어나서 시위 군중처럼 술렁인다. 억새꽃은 해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얼굴을 달리 하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 우리는 그 천의 얼굴의 실체를 뺨으로 확인하면서 말이 뛰노는 기슭으로 내려왔다.

△ 제주도의 방어유적(防禦遺蹟), 그리고 독자봉수(獨子烽燧)

봉수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적인 통신 시설이다. 높은 산이나 해안 구릉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 13세기)이나,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지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제주도내에 봉수가 설치된 것은 조선 시대 세종 때의 일이다. 당시 제주도안무사(濟州道按撫使) 한승순(韓承舜)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봉화(烽火) 후망(후望)은 22개소이고, 봉군(烽軍)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이미 도내 봉수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28년(1702)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면을 둘러가며 봉수와 연대가 무릇 63곳이 있다. 각각 별장(別將), 망한(望漢)과 봉군(烽軍)을 두어 밤낮으로 지킨다. 동서로 연락하며 영문(營門)에 도달하게 된다. 평상 때는 1개, 황당선(荒唐船)이 나타나면 2개, 지경(地境)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범하면 4개, 접전(接戰)하면 5개를 올린다. 밤에는 봉화를 하고 낮이면 연기로 하며 감히 어기거나 오류가 없다. 만약 구름 안개로 어두운 때는 구전(口傳)으로 서로 알린다.'

위 내용으로 보면, 도내 봉수·연대는 63개소였다. 이 봉수와 연대는 1895년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때에 따라 위치와 개수의 차이는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군사적인 통신망의 기능을 하였다. 제주에는 3성(城), 9진(鎭), 25봉수(烽燧), 38연대(煙臺)가 있었다. 봉수에는 별장과 봉군, 연대에는 별장과 연군이 있었으나, 시대에 따라 그 인원수는 증감이 있었다. 요원은 근처에 사는 백성으로 배치하여 1번(番, 組)에 별장 2인과 봉군 4명 내지 12명으로 조직하여 3교대로 수직(守直)하였다. 따라서, 봉군에게 다른 군역은 부과하지 않았다.

도내의 봉수대에는 크게 산(오름) 정상부에 설치된 봉수와 해안 구릉에 설치된 연대로 나눌 수 있다. 봉수와 연대의 기능적 차이는 봉수는 50리 밖을 감시하고, 연대는 현장 가까이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해상에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나 것을 봉수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그 배가 표류선(漂流船)인지 적선(賊船)인지의 분간은 연대에서 식별하여야 한다. 그리고, 연대는 직접 적과 대치해야 하는 위험도가 뒤따르는 만큼 요새적 시설이 필요했다.

봉수는 일반적인 경우 석축함이 없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봉덕 시설을 하였고 밑에는 이중의 배수시설로 도랑을 만들었다. 그러나, 남제주군 안덕면 감산리 이두봉(伊頭峯)에 있는 호산 봉수(호山烽燧)는 지대가 평지인 까닭에 타원형으로 석축하여 그 속에 봉덕을 시설한 예도 있다.

연대(煙臺)는 해안을 감시하기 용이하고 적과 전투시 유리한 곳에 돌로 쌓았다(石築). 축조 규정에 의하면, 높이 30척, 밑변은 1변의 길이가 20척인 4각형의 축대를 쌓았다. 연대 둘레 밖으로는 깊이 10척, 너비 10척의 해자(垓子, 밖으로 판 호)를 만들도록 되어 있으나, 도내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높이와 크기도 지형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 해안의 높은 지대에 4각형으로 쌓았다. 지형에 따라 원형으로 축대한 곳도 있다. 봉수와 연대의 주변 백보 내에는 봉화의 오인을 막기 위해 무당이나 통속적인 잡신제를 일절 금지하였다.

길을 가로질러 독자봉을 오른다. 10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소나무 별로 자라지 못해 꼭 정원수 같았는데, 그 동안 완전히 숲으로 변해버렸다. 북쪽으로 소나무와 풀밭의 경계선을 이루는 곳으로 올라간다. 앞의 통오름과는 달리 비고가 79m나 되는 볼록하게 솟은 오름이다. 분화구는 남동향으로 벌어진 말굽형의 U자형으로 길게 뻗어 내려 있다. 산 정상에는 봉우리 약간 비껴 산불 방화 초소가 서 있고, 봉수터 화덕이 있던 곳엔 측량 표지석이 두 개나 박혀 있는 것 이외는 흔적이 두 겹의 방화선과 함께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곳 봉수는 북동쪽에 수산(水山)봉수와 서쪽 남산(南山)봉수와 교신했었다.

▲ 수산진성과 눈물겨운 진안 할망당 전설

독자봉에서 내려와 16번도로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내려간다. 곳곳에 억새들이 손을 흔들어 우리를 맞는다. 엊저녁 비가 너무 내려 답사를 연기하라고 야단이었는데, 그냥 밀어붙인 것이 적중했다. 세게 부는 바람은 가을 분위기를 돋우고 억새를 더욱 부추기고, 비에 씻긴 수목은 한층 더 푸르게 빛난다. 귤림추색이랄까 중산간 곳곳에 잘 익은 감귤이 보기에 그만이다. 수산진성(水山鎭城)은 성산읍 수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진성(읍성 구실도 한 적이 있었음)으로, 1439년(세종 21)경에 쌓았으며, 성의 둘레는 1,164척, 높이는 16척이다. 동서에 각각 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하나의 우물과 객사 및 무기고가 있었다.

지금 수산초등학교 울타리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은 보존 상태가 좋은 편으로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곽의 형태는 거의 정방형에 가까우며 성의 서북면 모퉁이에 2개소의 격대가 남아있다. 동문지역은 과수원, 서문지역은 학교 관사가 들어서 있다. 동성(東城) 한 부분에는 '진안 할망당'이 있는데 이는 진성 축성과 관련하여 매우 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

내용인 즉, 수산진성을 쌓을 당시 성이 자주 무너져 내려 걱정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지나가다가 방안을 제시했다. 13세난 어린 소녀를 묻고 그 위에 성을 쌓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대로 실행한 결과 성은 다시 무너지지 않았고, 그 후 주민들은 처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당(堂)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에밀레종의 전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인명 희생으로 무엇을 이룬 눈물어린 전설로 미루어, 유독 성이 많은 이 섬에서 성을 쌓기 위한 도민의 고통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탐라순력도에는 '수산성조(首山城操)'라 하여 1702년(숙종28) 11월 초2일 제주도를 순력(巡歷)하던 중에 점심을 수산진에서 먹었다고 되어 있으며, 성안에서 성정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진성의 모습, 협재연대(俠才煙臺), 구수산(舊首山) 고성(古城)의 위치가 상세하게 나온다. 수산진성 내에는 건물 배치상황 뿐만 아니라, 샘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그림에는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가 참석, 조방장 유효갑(兪孝甲)을 비롯해 성정군 80명 및 군기에 대한 점검을 실시하였다. 수산진 관할의 봉수와 연대로 봉수에 지미(指尾), 성산(城山), 수산봉수(首山烽燧)가 있고, 연대에 협자(俠子), 오소포(吾召浦), 종달연대(終達煙臺)가 있다.

수산진성은 원래 정의현성의 관리하에 있다가 서기1910년 이후 얼마간 표선면 성읍리 정의보통학교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안의 토지 일부를 인근 사람들이 점유하여 집을 짓고 살기도 하고 토지를 농경지로 이용했다. 그러다가 1945년 수산초등학교를 건립하면서 성안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이주토록 하고 수산리민들이 자력으로 건물을 매입하고 교사(校舍)로 개축하였다. 학교 건물은 6·25 당시에는 피난민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 다음에는 '혼인지(婚姻池)와 삼성신화', '온평리 환해장성과 열운포 수전소', '섭지코지, 바람과 바다와 협자연대', '찻집 <시인과 사람들>의 채바다 시인'이 이어집니다.

▲ 사진 위는 '오름 나들이' 양영태 씨가 찍은 물매화, 오름 사진은 앞의 두 봉우리가 통오름인데 왼쪽 사면은 억새밭이고, 오른쪽은 들꽃동산,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이 독자봉이다. 아래는 사진.

- 2001년 10월 28일(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