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성산읍 관내 방어유적 답사 (2)

김창집 2001. 11. 2. 17:38

▲ 혼인지(婚姻池)와 삼성신화

 아무리 방어 유적 답사라지만 탐라국 삼성(三姓)의 혼인 신화가 전해지는 연못인 혼인지(婚姻池)를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답사 코스에 끼워 넣었었다. 성산읍 온평리 마을 서쪽 500여 평에 자리잡은 혼인지는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곳이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유적지임을 알리는 시설물들이 너무 많고 주변과도 어울리지 않아 산만하다. 반면에 유적지는 잘 정리해 놓아 숲과 암반 위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큰 연못에는 꽃이 져버린 수련(睡蓮)이 한가롭다.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낮은 곳에 알맞게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행사 치르기 그만이다. 바람의 영향을 잘 받지 않은 곳이어서 할 수 없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데 북쪽 소나무밭은 정리가 안되어 걷기에 힘들다. 눈에 안 띄는 곳이라고 방치하지 말고 통로에 풀이라도 베었으면 좋았을 것을. 앞장서 길을 뚫고 동쪽 숲 땅속에 자리한 자연 석굴을 찾아간다. 이른 바 삼성신화에 등장하는 3신인(神人)과 3공주(公主)가 혼인하여 첫날밤 신방(新房)을 차렸던 곳이다. 굴 주변에 잔디를 입히고 잘 정리해 놓아 분위기가 그만이다. 모두 불러모아 호젓한 분위기에서 신화(神話)를 들려줬다.

 아득한 옛날 모흥(毛興)이라는 곳에서 고을나(高乙那)·양을나(梁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3신인(神人)이 솟아났다. 처음 이들은 사냥을 하고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짝이 없어 혼인을 못한 가운데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동쪽 바다 위에서 오색 찬란한 나무상자가 떠 내려와 해안에 머무는 것이 보였다. 이들이 그 해안으로 내려가서 집채만한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는데, 거기에 관대(冠帶)를 하고 자의(紫衣)를 입을 사자(使者)가 나타났다. 사자가 옥함을 여는데, 그 안에는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가량의 3공주와 우마(牛馬), 그리고 오곡(五穀)의 종자가 있었다.

 사자가 3신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분 공주님을 두셔서, 혼인 시기가 다 되셨는데도 배필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는데, 서해 높은 산에 3신인이 있어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마땅한 배필이 없다는 걸 아시고, 신(臣)에게 명하여 3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3신인은 순서에 따라 3공주를 각각 배필로 정하고, 이들을 맞아 이 혼인지에서 혼례를 올리고, 그 함 속에서 나온 송아지·망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앗을 뿌려 태평한 생활을 누렸다. 이로부터 제주도에 농경과 목축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3공주가 들어있던 나무상자가 발견된 곳을 속칭 <쾌성개>라고 하고, 그 해안은 <황루알>이라고 불린다. 지금도 여기에는 3신인이 바닷가에서 처음 디딘 발자국이 암반에 아련히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이곳은 세 쌍이 짝을 이뤄 모흥혈이 있는 제주시 쪽으로 넘어가다가 연못에 몸을 씻고 이 굴에서 신방을 차린 것이다.

▲ 변질된 온평리 환해장성과 열운포 수전소

 성산읍은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지역이다. 그러기에 가까운 일본으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았다. 더욱이 도적떼들은 우도를 점령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걸핏하면 본섬에 상륙을 시도했다. 그 세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성산 일출봉 바로 아래 있던 진성을 고성(古城)으로, 다시 수산진성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별방진성도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으로 후퇴할 정도였다.

 환해장성(環海長城)은 제주섬을 둘러쌓은 길다란 성이다. 처음 시작은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로 들어오기 이전 고려 정부군이 미리 군사를 보내어 삼별초의 해안 상륙에 대비해 해안을 따라 삼별초가 상륙할 만한 해안 지점에 쌓은 성인데, 그 이후 지속적인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증축과 수축작업이 계속해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별로 쓸 곳이 없어지자 도로를 개설하면서, 산담 쌓기, 울타리 쌓기, 밭담 쌓기 등 필요에 따라, 또 4·3때 마을을 두르는 성을 쌓으면서 훼손시켜 지금은 성굽이 좀 남아 있는데,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이 곳 온평리 환해장성은 그중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곳인데, 해안가 도로를 따라 바닷가로 쭉 펼쳐져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치면 제주를 돌면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밭담, 돌담과 차이가 없지만, 자세히 보면 그 높이와 너비가 계속되는 것이 여느 담과 다르다. 근래에 와서 몇 곳을 복원해 놓아 대충 그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으나, 이로는 부족하고 고증(考證)을 거쳐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을 복원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렇게 방치해놓고 있는 형편이다 보니, 지금은 마을 주민들과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그 성 위에 돌을 괴여 놓고 탑을 쌓아 본질을 흐리고 있다.

 전선머리라 불리는 지금의 온평포구는 열운포 수전소(閱雲浦水戰所)가 있던 자리이다. 1437년(세종19)에 제주안무사 한승순(韓承舜)에 의해 제주 방어시설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었다. 즉 3성(제주읍성·대정읍성·정의읍성), 9진(김녕·조천·별방·애월·명월·차귀·동해·서귀·수산)이 마련되었고, 수전소로는 화북포·조천포·어등포·애월포·명월포·열운포·서귀포·색포(塞浦)·우포(友浦) 등 10곳이 있었다.

 이 열운포 수전소는 처음 오조포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보면 '열운포 수전소는 현 동쪽 20리에 있다. 판옥전선이 1척, 비상 양곡이 3석이며, 사군과 격군을 합하여 85명이다. 옛날에는 오조포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 포구로 옮겼다.'라고 나와 있다. 또한, 이 포구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선물입(私船勿入, 일반 배는 들어가지 말 것)'이라는 표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포구를 넓히고 현대식으로 시설하면서 옛 모습을 전혀 남기지 않아 아쉽기 그지없다.

▲ 섭지코지, 바람과 바다와 협자연대

 성산읍 신양리에서 바다 쪽으로 꾸부정하게 뻗어나간 반도가 영화 '연풍연가' 촬영지로 유명한 '섭지코지'이다. '코지'는 접미사 '-곶'의 제주말로 '지명 아래에 붙어서 반도형으로 생긴 갑(岬)을 이르는 말'이다. 제주도는 화산도여서 해변에 기암괴석이 많은데, 이곳 외돌개를 닮은 커다란 촛대바위에는 물새들 너무 많이 날아와 하얗게 변하고 있는 멋진 바위가 하얀 등대를 배경으로 포진해 있다. 조수간만의 차에 의해 파도 속에 형성되는 정경은 가히 일품이다.

 섭지코지 남쪽은 신양해수욕장으로 세계에서도 손꼽는 윈드서핑 적지이며, 북쪽으로는 일출봉의 멋진 모습을 한눈에 바라보며 즐길 수 있다. 모래와 바위 언덕으로 모래 위에 순비기나무들이 모래를 움켜쥐고 그 품안에 참나리를 키워 군락지를 이룬다. 지금은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주차장으로부터 연대를 거쳐 등대까지 갈 수 있는데, 주변엔 갯쑥부쟁이들이 피어 있고 갯바위에는 들국화와 털머위가 피어 있어 뜻 있는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제주도에는 38군데에 연대가 있었으나, 이 협자연대를 비롯하여 신산-온평 사이의 말등포연대와 표선 소마로연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35군데의 연대는 모두 원형을 잃거나 멸실되었다. 연대의 모양을 보면 위가 약간 좁아지긴 하지만 가로·세로는 약 8m이고 높이는 4m 정도인 직육면체이다. 날이 맑으면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오조포연대와 성산봉수, 서쪽으로는 수산봉수, 남쪽으로는 말등포연대를 직접 바라볼 수 있다.


△ 찻집 <시인과 사람들>의 채바다 시인

 원래는 성산 일출봉에 올라 성산봉수 터를 살피려 했으나, 지금은 거의 흔적이 없고 일출봉은 자주 올랐던 곳이어서 대신 돌아가는 길에 식산봉 앞 해안도로변에 위치한 찻집 <시인과 사람들>에 들러 채바다 시인으로부터 떼배 탐사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채바다 시인은 한국고대항해탐험연구소를 차려, 1997년 제주에서 일본 오도열도를 경유하여 일본 나가사키까지 11일간의 항해 끝에 고대해로 떼배 탐험을 성공시켰고, 금년 4월에는 고대 한·일 항로와 1천6백년전 왕인 박사 도일 뱃길을 복원하기 위하여 '한·일 고대항로 떼배 대탐사'를 8일간의 항해 끝에 성공시킨 분이다.

 집 한채를 터놓은 실내에는 탐사 때 있었던 기사와 사진으로 온통 장식되었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기호대로 차를 만들어 마시고 항아리에 차값을 놓고 가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답사객 80명이 들어가 앉아 소개가 끝나자마자 제주 떼배의 우수성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제주에 남아 있는 떼빼를 '테우'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속에서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한국해양문화의 큰 유산이라고 자랑한다.

 그가 왜 이 일에 그렇게 열심히 매달리고 있는지 '탐사 목적과 배경'을 들어본다.
한반도는 태평양시대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가 이 땅에 내려지면서 압록강을 시작으로 서해안을 따라 남해안을 거쳐 조류와 해류 그리고 바람을 이용한 원시항해인 표류항해를 거쳐 연근해 항해시대를 열어가면서 선사시대부터 끊임없이 한반도를 통한 선진문화를 경영했던 우리 선조들이 일본 땅으로 건너가면서 오늘날 고대 일본문화의 뿌리를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의 여러 지방에서 발굴되는 죠몽시대, 야요이시대, 아스카시대, 나라시대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들에서 입증되고 있다.

 일본 고대 국가 형성기인 기원전 3세기에서 백제가 멸망하는 7세기 중반까지만 하여도 백제, 가야 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많은 부족국가들이 다양한 해상로를 통하여 대량으로 민족이동이 한반도를 통해 이루워지면서 일본 고대 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은 일본 학계의 고고학, 인류 유전자 연구 조사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민족이 1천여년이 넘도록 인적, 문화적 이동으로 인하여 일본이라는 독립된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킨 역사적 사례는 세계 어느 민족의 이동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의적인 중요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외면되고 수수께끼 같은 전설처럼 여겨지는 것은 유구한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 국민으로써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가 부산에서 불과 50km내외에 대마도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와 인접한 이끼섬과 일본열도가 시인거리에 있어서 원시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쿠로시오해류(일명: 대마 해류)가 발달되고 있어서 이 해류와 북서 계절풍을 만나면 일본열도에 쉽게 닿을 수 있게 된다. 우리 나라 남해안에서 떠내려간 쓰레기들이 이 해류와 바람을 타서 일본의 여러 해안에 도착하여 골머리를 앓게 하는 것도 이러한 원시항해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 이처럼 옛부터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물길과 바람이 열려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는 노력은 문화의 세기를 맞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 나라가 태평양 시대의 중심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한일양국의 잃어버린 고대 역사들을 올바로 찾고 올바로 이해하는 문화적 접근 노력이 있을 때 세계 일류 국가로써의 위상을 한층 드높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일 고대문화의 이동 뱃길 탐사는 해양 민족의 자긍심과 민족 통일을 열어 가는 큰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1947년 4월 노르웨이 하이엘달(Heyerdahl)박사는 남태평양 라로이아섬이 문화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간 것임을 그들의 전래되어오는 원시배인 발사나무로 만든 떼배(콘티키호)를 타고 이를 입증하였으며 1971년 7월에는 남아메리카 잉카문명이 8천km가 넘는 바다를 건너 고대 이집트에서 전파되었다는 사실도 이들이 전래되는 원시배인 파피루스로 만든 갈대배(라2호)를 복원하여 이를 증명하였다.

 이처럼 배의 역사 속에서 고대 문화들이 또 다른 신세계를 찾아 전파되면서 발전해 왔다.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나라의 해양력은 곧 그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였듯이 이번 탐사로 인해 우리 선조들이 뛰어난 해양력과 해양에 대한 도전심 그리고 개척정신을 재발견하고 한일 양국의 문화의 뿌리가 하나임을 밝히는 제3차 항해탐사로써 양국의 국민은 물론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사실들을 바로 심어주고 바로 일깨워 주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 숙명처럼 바다 탐험에 나서는 제주 토박이

◇ 내가 어찌하겠소
`  채바다

백제가 일본으로 어찌 갔는지
가야가 열도로 어찌 갔는지
고구려, 신라가 어찌 갔는지
거기에 그들 분국들이 어찌 생겨났는지
나는 알겠소
그들이 노 저어 간 뱃길
그 후예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나는 알겠소
그들이 숨쉬고 있는
그 언덕 그 강가 나는 알겠소
천수백 년 넘는 비바람 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그들의 숨결이 와 닿는 것을
내가 어찌하겠소
내가 어찌하겠소

◇ 미쳐서 가는 길
` ----현해탄·4 채바다

미쳐서 가는 길은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런 마음 단단히 먹지 않으면
못 간다
죽어도 좋다 그 각오 없으면
더더욱 못 가는 길이다
천년 만년 전에도 그러했다
그 길 쫓아 나는 갔다
민족적 깡 없으면 더더욱 못 간다
통나무 열 개
배 같지 않으면서 배 같은 배
그런 대로 뿌리가 있는 배다
제주에서는 터위, 터배, 테우라고 부르는 배다
제주에서 비행기 타면 후쿠오카까지 30분 걸린다
그 물길을 열하루 걸려 갔다
미친 짓이다. 나도 안다
미치지 않으면 못 떠나는 뱃길이다

◇ 나는 절망할 것도 없다
` --현해탄 17·채바다

현해탄이여
나는 너에게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
길을 막아서며 검푸른 파도로 나를 삼킬 것 같아도
나는 절망할 것도 없다
패배할 이유도 없다
너에게 항복할 여유도 없다
나를 덮쳐 물 속 깊이 수장(水葬)시켜도
나는 수면에 다시 떠올라 돛을 올리리라
파도여
이제 분노를 진정하라
천년의 뱃길 알게 되고
만년의 물길 알게 되리라
끊임없이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고조선(古朝鮮) 이른 시기부

이 땅의 역사와 문화가 당당히 그 물길, 뱃길 따라
갔음을 알게 되리라

◇ 조선의 뱃길
` ---현해탄 18·채바다

바람의 날개마다
채찍질하는 이 뱃길

덮쳐오는 파도마다
철렁하는 이 가슴
악몽 같은 밤바다 귓전 울린다

죽음 생각하면 이 물길 찾았으랴
수평선 끌어안고 쓰러진다 해도
기어코 열도에 닿아 태극기 높이 휘날리리라


△ 사진 위는 구좌읍 종달리 생개납 돈짓당, 아래는 협자연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