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장굴 속에서 사굴(蛇窟) 전설을 들려주며
김녕리에 위치한 만장굴은 용암동굴(熔岩洞窟)인데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 화산 폭발시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겉은 식고 내부는 흐름이 지속되어 형성된 공간으로 길이가 13,422m인데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긴 동굴로 알려져 있다. 이 동굴은 원래 김녕사굴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중간이 함몰되어 위의 굴은 만장굴, 아래의 굴은 김녕사굴로 구분되었다. 사실 <탐라순력도>를 그린 1702년에는 사굴만 열려 있어 목사 일행이 이곳을 지나면서 굴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고 갔는데, 지금은 사굴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답사 신청도 안된 상태고 불 준비도 안돼 있어 만장굴만 구경했다.
우리도 만장굴 입구 오목한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도시락을 펼쳐 놓고 용암동굴의 형성과정을 얘기한다. 한라산 중앙에서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용암은 낮은 곳을 통해 바다로 흐른다. 이미 흐르다 굳어진 기반암 또는 용암 계곡에 다시 점성도가 작은 다량의 용암이 흐르고, 1,100℃ 정도의 용암은 공기와 접하는 표면 부분이 빨리 식으며 굳어진다.
두꺼운 용암층의 내부는 아직 흐물흐물한 상태이므로 외부에서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용암이 계속 이어지면서 안에 있는 용암의 막힌 부분을 부수면서 흘러나간다. 분출된 용암은 동굴이 통로가 되어 마치 하천에 물이 빠지듯 굴벽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면서 동굴 속을 계속 흐르게 된다. 이 용암이 빠져버린 곳이 동굴이며, 제주도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용암동굴이 존재하게 되었다. 다만, 협재굴은 용암 동굴 위에 쌓인 모레의 석회 성분이 빗물에 녹아 석회암 동굴의 형태가 더해지게 된 특이한 형태의 동굴이다.
이곳 만장굴은 동굴 지형의 규모나 지물의 특수성으로도 유명하다. 즉, 20m가 훨씬 넘는 천장 높이, 10m나 되는 굴 통로의 폭, 그밖에 3층으로 된 용암교 등이 그 특출함을 더해주는 것들이다. 굴 내부는 언제나 16∼17℃의 온도를 유지하며 동굴 제2입구에서 600m지점에 길이 3m의 타원형의 돌거북 형상은 제주도의 모습과도 흡사하며 벽에는 용암이 동굴 천장으로부터 흘러내리다 굳은 종유석과 벽의 가로줄 무늬의 용 날개문양이 굽이치고 있다.
한편, 조천성에서 하루를 묵은 이형상 목사 일행은 이튿날인 10월 30일, 이곳을 지나다 김녕사굴을 구경하게 된다. 그림을 보면 굴 위로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곳곳에 분산된 수행원들은 말을 매어놓고 앉아서 쉬고 있다. 목사는 가마에 앉아 횃불 속에 드러나는 굴속의 이채로운 광경에 심취된 모습이다. 출구에는 병사들이 불을 밝히고 경계하면서 목사 일행이 나오길 기다린다.
사굴(蛇窟)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에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이 굴 안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을 매우 괴롭혔다. 주민들은 해마다 15∼16세 되는 처녀를 제물로 바쳐 가까스로 화를 면하고 있었다. 중종 10년(1515) 제주 판관으로 부임해온 서련(徐憐)이 이를 알고, 이런 악습(惡習)을 퇴치하고자 주민으로 하여금 거짓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제사 도중 과연 큰 뱀이 나와 처녀를 삼키려 하자 서 판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창으로 뱀의 허리를 찌르고 불에 태워 죽였다. 이를 지켜보던 무당이 판관에게 말하길, 성안으로 돌아가되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판관은 말을 타고 달려 성 문 앞에 다다랐는데, 군사 한 명이 피비[血雨]가 몰려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결국 서 판관은 말에서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가 10여 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서글픈……
□ 별방진성의 '별방조점(別防操點)'과 '별방시사(別防試射)' 그림
1702년 10월 30일, 김녕굴을 본 목사 일행은 다음 순력지인 별방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군사 훈련과 성정군·군기·우마를 점검하고 활솜씨를 보기 위해서다. 별방진성(別防鎭城)은 하도리에 있는 조선시대 진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별방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390자이고 높이는 7자이다. 1510년(중종5) 장림(張琳) 목사가 이 땅이 우도에서 머무는 왜선이 가까이 댈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성을 쌓고, 김녕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기어 별방(別防)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진성은 해안가에 설치하여 해안으로 접근하는 왜적이나 적들을 신속하게 방어하기 위한 군사 시설물로 유사시 육지와 연락해 지원군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여 만든 제주의 독특한 군사 유적이다. 성은 비교적 제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해안도로변으로부터 높게 복원되는 성의 모습을 보면 어딘가 낯설어 보인다. 정확한 고증에 근거하여 쌓고 있는지 걱정이 앞선다.
'별방조점'의 그림을 보면, 별방진·황자장(黃字場)·지미봉수·하도 의탄리의 민가, 연대의 위치가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별방진은 만조시에 바다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되어 있으며, 동창·객사 건물들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당시 별방진의 조방장은 김여강(金汝江)이고, 성정군의 규모는 423명으로 화북성의 성정군의 수효와 같다. 이날 점검을 받은 황자장(목장 이름)의 우마수는 흑우 247수, 말 946필이며, 목자와 보인은 모두 187명이다. 별방진 내에 위치해 있던 동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은 2,860여 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사 일행이 점검을 끝내고 진내 객사에서 하루를 묵고 나니, 이튿날은 11월 초하루였다. 이번에는 병사들의 활 솜씨를 점검할 차례다. '별방시사'의 그림을 보면, 앞의 '별방조점'의 그림과 비슷한 형태이나, 별천자(別天字) 목장의 둔마(屯馬)를 점검하기 위한 원장과 사장을 별방진성 안에 마련해 놓은 것이 다르다. 마소를 점검하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목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208명의 병사가 활 쏘는 솜씨를 10명의 교사장이 지켜보고, 한쪽에서는 말을 점검하고 있다. 전날 목장에서 몰아온 말과 흑우(黑牛)를 하나씩 점검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Θ 문주란 자생지 토끼섬은 못 가고 대신 간 하도리 철새 도래지
별방진성 위에 올라 한바탕 설명을 하고 내려서서,
해안을 따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쪽으로 달린다.
이곳은 해안선이 길고 바위가 널리 깔려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다.
일제 때 해녀들이 건져 올린 수확물을 무조건 헐값으로 수매하는 바람에
너무도 억울하여 의의를 제기하다 붙잡히는 바람에
분연히 떨쳐 일어서서 해녀 항쟁을 벌인 곳이다.
해안도로 한쪽에는 제주 사람의 형상을 한 기이한 바위들을 모아놓고
노천에서 전시하고 있어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에게 사진 모델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토끼섬에 가서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문주란을 보려 했지만
밀물이 돼버려 한 곳이 물로 잠겨 못 건너고 말았다.
천연기념물 제182호,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제3호 지구로
온 섬이 온통 파란 잎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백설같은 꽃이 핀다.
토끼섬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조금 더 간 곳,
각종 철새들의 서식하고 있는 주변 경관이 뛰어난 하도리.
하도리 창흥동·동동·지미봉 기슭에는 수십만 평의 면적에
물과 갈대가 어우러져 있는데,
매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황새와 저어새 등 희귀조를 비롯
백로·갈옥·청둥오리·원앙 등의 철새들이 이곳에 보금자리를 튼다.
각종 철새들의 먹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경관이 아늑하여 겨울을 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또한 이곳에는 송어, 숭어 등의 양식장이 있어 철새들의 먹이가 된다.
해안에 하구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든 이곳은
주변의 울창한 숲과 한라산 전망이 매우 뛰어나
탐조(探鳥) 활동을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진 작가들도 즐겨 찾는다.
토끼섬의 문주란, 하도리 철새, 해녀들의 작업 모습, 푸른 바다와 백사장….
물때가 맞으면 소라, 고둥, 게, 군부, 삿갓조개 등을 잡을 수 있고
시간이 맞으면 해녀들이 잡아온 해산물을 직접 현장에서 사먹을 수 있다.
또, 저수지에서는 펄펄 뛰는 숭어를 사다가
해안가에서 숭숭 썰어 소주 한 잔 걸치는 맛.
이웃한 북제주군의 땅끝 오름 지미봉(地尾峰) 아래 종달리
해안가로 돌출한 배 모양을 한 전망대에 올라
갈매기 나는 바다와 우도, 그리고 성산 일출봉을 싫어지도록 바라보다가
돌아서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도 버리지 못할 정취다.
일행 중 몇 사람은 주머니를 뒤져 살아있는 숭어를 몇 마리 샀다.
제주시까지 오는 동안에 비닐 속에서 계속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즐겼다.
<사진> 위는 종달리를 지난 곳 식산봉 주변 철새도래지 모습이다. 건너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것이 지미봉이고, 그 건너에 하도 철새 도래지가 있다. 아래는 바농오름에서 억새와 같이 찍은 필자의 모습이다. 햇빛을 받아 눈이 거의 감겼다.뒤로 진하게 보이는 오름은 큰지그리오름, 왼쪽 멀리 보이는 오름이 성판악, 그 건너가 한라산이다.
김녕리에 위치한 만장굴은 용암동굴(熔岩洞窟)인데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 화산 폭발시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겉은 식고 내부는 흐름이 지속되어 형성된 공간으로 길이가 13,422m인데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긴 동굴로 알려져 있다. 이 동굴은 원래 김녕사굴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중간이 함몰되어 위의 굴은 만장굴, 아래의 굴은 김녕사굴로 구분되었다. 사실 <탐라순력도>를 그린 1702년에는 사굴만 열려 있어 목사 일행이 이곳을 지나면서 굴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고 갔는데, 지금은 사굴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답사 신청도 안된 상태고 불 준비도 안돼 있어 만장굴만 구경했다.
우리도 만장굴 입구 오목한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도시락을 펼쳐 놓고 용암동굴의 형성과정을 얘기한다. 한라산 중앙에서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용암은 낮은 곳을 통해 바다로 흐른다. 이미 흐르다 굳어진 기반암 또는 용암 계곡에 다시 점성도가 작은 다량의 용암이 흐르고, 1,100℃ 정도의 용암은 공기와 접하는 표면 부분이 빨리 식으며 굳어진다.
두꺼운 용암층의 내부는 아직 흐물흐물한 상태이므로 외부에서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용암이 계속 이어지면서 안에 있는 용암의 막힌 부분을 부수면서 흘러나간다. 분출된 용암은 동굴이 통로가 되어 마치 하천에 물이 빠지듯 굴벽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면서 동굴 속을 계속 흐르게 된다. 이 용암이 빠져버린 곳이 동굴이며, 제주도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용암동굴이 존재하게 되었다. 다만, 협재굴은 용암 동굴 위에 쌓인 모레의 석회 성분이 빗물에 녹아 석회암 동굴의 형태가 더해지게 된 특이한 형태의 동굴이다.
이곳 만장굴은 동굴 지형의 규모나 지물의 특수성으로도 유명하다. 즉, 20m가 훨씬 넘는 천장 높이, 10m나 되는 굴 통로의 폭, 그밖에 3층으로 된 용암교 등이 그 특출함을 더해주는 것들이다. 굴 내부는 언제나 16∼17℃의 온도를 유지하며 동굴 제2입구에서 600m지점에 길이 3m의 타원형의 돌거북 형상은 제주도의 모습과도 흡사하며 벽에는 용암이 동굴 천장으로부터 흘러내리다 굳은 종유석과 벽의 가로줄 무늬의 용 날개문양이 굽이치고 있다.
한편, 조천성에서 하루를 묵은 이형상 목사 일행은 이튿날인 10월 30일, 이곳을 지나다 김녕사굴을 구경하게 된다. 그림을 보면 굴 위로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곳곳에 분산된 수행원들은 말을 매어놓고 앉아서 쉬고 있다. 목사는 가마에 앉아 횃불 속에 드러나는 굴속의 이채로운 광경에 심취된 모습이다. 출구에는 병사들이 불을 밝히고 경계하면서 목사 일행이 나오길 기다린다.
사굴(蛇窟)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에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이 굴 안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을 매우 괴롭혔다. 주민들은 해마다 15∼16세 되는 처녀를 제물로 바쳐 가까스로 화를 면하고 있었다. 중종 10년(1515) 제주 판관으로 부임해온 서련(徐憐)이 이를 알고, 이런 악습(惡習)을 퇴치하고자 주민으로 하여금 거짓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제사 도중 과연 큰 뱀이 나와 처녀를 삼키려 하자 서 판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창으로 뱀의 허리를 찌르고 불에 태워 죽였다. 이를 지켜보던 무당이 판관에게 말하길, 성안으로 돌아가되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판관은 말을 타고 달려 성 문 앞에 다다랐는데, 군사 한 명이 피비[血雨]가 몰려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결국 서 판관은 말에서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가 10여 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서글픈……
□ 별방진성의 '별방조점(別防操點)'과 '별방시사(別防試射)' 그림
1702년 10월 30일, 김녕굴을 본 목사 일행은 다음 순력지인 별방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군사 훈련과 성정군·군기·우마를 점검하고 활솜씨를 보기 위해서다. 별방진성(別防鎭城)은 하도리에 있는 조선시대 진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별방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390자이고 높이는 7자이다. 1510년(중종5) 장림(張琳) 목사가 이 땅이 우도에서 머무는 왜선이 가까이 댈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성을 쌓고, 김녕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기어 별방(別防)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진성은 해안가에 설치하여 해안으로 접근하는 왜적이나 적들을 신속하게 방어하기 위한 군사 시설물로 유사시 육지와 연락해 지원군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여 만든 제주의 독특한 군사 유적이다. 성은 비교적 제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해안도로변으로부터 높게 복원되는 성의 모습을 보면 어딘가 낯설어 보인다. 정확한 고증에 근거하여 쌓고 있는지 걱정이 앞선다.
'별방조점'의 그림을 보면, 별방진·황자장(黃字場)·지미봉수·하도 의탄리의 민가, 연대의 위치가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별방진은 만조시에 바다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되어 있으며, 동창·객사 건물들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당시 별방진의 조방장은 김여강(金汝江)이고, 성정군의 규모는 423명으로 화북성의 성정군의 수효와 같다. 이날 점검을 받은 황자장(목장 이름)의 우마수는 흑우 247수, 말 946필이며, 목자와 보인은 모두 187명이다. 별방진 내에 위치해 있던 동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은 2,860여 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사 일행이 점검을 끝내고 진내 객사에서 하루를 묵고 나니, 이튿날은 11월 초하루였다. 이번에는 병사들의 활 솜씨를 점검할 차례다. '별방시사'의 그림을 보면, 앞의 '별방조점'의 그림과 비슷한 형태이나, 별천자(別天字) 목장의 둔마(屯馬)를 점검하기 위한 원장과 사장을 별방진성 안에 마련해 놓은 것이 다르다. 마소를 점검하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목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208명의 병사가 활 쏘는 솜씨를 10명의 교사장이 지켜보고, 한쪽에서는 말을 점검하고 있다. 전날 목장에서 몰아온 말과 흑우(黑牛)를 하나씩 점검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Θ 문주란 자생지 토끼섬은 못 가고 대신 간 하도리 철새 도래지
별방진성 위에 올라 한바탕 설명을 하고 내려서서,
해안을 따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쪽으로 달린다.
이곳은 해안선이 길고 바위가 널리 깔려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다.
일제 때 해녀들이 건져 올린 수확물을 무조건 헐값으로 수매하는 바람에
너무도 억울하여 의의를 제기하다 붙잡히는 바람에
분연히 떨쳐 일어서서 해녀 항쟁을 벌인 곳이다.
해안도로 한쪽에는 제주 사람의 형상을 한 기이한 바위들을 모아놓고
노천에서 전시하고 있어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에게 사진 모델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토끼섬에 가서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문주란을 보려 했지만
밀물이 돼버려 한 곳이 물로 잠겨 못 건너고 말았다.
천연기념물 제182호,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제3호 지구로
온 섬이 온통 파란 잎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백설같은 꽃이 핀다.
토끼섬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조금 더 간 곳,
각종 철새들의 서식하고 있는 주변 경관이 뛰어난 하도리.
하도리 창흥동·동동·지미봉 기슭에는 수십만 평의 면적에
물과 갈대가 어우러져 있는데,
매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황새와 저어새 등 희귀조를 비롯
백로·갈옥·청둥오리·원앙 등의 철새들이 이곳에 보금자리를 튼다.
각종 철새들의 먹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경관이 아늑하여 겨울을 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또한 이곳에는 송어, 숭어 등의 양식장이 있어 철새들의 먹이가 된다.
해안에 하구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든 이곳은
주변의 울창한 숲과 한라산 전망이 매우 뛰어나
탐조(探鳥) 활동을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진 작가들도 즐겨 찾는다.
토끼섬의 문주란, 하도리 철새, 해녀들의 작업 모습, 푸른 바다와 백사장….
물때가 맞으면 소라, 고둥, 게, 군부, 삿갓조개 등을 잡을 수 있고
시간이 맞으면 해녀들이 잡아온 해산물을 직접 현장에서 사먹을 수 있다.
또, 저수지에서는 펄펄 뛰는 숭어를 사다가
해안가에서 숭숭 썰어 소주 한 잔 걸치는 맛.
이웃한 북제주군의 땅끝 오름 지미봉(地尾峰) 아래 종달리
해안가로 돌출한 배 모양을 한 전망대에 올라
갈매기 나는 바다와 우도, 그리고 성산 일출봉을 싫어지도록 바라보다가
돌아서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도 버리지 못할 정취다.
일행 중 몇 사람은 주머니를 뒤져 살아있는 숭어를 몇 마리 샀다.
제주시까지 오는 동안에 비닐 속에서 계속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즐겼다.
<사진> 위는 종달리를 지난 곳 식산봉 주변 철새도래지 모습이다. 건너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것이 지미봉이고, 그 건너에 하도 철새 도래지가 있다. 아래는 바농오름에서 억새와 같이 찍은 필자의 모습이다. 햇빛을 받아 눈이 거의 감겼다.뒤로 진하게 보이는 오름은 큰지그리오름, 왼쪽 멀리 보이는 오름이 성판악, 그 건너가 한라산이다.
'향토문화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 속의 섬 -- 우도(牛島)'를 찾아서 (2) (0) | 2001.12.31 |
---|---|
'섬 속의 섬 -- 우도(牛島)'를 찾아서 (1) (0) | 2001.12.26 |
재미있는 영화와 곰 인형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 (0) | 2001.12.06 |
성산읍 관내 방어유적 답사 (2) (0) | 2001.11.02 |
성산읍 관내 방어 유적 답사 (1) (0) | 2001.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