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신을 향한 인간들의 자취⑥

김창집 2007. 1. 13. 00:14

-- 탐라문화보존회 앙코르와트 답사기

 

 

                             * 바이욘 사원의 '앙코르의 미소'로 알려진 석상  

 

▲ 동남아시아의 고대 크메르제국
 
 캄보디아의 옛 크메르제국은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있었던 힌두교와 불교의 신권 국가였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정치체제를 취하였고, 특히 브라만교의 종교적 권위가 왕권을 지탱하였다. 인도문화에 침투된 상층 지배계급에 대하여 하층 일반민중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부역(賦役) 의무를 진 평민, 병역 의무를 진 평민 및 부채(負債), 전쟁포로, 범죄에 유래하는 노예가 그것이다.

 

 지배계급과 일반민중의 차별은 매우 엄격하여 의식주까지 뚜렷이 달랐다. 당시 크메르의 문화수준이 높았던 것은 13세기에 원나라 사신을 따라 갔던 주달관(周達觀)의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잘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크메르의 승려들은 이미 팔리어(語)의 책을 읽고 독자적인 문자를 지녔으며, 5진법(進法)에 의한 수(數), 13개월의 연력(年曆), 7일의 요일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제국의 발전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9세기 말 야쇼바르만 1세의 전국통일, 11세기초 수르야바르만 1세의 영토 확장, 12세기 말 수르야바르만 2세의 참파 침공 및 앙코르와트의 건립,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한 참파 제압과 현존하는 앙코르 톰 건설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 이후 국력이 쇠퇴해졌으며, 타이에서 일어난 아유타야왕조의 압박을 받아 1431년 수도가 함락됨으로써 앙코르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 앙코르 매직버스 홈(http://goangkor.com.ne.kr/)의 약도
     

▲ 자야바르만 7세와 앙코르 톰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81∼1219 치세)는 크메르 제국의 후기의 성군(聖君)으로 도읍인 앙코르 톰을 재건하고 병원, 숙역(宿驛), 도로를 건설했으며, 여러 곳에 대가람을 건립했다. 앙코르 왕조 최후의 영광기를 맞아 번성하였으나 그의 사후 캄보디아는 쇠퇴하였다.  캄보디아는 국내의 반란과 동방(東方)의 이웃나라 참파의 침입으로 한 때 혼란하였으나, 그가 수도 앙코르를 점령하고 있던 참파를 몰아내고 즉위한 후, 참파를 공략하여 병합하면서 지금의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앙코르 톰(Angkor Thom)은 캄보디아 앙코르문화 유적으로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톰은 크다[大]는 뜻을 나타내므로 앙코르 톰은 '거대한 도시'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유구(遺構)는 자야바르만 7세가 왕국의 수도로서 1200년경에 조영(造營)한 것이다. 한 변이 3km인 성벽의 정사각형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중앙에는 세계의 중심으로 보이게 한 바이욘 묘(廟)가 높이 솟고, 그 동서남북으로 추축대로(樞軸大路)가 도시를 4분하며 2추축이 성벽과 만나는 곳에 왕도의 문이 4개, 왕궁에서 동으로 뻗은 대로 위에 1개,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 5개의 문은 앞면에 돌의 커다란 뱀을 껴안은 거인상(巨人像)의 열(列)을 난간으로 한 육교를 끼고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탑문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바이욘 묘는, 그보다 반세기 정도 앞서 세워진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문화의 쌍벽을 이룬다. 코르톰의 대표적인 건물인 바이욘 신전은 약 20만개의 바위를 끼워 맞춰 멋진 조각상을 연출해낸 멋진 걸작품이다.

 

 

 

                             * 돌더미처럼 보이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바이욘 사원  

 

▲ 앙크로 톰의 남문을 지나며
 
 앙코르 톰으로 들어가는 남문 앞에는 코즈웨이라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 양쪽에 인도의 대표적 전설인 '젖 바다 휘젓기'에 나오는 신 54명, 악마 54명 모두 108개의 석상이 양쪽으로 나누어 세워져 있어 난간 구실을 하고 있다. 앙코르와트에서 이미 이 신화의 부조를 보았지만 그 부조에서 튀어나온 우람한 몸집을 한 석상들이 커다란 뱀인 바수키(Vasuki)를 끼고 당기는 모습이다.

 

 사실 앙코르와트 벽의 부조는 암리타의 생성을 위하여 신들과 악마들이 바수키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잡고 서로 잡아 다니는 줄다리기의 모습이다. 악마들은 다섯 대가리가 달린 바수키의 머리로부터 배꼽가지 91명이 나열하고, 신들은 만다라산을 휘감은 바수키의 몸통으로부터 꼬리까지 88명이 나열해 서로 당기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것을 과감하게 뛰어넘어 양쪽에 나란히 배열해 놓은 것이다.

 

 도올 선생의 '앙코르와트, 월남가다'에 나오는 부조의 줄다리기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뱀 바수키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악마의 모습은 깃털이 달린 투구와 부릅뜬 눈과 튀어나온 눈동자, 그리고 양 눈썹 사이의 흉악한 주름, 아랫입술 위로 삐져 나온 송곳이빨, 우람찬 팔뚝, 깊은 배꼽과 주름 등으로 그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반대편 왼쪽 겨드랑이에 바수키 뱀을 끼고 있는 신들의 모습은 악마의 모습에 비하면 매우 나약하고 소극적이며 곱상하기만 하다.' 

 

 석상들은 많이 훼손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앙코르톰은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해자를 가로질러 들어가는 다리는 5개가 대문 역할을 하는 5개의 웅장한 코프라가 우뚝 서 있다. 그 문은 코끼리를 타고 오갈 수 있도록 조금 높게 되어 있어 중형 버스가 양쪽 10cm씩 사이를 두고 수없이 드나들고 있다. 이 남쪽 코푸라를 지날 때, 안내자가 기사의 곡예 운전에 박수를 보내라고 유도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 앙코르의 남문에 있는 젖 바다 휘젓기의 석상

 

▲ 앙코르 톰의 형태 

 

 앙코르와트는 신이 거처하는 장소여서 들어가는 곳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앙코르 톰은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동쪽에 사방에 네 개, 동쪽에 하나 더해서 도합 다섯 개의 다리가 있다. 앞서 적어놓았듯이 앙코르 톰은 고대 크메르제국이 가장 번성했을 때 자야바르만 7세와 그의 승계자가 이룩해놓은 도시다. 그 안에는 10만 명 정도가 기거했다고 하며 많은 사원과 테라스, 광장, 왕궁, 그리고 많은 승려, 군인, 관료들의 주택이 있었다. 

 

 앙코르의 유적을 이해하려면 주달관(周達觀, 저우따꾸안)의 기록이 큰 참고가 된다. 그는 원나라의 말기의 사람으로 크메르제국 말기인 1295년 6월에 이곳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와서 보고들은 것을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다. 특히 정치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당시 크메르 주민들의 생활상을 41개항으로 나눠 적고 있다. 그의 기록은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라 하는데, 정사로는 남아 있지 않고, 명나라 때 도종의(陶宗儀)가 엮은 '설부(說 )' 등에 실려 있다. 그 기록에 이르되,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바이욘)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고. 그 옆에는 20여 개의 탑과 수백개의 돌로 된 방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 동쪽에는 황금 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선 황금 다리가 있고 양쪽에는 8개의 황금 부처상이 돌로 된 방을 따라 나열되어 있다. 황금탑 북쪽에는 청동으로 된 탑(바푸온)이 솟구쳐 있고 그 북쪽에는 황금탑(바이욘)보다 더 높을 지도 모를 황금탑(피미아나가스)이 역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데, 그 아래에는 10개도 넘는 방들이 있어 참으로 장관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 탑에서 북쪽으로 400m 즈음에는 왕의 거처가 있으며 왕궁 위쪽에는 또 다른 황금탑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이러한 광경을 보는 외국상인들은 입 모아 "캄보디아는 대단히 부유하고 우아한 나라"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우리나라의 앙코르 문명을 소개한 책으로 서규석의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와트'가 있는데, 이곳에 주달관의 '진랍풍토기'가 완역되어 있다.
 

 

                                              * 바이욘 사원의 사자상  

 

▲ 앙코르 톰에 있는 것들

 

 우선 한가운데 바이욘 신전이 있다. 그러나 앙코르와트가 치밀한 설계로 이루어진 인공적인 건축물인데 비해 바이욘은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건축물로 높게 평가받는다. 또 앙코르와트가 지엄한 힌두교 사원이라면 앙코르톰은 기초는 힌두교에 위는 불교를 얹은, 즉 힌두교 위에 승화된 불교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그 불교의 관음보살상은 바로 자야바르만 7세의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바이욘 서북쪽에는 앙코르톰이 건설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바푸온 신전과 삐미아나까스 등과 함께 왕궁이 있었고, 동북쪽은 왕궁의 확장 부분으로 테라스와 왕실 의식을 치르던 왕실 정원이 있다. 그 외 남쪽 지역에는 일반 가옥들이 있었으나 신전 이외는 진흙, 벽돌, 목재 등의 건축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1,200년의 세월을 감당치 못하고 모두 유실되어 지금은 거대한 나무들로 꽉 찬 밀림을 형성한다. 

 

 앙코르톰은 도시 자체가 하나의 도성(都城)으로 볼 수 있다. 끊임없는 전쟁을 겪어야 했기에 신성한 앙코르 신전을 수호할 난공불락의 성이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앙코르톰은 정확하게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성벽은 3km, 금강석처럼 단단한 라테라이트 벽돌을 8m 높이로 쌓았고, 성벽의 외곽을 둘러 폭 100m의 해자를 팠으니 물에 젖은 적군은 성벽을 기어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앙코르 톰 주변에는 넓은 논밭이 펼쳐져 식량 조달이 쉬웠다고 하는데 이 해자는 단순히 전략적 목적 이외에 농경지에 물을 조달하는 주요 수원지 역할도 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것 외에도 앙코르 지역 북쪽에 자야타타카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드넓은 해자를 바라보며 선 인드라 신은 보호자 역할 이전에 홍수의 신이요 비의 신으로 농경민들이 숭배했으니 이 물로 지어진 쌀은 인드라 신의 은총을 담은 소중한 양식이었다.

 

 

                        * 앙코르 톰으로 들어가는 남문의 젖 바다 휘젓기에 나오는 석상들 

 

♬ 파가니니 works for violin and Gui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