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물관대학 수강생과 함께 한 하루[2004. 10. 10.]
▲ 박물관대학과 탐라순력도에 대한 이해
박물관대학은 제주시와 제주대학교 박물관이 시민 평생 교육 차원에서 개설해 놓은 교양 강좌다. 제주시가 운영하고 있는 우당도서관 소강당의 좌석수에 맞춰 1년에 120명을 모집하여 1년 동안 100분씩 40강좌를 개설한다. 토요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실시하는 강의 내용은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전국에서 이름 있는 강사와 지역의 유명 인사가 동원된다.
금년 12기를 맞는 동안 해마다 2 :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비교적 인구가 적은 도시인 제주시인지라
서로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한 장소에 모여 공개 추첨하여 합격자를 결정함으로써 의혹을 없앤다. 해마다 동원되는 강사의 면면을 보면, 미술사의
유홍준 교수, 풍수지리 최창조 교수, 인류학 전경수 교수, 무용 이애주 교수, 도자기 최몽룡 교수, 탑 정영호 교수, 고고학 이청규 교수 등
이름만 들어도 인지도 높은 분들이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 4차례의 도내 답사와 1차례의 도외(국내) 답사를 실시하는데, 이번에 두 번째 답사로
탐라순력도와 방어유적 답사를 떠나는 날이다. 전날 밤 11시경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가 검은 구름을 다 걷어가 버린지라 하늘이 너무 맑아
있어 이 날 참가한 65명의 수강생들이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여행을 떠나는 마음은 한 가지인 듯 싶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선생이 제주목사로 재임 당시인 숙종 28년(1702)에 제주도
관내를 순력하면서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자세히 기록한 특이한 형태의 지리서로 행사 장면을 화공 김남길(金南吉)로 하여금 40폭의
채색그림으로 그리게 한 화첩이다. 보물 제652-6호로 제주시청에 보관 중이며 43면(그림 40, 서체 3)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그림을
통해서 300년 전 제주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 민속 유적 와흘리 신당(神堂) - 하로산당
두 대의 시청 버스에 나눠 탄 일행은 시내를 벗어나 다 익어 가는 금빛 감귤과 은빛 억새의 물결을 바라보며 동부 관광도로로 접어들어 봉개동에서 16번 중산간 도로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나온 것도 그렇거니와 운치가 있는 중산간 마을의 풍광, 그리고 가을 풍경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먼저 들른 곳은 길가에 자리한 와흘리 하로산당이다.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있는 와흘 마을의 이 신당의 원이름은 '와흘리 하로산당'이다. 3∼4백년 된 팽나무 두 그루가
있어 신령한 위엄을 느끼게 하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신당이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마을제를 실시하는데 음력 정월 14일 '신과세제', 7월 14일
백중마불림제'로 두 번 치러진다. 와흘리의 마을 당굿은 마을 사람 전체, 남녀 공동으로 치러지는데 원래의 마을굿의 형태 그대로 보여준다.
원래 이런 곳에 답사자를 데리고 들어서면, 일부 종교인들 중에는 거부감을 솔직히 드러내는 분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위의(威儀)가 드러나는 커다란 팽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다가 이번에 정비하면서 울긋불긋한 물색(物色)을 수북히 걸어놓아 쉽게 압도당한다. 나는
먼저 이곳은 미신(迷信)으로서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선인들의 남겨놓은 민속 유산으로 봐줄 것을 당부하고 나서 얘기를
시작한다.
'논흘 산신당 본풀이'에 의하면, 이 당의 당신(堂神)은 송당 본향당 당신의 열 번째 아들인 백주도령과 여신 서정승
따님아기, 두 신을 모시는 곳이다. 외래 종교가 유입되기 이전에는 마을을 열게 되면 모두가 추렴을 하여 그 마을을 지켜주고 병마와 액운을
막아주는 신을 모시는 이런 신당(神堂)부터 세운다. 그리고, 이곳에서 당을 지키면서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무당을 정해 두고 정초와 혹 무슨
일이 있을 때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던 곳이다.
▲ 대록산에서 상상해본 '교래대렵' 행사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두 장 그림의 현장을 살피기 위해 억새가 손짓하고 들꽃이 반기는 대록산으로 들어섰다. 나지막한 오름을 향해 맑은 공기를 마시고 눈앞에 펼치진 자연 풍광을 바라보면서 나오길 잘 했다는 듯 모두가 싱글벙글이다. 주위에 몰리는 사람들에게 들꽃 이름을 말해주기도 하고 주위에 펼쳐진 오름 이름을 들려주며 중간쯤의 지점에 잠시 쉬게 하고는 물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피어 있는 들꽃의 이름을 들려준다. 곳곳에서 널려 있는 꽃 중에는 쑥부쟁이가 제일 많고 다음으로는
쥐손이풀꽃과 같은 과의 이질풀꽃이다. 그밖에도 심심찮게 야고, 개민들레, 엉겅퀴, 마타리, 참취, 미역취, 바디나물, 산부추, 쇠서나물,
고마리, 여뀌, 이삭여뀌, 등골나물 등도 보인다. 올라가면서 숲에서 한라돌쩌귀, 며느리밥풀꽃, 용담꽃 등 귀한 것이 발견되고, 양하꽃은 시기가
늦어 찾지 못했는데 내려오면서 처음으로 해맑은 물매화를 발견했다.
대록산은 소록산과 맞닿아 있는 474.5m의 나지막한 오름으로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해 있는데, 앞으로 사설 비행장인
정석비행장이 펼쳐지고, 비행장과 제동목장을 오름들이 감싼다. 이곳 벌판에서 '교래대렵(橋來大獵)'과 '산장구마(山場驅馬)'가 행해졌던 곳인데,
1702년(숙종28) 음력 10월 11일, 이 교래 벌판에서 임금님께 진상하기 위한 사냥을 벌이는 그림이 '교래대렵(橋來大獵)'이다.
당시 제주에는 산짐승으로 노루, 사슴, 돼지, 오소리 등과 날짐승으로 꿩, 까마귀, 솔개, 참새 등이 서식했다. 당일
사냥에 참가한 관원은 삼읍 수령과 감목관의 지휘아래, 말을 타고 사냥하는 마군(馬軍) 200명, 걸어서 짐승을 모는 보졸(步卒) 400여명,
그리고 총을 쏘는 포수(砲手) 120명이다. 이 날의 사냥 수획물을 보면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꿩 22마리….
그림에는 여문영아리, 구두리, 대록산, 소록산, 번널오름, 검은오름, 따라비오름 이름도 나온다.
▲ 벌판에서 장엄하게 펼쳐진 '산장구마' 행사
대록산 정상에 다다라 남서쪽 짧은 풀이 잔디처럼 깔린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앞에 번듯하게 펼쳐진 정석비행장을 바라보며 그림을 펼쳐 '교래대렵'과 '산장구마(山場驅馬)' 행사를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볼품 사나워진 앞의 오름에 자꾸 눈이 간다. 우리 나라 유일의 민간 비행장인 정석비행장 터를 고르기 위해 저 소록산을 파헤쳐 흙을 가져갔기 때문에 산은 3분의 1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소나무를 심어놓아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교래대렵이 있고 나서 나흘 뒤인 1702년 음력 10월 15일에는 이곳에서 '산장구마' 행사가 벌어진다. 산장(山場)에
흩어져 있는 말을 몰아다 일정한 장소에 모으고 마필(馬匹) 수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과거 원나라에서 이곳에 목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제주도 중산간에서 나는 말은 전국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할 정도였다.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만들고 곳곳에서 놀고 있는 말을 한 곳에 몰아다가 1년 동안 키워놓은 이 지역의 말은 모두 몇이고,
그 중에서 진상할 수 있는 말, 1년을 더 키워야 진상할 수 있는 말은 몇 마리인지 필요한 등급으로 분류해 점검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이 날
동원된 인원을 보면 그 규모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날 목사는 물론 제주판관, 감목관, 정의현감이 참여한 가운데 결책군(結柵軍, 사장과 원장의 목책을 만드는 군인)
2,602명, 구마군(駒馬軍, 말을 모는 임무를 맡은 군인) 3,720명, 목자(牧子, 말의 직접적인 관리자)와 보인(保人, 목자의 경제적
기반의 일부를 제공하는 사람) 214명이 동원되고 있다. 그 때 목장에서 점검한 말의 수는 2,375필이었다. 그림 속의 광경을 바라보며 신이
나서 열중하다 보니 약속된 점심 시간이 지나고 있어 재촉해 산을 내려왔다.
▲ 정의현성을 복원한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이었던 성읍민속마을에서 흑돼지 불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감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신다는데도 억지로 권해 할 수 없이 좁쌀 동동주 석 잔을 마셨더니 속이 뜨뜻해지면서 얼얼하다. 동동주가 너무 달콤해 멋도 모르고 마신 아줌마들의 얼굴에 홍조를 띤 것을 서로 보면서 깔깔 웃는 것이 철없는 소녀들 같다. 나오려는데 아침에 배웅해 보냈던 우리 오름 팀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선다.
정의현의 역사는 조선 태종 16년(1416) 정의와 대정에 2현이 설치되면서 시작된다. 안무사(按撫使) 오식(吳湜)이
제주섬의 동서간 거리가 멀어 방어가 불편하므로 조정의 재가를 받아 산남 2백 리 지역을 분할해 동쪽을 정의(旌義)라 하고 서쪽을 대정(大靜)이라
하여 각각 현감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태종 18년(1418) 봄 대정 현감 유신(兪信)이 현성을 지금의 고성리(古城里)에 축성했는데 둘레가 2,800여 척,
높이가 10척이었다. 그 후 고성리가 우도(牛島)와 가까워 아침, 저녁으로 고각(鼓角) 소리에 태풍이 자주 일면서 농사가 흉년이 되고 왜적이
번갈아 침입하니, 세종 5년(1423) 봄 안무사 정간(鄭幹)이 고성의 현성을 지금의 성읍리로 옮겨 쌓았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이곳은
성의 둘레가 2,986척이고, 높이가 13척으로 되어 있다.
성읍민속마을은 미흡하나마 객사가 복원되었으며, 유형 무형의 많은 문화 유산이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옛 마을 형태의 민속
경관이 잘 유지되고 있어 민속마을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곳에는 민가, 향교, 옛 관공서, 돌하르방, 연자방아, 비석 등의 유형 문화 유산과
중산간 지대 특유의 민요, 민속놀이, 향토 음식, 민간 공예, 제주 방언 등의 무형 문화유산이 아직까지 전수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느티나무, 팽나무 등으로 500년 도읍지로서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 조선시대 제주도의 방어 시설과 독자봉수
점심 직후여서 성 남문루에 올라 마루에 앉혀놓고 주로 방어유적과 성(城)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많은 분들이 자주 오는 곳이어서 시간 관계로 아예 들어가는 것을 다음으로 유예했다. 이들이 금년말에 수료하면 한 달에 한 번 도내 답사와 1년에 두 번 도외 답사를 하는 탐라문화 보존회원이 되어 나와 답사를 계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둘러 다시 차에 타고 봉수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독자봉으로 향했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 시대의 통신 시설이다. 높은 산이나 해안
구릉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제주도내에 봉수가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 세종 때의 일이다. 당시
제주도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봉화(烽火) 후망( 望)은 22개소이고, 봉군(烽軍)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이미 도내 봉수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독자봉수는 성산읍 신산리 망오름(독자봉)에 있는 봉수다. 독자봉은 높이 159m로 지금은 20년쯤 되는 소나무가 도처에
심어져 있으나 봉수대가 있었던 정상은 나무를 심지 안았다. 봉수터 가운데 산불 감시초소가 들어서 있기는 하나 봉수대의 형태는 뚜렷이
알 수 있다. 독자봉수는 조선 전기에 사지악(沙只岳)봉수 혹은 오음사지악(吾音沙只岳)봉수로 명명되어 동으로 수산(水山)봉수에 응하고 서로는
남산(南山)봉수에 교신하였다.
▲ 수산초등학교가 들어선 수산진성
처음 계획대로라면 연대를 보기 위해 섭지코지를 갔을 터인데 이번 답사에서는 생략하고 수산진성으로 행했다. 작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올인' 촬영 세트가 그곳에 만들어진 뒤로는 일요일에 그곳으로 갔다가 잘못하면 차가 밀려 나가고 오는데만 1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연대(煙臺)는 바닷가에 정방형으로 쌓아올린 돌무더기로 적을 탐지하고 알리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수산진성은 성산읍 수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진성으로, 1439년(세종21)경에 쌓았으며 성의 둘레는 1,164척, 높이는
16척이다. 동서에 각각 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하나의 우물과 객사 및 무기고가 있었다. 현재 수산초등학교 교사와 운동장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상태가 양호하며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성곽의 형태는 거의 정방형에 가까우며 성의 서북면 모퉁이에 2개소의 격대가 남아
있다.
동문지역은 과수원, 서문지역은 학교 관사가 들어서 있고, 동성 한 부분에는 '진안 할망당'이 있는데, 이는 수산진성
축성과 관련하여 매우 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 즉, 수산진성을 축성할 당시 성이 자주 무너져 내려 걱정하던 중 한 스님이 그 방안을 제시했다.
13세의 어린 소녀를 묻고 그 위에 성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그대로 실행한 결과 성은 다시 무너지지 않았고 그후 주민들은 처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당을 만들었다.
성담을 울타리로 주변에 나무를 심어 울창하게 자란 성읍초등학교 교정엔 곱게 잔디가 깔려 있어 아늑하다. 올 때마다 고향의
품속 같은 느낌이 들어 한 번 누어 뒹굴고 싶은 곳이다. 1992년 독서신문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로 뽑혔었는데, 12년이 지난 지금은
훨씬 더 아름답게 가꾸어졌다. 이곳 나무 그늘에서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잔디밭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중산간을 통해 돌아오는 길에는 코스모스와
억새가 유난히 빛났다.
♬ Amour Secret (숨겨놓은 사랑)/ Hel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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