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노로오름과 단풍[2004. 10. 24.]

김창집 2004. 10. 2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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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주기로 의견을 모은 단풍

 

▲ 길 위에서 주절거리기

 

 단풍을 만나러 한라산 영실 어디쯤 가보려던 생각은 1100도로 어리목 입구에 이르기도 전에 수정되어야만 했다. 지난 주 늦은 시간엔 영실 입구에 차도 진입하지 못했다는 소문도 들은 터고, 일행 중 한 사람의 전하는 얘기로 어제 오후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차의 진입을 막을 정도로 몰렸다는 데는 더 이상 영실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어리목 입구가 저 만큼인데도 차가 밀려 아예 옆에 세워두고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앞 운전석에 앉으니 9시 반을 넘긴 햇빛이 바로 얼굴에 내리쬐어 덥긴 하지, 길은 시원스레 터져 주지 않고 오르막의 차들은 뒤로 슬금슬금 미끄러지기도 해서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답답하기만 하다. 문을 열면 차가 뿜어내는 매연 때문에 구역질이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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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0도로 휴게소에 세운 솟대


 차가 거의 움직이지 않자 누군가가 "여기서는 교통 정리도 않나?" 하고 막 짜증내는 소리를 한다. 겨우 어리목 입구에 이르러 보니, 어떤 양반이 교통 정리를 하고 있는데, 내려가는 차를 어느 정도 보내고 나서 올라가는 차를 보내는 식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양쪽에 차를 세웠기 때문에 어리목 좁은 곳에 대형 차량이 섞이다 보니 교차가 안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간 곳에서 근본 원인을 알 수 있었는데, 도로포장 중이어서 한쪽 차선만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오늘 같은 휴일 그렇지 않아도 차가 밀릴 걸 뻔히 알면서 왜 공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일본에서는 차량 시간이 뜸한 밤 시간대에 공사를 한다는데 해도 너무 하는 것 같다. 하긴 단풍철 설악산 한계령 넘는데만 대여섯 시간 걸리기 때문에 차에서 단풍을 볼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1100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운 다음 한라산 반대편 오름에 가서 단풍 그림자라도 보고 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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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은 좀 옅은 빛의 단풍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김밥을 사고 오는 차를 기다려 주차장에다 안전하게 세우게 하고 출발했다. 시간은 벌써 10시를 넘어서고 있다. 아래쪽으로 200m 정도 내려가 습지 잔디를 밟으며 숲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도 않은 오름을 향해서 비스듬히 길을 뚫으며 계속해서 내려간다. 금년 여러 차례의 태풍과 비로 벌써 활엽수들이 잎을 떨구어 수북하게 쌓인 낙엽 위로 15명의 발길 따라 바스락 소리가 듣기 좋다. 촉감도 그만이다. 구르몽의 시 '낙엽'이 저절로 나온다.

 

 나뭇잎 저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아주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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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무로 생각되는 옅은 노랑의 단풍

 

 말라 시들어버린 것과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떨어진 단풍나무를 몇 개 지나치고 나서야 드디어 빨갛게 물든 단풍이 모습을 드러낸다. A+는 못 되도 B+는 되겠다. 햇살에 비친 잎사귀를 나무 아래에서 보니 더욱 빛난다. 제주도는 일교차가 심하지 않은 곳이기에 설악산 같은 깨끗한 단풍은 기대할 수 없는 대신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있어 강점이다. 혹 겨울 등반에도 가끔씩 별같이 반짝이는 애기단풍을 볼 수 있으니.


 단풍(丹楓)은 붉을 '단(丹)'자를 쓰지만 녹색 잎이 적색, 황색,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도 단풍이라 한다니까, 다른 색도 모두 단풍이다. 표고 1,000고지 정도인 이곳은 산벚나무 계통의 나무도 붉은 빛을 띠다가 말라 떨어졌고, 서어나무는 노란빛으로 숲을 밝히고 있다. 이외로 노란 잎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사람주나무와 피나무(?)다. 빨갛게 물든 단풍의 출현이 점점 잦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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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금나무 단풍 

 

♣ 단풍에 물이 드는 이유

 

 어린잎이나 줄기가 새롭게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붉은색을 보이다 잎이나 줄기가 성장하면서 붉은색이 없어지는 경우는 어린잎이나 줄기의 엽록소를 만드는 세포내의 구조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기로부터 당이 계속 보내져 오면서 잎은 안토시안을 형성하게 된다. 안토시안은 자외선을 잘 흡수하는 성질을 갖고 있고, 또한 안토시안을 많이 가진 조직은 표피뿐이다.


 때문에 연약한 어린잎이나 줄기가 빨갛게 됨으로서 자외선의 해를 피하는 것이다. 잎이 성숙함에 따라 안토시안은 분해되어 소실되며 엽록소에 의해 녹색으로 변하게 된다. 대부분의 식물 잎들은 녹색을 나타내나 예외적으로 단풍나무의 개량종인 공작단풍, 홍단풍과 같은 나무 또는 자주색 양배추, 베고니아 등과 같은 초본은 계절과 관계없이 붉은색을 띠고 있다. 이들 식물은 정상적인 녹색 종으로부터 변종인 경우가 많은데, 안토시안과 공존하는 엽록소에 의해 정상적인 광합성을 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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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피어나는 용담꽃


 가을철이 되면 나무는 월동 준비를 위하여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데 나뭇잎이 떨어지는 원인은 나뭇잎과 가지사이에 떨켜층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떨켜층이 형성되기 시작하면 나뭇잎은 뿌리에서 충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나 잎에서는 계속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여 이때 생성된 양분은 떨켜층 때문에 줄기로 이동하지 못하고 잎 안에 남게 된다. 이로 인하여 잎 안의 산도가 증가되어 엽록소는 파괴되고 대신 엽록소 때문에 보이지 않던 카로틴, 크산토필과 같은 색소가 나타나고 안토시아닌이 생성되어 나뭇잎의 색이 변하는 것이다.


 가을의 대표적인 단풍들은 단풍나무과(科) 단풍나무속(屬)에 속하는 식물들이나 진달래과, 노박덩굴과, 옻나무과, 포도과 등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드는 것이 많다. 노란 잎으로는 가을의 은행나무가 대표적인데, 느릅나무, 포플러, 고로쇠나무, 피나무 등을 들 수 있다. 식물의 종류가 달라도 안토시안은 크리산테민 1종뿐이다. 식물의 종류마다 단풍 빛깔이 다른 것은 이 홍색소와 공존하고 있는 엽록소나 황색, 갈색의 색소 성분이 양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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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늪지에서 바라본 한라산

 

♧ 늪지를 지나 가시밭길을 뚫으며

 

 조그만 내를 몇 개 지나고 숲길을 30분 정도 걸었을 때, 눈앞이 트이며 늪지가 나타났다. 노루가 놀기 좋은 공간이다. 풀이 마르고 한라부추가 피었다가 씨를 맺었다. 간간이 용담이 나타난다. 오늘 산행의 주제 꽃은 용담꽃으로 정했으면 싶을 정도로 활짝 피었다. 한라산이 나지막이 보이고 서쪽 나무 위로 드디어 노로오름이 보인다.


 방향을 정확히 잡았으니 이제 다시 오름을 향해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숲으로 들어가는 곳은 햇빛이 자주 비치기 때문에 찔레나무를 비롯한 청미래덩굴, 보리수나무, 산딸기나무 같은 가시덩굴이 많아 들어서기가 곤혹스럽다. 전에는 남서쪽으로 이어진 늪지로 간 기억이 있는데, 오름이 자꾸 멀어져 간다고 가시덩굴을 헤치고 그냥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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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늪지와 구름


 덜꿩나무와 정금나무, 아그배나무, 팥배나무 등이 열매를 매달고 있다. 드디어 삼나무 심은 곳 길이 나타나고 작은노로오름 옆구리에 도착했다. 표고는 1,019m인데, 비고는 34m 밖에 안 되는 오름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길이 너무 험하다. 앞장선 이 대장이 군인 정신을 발휘해 길을 뚫어보지만 자주 막힌다. 우리 삶에서 앞장서가는 사람의 판단에 의해 뒤따르는 사람이 운명이 결정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억을 되살려 옆으로 길을 뚫었더니 작년에 사람이 출입했던 흔적이 있고 곧 무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주 강(姜)씨 무덤인데 깨끗이 벌초를 했다. 조금 쉬고 나서 벌초꾼이 닦아놓은 길로 내려왔다. 몇 명이 이곳까지 와서 이렇게 길을 정비했는지 몰라도 명당 자리 지키기가 그렇게 쉬운 건 아닌가 보다. 그 길로 더 진행하여 서남쪽 무덤에 이르니, 주변의 오름과 섬들이 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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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은오름에서 본 노로오름

 

♣ 느긋한 점심 후 노로오름 정상으로

 

 15명이서 먹을 김밥이지만 다른 것을 싸왔다고 조금 덜 사오라는 주문을 하던데 여기저기서 먹을 것이 등장한다. 흑돼지고기 삶은 것과 김치, 삶은 달걀, 배추와 오징어젓, 철 이른 달래와 된장, 쑥꿀떡, 기증편, 오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나와 점심 시간은 행복했다. 거기다 약주 한 잔 곁들이니 신선(神仙)이 안 부럽다. 산에서는 무엇이든 늘어놓기만 해도 진수성찬인 것을.


 먹고 나서 오르는 길은 힘들다. 그러기에 웬만하면 정상에서 식사를 하러 드는 것이다. 다시 하늘이 맑아졌고 본 오름 정상은 얼마 없어 나타났다. 이곳은 표고 1,070m에 비고는 105m가 된다. 1100도로보다 30m 아래 있는 셈이다. 도착해 보니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한라산에 가기 위해 영실 입구에 갔다가 들어가지 못해 주변에 차를 세우고 3형제오름을 돌아왔다고 하는데, 10여명 모두 안 보던 얼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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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젯오름에서 만난 백작약 열매


 그런데 이건 뭔가? 백작약 한 뿌리를 캐다가 산 정상에 박아놓은 측량을 위한 표지석 위에 자랑스럽게 놓아두었다. 산에 자라는 식물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가 아니다. 더욱이 개체수가 적어 멸종 위기에 있는 백작약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뽑아다 놓다니. 일행 중 아는 사람이 없길래 "이런 것을 이렇게 뽑아도 되느냐?"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함부로 뽑다니…. 요즘 오름 모임이 많다는데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고 함부로 다녀서 그저 좋은 것만 보면 무조건 채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탈이다. 다시는 이런 것을 뽑을 생각도 말고 일행 중 책임적 위치해 있는 분이 타일러야 한다. 늦은 봄 노꼬메에서 본 우아한 자태의 백작약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중에 삼형제 오름 기슭에서 몇 뿌리 발견했는데, 씨가 여물어 있어 따서 사방에 퍼지라고 여기 저기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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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형제 말젯오름


▲ 오다 들른 삼형제 말젯오름

 

 노로오름 정상에서는 한라산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모든 오름과 해안선까지 샅샅이 살필 수 있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1100도로를 향하여 삼형제오름이 늘어서 있다. 눈 아래로 보이는 삼형제 말젯오름은 표고 1,075m에 비고 125m, 둘레 2,118m의 아담한 오름이다. 꼭 가보고 싶다는 여러 사람의 요청에 의해 그곳을 들러 능력이 닿는 대로 샛오름, 큰오름으로 들러가자고 했다.


 그러나, 말젯오름 정상에 올라가 앉았을 때 일부 회원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제 저 늪지로 내려서 다시 올라가야만 하므로 나머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냥 가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 아름답게 물든 단풍이 여러 그루 나타났다. 빨간 단풍나무뿐만 아니라 노란 고로쇠나무, 비목나무, 서어나무들도 단풍나무 못지 않게 아름답다. 우리 인생도 앞으로 남은 생애가 이처럼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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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법 빛깔이 고운 단풍

 

♧ 박영호 시인의 '저 눈부신 단풍은'

 

짙은 화장으로 주름 가리고
울긋불긋 치장한 늙은 여자의
시들한 인생이 눈물겹다
속옷 밖으로 불거져 나온 속살 출렁거리는
짙은 가을, 부끄럼 없이 알몸 내보이며
붉게 타오르는 노염(老炎)이 온 산 불지르겠다
스스로를 사르며 사라지는
마지막 불꽃의 너울거리는 아픔이여
오색 만장 앞세우고
저 산수(山水) 속으로 들어가는 꽃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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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로쇠나무 노란 단풍

 

♣ 다시 생각나는 이제하 시인의 '단풍'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처럼 뒤채며 일어서던 목숨이
어째 볼 수도 없는 허공에서 아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잎잎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 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생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 끝에서 하늘 끝에서
되돌아 아득아득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 곬으로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 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잡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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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무(?) 노란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