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시오름의 단풍[2004. 11. 7.]

김창집 2004. 11. 8.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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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행 중 누가 '오늘 이 오름을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라는 말이 증명해주듯 이번 산행은 가끔씩 나타나는 단풍처럼 모두의 마음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내장산의 단풍처럼 전체가 새빨갛거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단풍도 아름답지만, 상록수림이나 잡목림 사이에서 아직은 물이 덜 들거나 진행중인 단풍이 홀현홀몰(忽顯忽沒)하눈 단풍은 희귀성으로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예고편을 본 영화는 전체를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미지의 세계, 거기다가 앞으로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서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는 설렘은 보는 즐거움을 몇 배로 끌어올리는 상승작용을 한다. 우리 나라 단풍의 마지막을 장식할 이곳 서귀포 중산간, 지귀도를 비롯하여 서쪽으로 숲섬, 문섬, 범섬, 형제섬, 마라도, 가파도까지 내다뵈는 오름에서 이런 단풍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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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이대의

 

밥값도 없이 차비도 없이 건너온 20대.
그 때가 그리운 요즘
행복하다.
세상에 물들어서
아름다운 순리대로 물들어
조금은 버릴 줄도 알고 사는 지금,
이제야 내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왜 몰랐을까.
힘겹고 비릿한 욕망으로
밥값도 없이 차비도 없이 건너온 20대.
두 번 다시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 그리워 할 줄은.
가끔 그 길을 다녀오는 요즘
지금의 내 삶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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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눈부신 단풍은/ 박영호
 
짙은 화장으로 주름 가리고
울긋불긋 치장한 늙은 여자의
시들한 인생이 눈물겹다
속옷 밖으로 불거져 나온 속살 출렁거리는
짙은 가을, 부끄럼 없이 알몸 내보이며
붉게 타오르는 노염(老炎)이 온 산 불지르겠다
스스로를 사르며 사라지는
마지막 불꽃의 너울거리는 아픔이여
오색 만장 앞세우고
저 산수(山水) 속으로 들어가는 꽃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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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숲속을 가며/ 오세영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 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얗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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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김종길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작년 이맘때 오른
산마루 옛 성(城)터 바위 모서리,
작년처럼 단풍은 붉고,

작년처럼
가을 들판은 저물어간다.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작년에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던 물음.

자꾸만 세상은
저무는 가을 들판으로 눈앞에 떠오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동안

덧없이 세월만 흘러가고,
어이없이 나이만 먹어가건만,

아직도 사위어 가는 불씨 같은 성화는 남아
까닭 없이 치미는 울화 같은 것.

아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저무는 산마루 바위 모서리,
또 한 해 불붙는 단풍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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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나무 아래서/ 이의웅

 

나무는
언어로 말하지 않고 빛으로 말한다
검푸른 빛에서 어제의 나를 봤고
선혈 같은 단풍 빛에서 오늘을 본다

 

나무 아래서
해산을 기다리는 남편이 되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서성이다가
기어이 울음소리를 듣고 말았다
붉은 핏빛이 무서워
토악질하면서도 진종일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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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김영월

 

나무들은 색깔로 얘기한다
저마다 한 생애를 통하여
가슴에 간직해온
한편의 시를 남긴다

 

이제 그들의 시 낭송이 끝나면
소슬바람이 불 것이다.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그들은 아주 헤어지게 되리라

 

그러나, 버리고 떠남이 있기에
그들은 다시 돌아오리라
이런 날이 올 것을 준비하며
하루하루 살아오지 않았던가

 

나도 마지막 무대에 설 때
불안에 떨지 말고
그윽한 미소를 띄우며
한 잎의 고운 단풍으로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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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김해화

 

마지막
온몸 핏빛으로 던지기 위해
가을 가득 피를 쏟는
깃발의

눈부신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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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신동명

 

산이 산을
와락와락 흔들고
일어선다

 

붉은 피
왈칵왈칵 쏟아
온통 붉게 만든 산

 

나도 지레
붉게붉게 물들어
산 속으로 타들어 간다

 

아, 황홀한 침몰이다.

 


♬ 해바라기 '행복을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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