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나라 사슴공원과 토다이지

김창집 2007. 7. 8. 19:49

--탐문회 일본 칸사이지역 답사기(7)

 

 

 * 들어가기 전 정문에서 본 토다이지 대불전(위)과 그 앞에서 분향하는 사람들(아래)

 

♣ 사슴들의 천국, 나라 사슴공원(NARA-KOEN)

 

 호류지(法隆寺)에서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겨 차를 타고 나라 시내로 향했다. 나라거리 화단에는 백리향으로 쟐 알려진 서향과 백서향이 만개해 있어 차문을 열고 향기를 맡아본다. 오른쪽으로 박물관을 보며 점심식사를 위해 나라공원 쪽으로 들어갔다. 사슴들이 서 있거나 누워 있다가 그냥 그 자세로 우리를 멀건이 쳐다본다. 2월말이라 묵은 털이 윤기를 잃고 있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차에서 먼저 내린 일행 중 동작 빠르기로 이름난 남 사장이 사슴먹이를 사들고 그들 쪽으로 가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앞에 있는 놈이 재빠른 동작으로 와서 뺏아 먹는다. 순진한 성질을 가진 놈들이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사육을 당하다보니 이렇게 변했다. 나라 사슴공원은 1880년에 세워졌는데 약 1,100마리의 길들여진 사슴들이 노닐고 있으며, 나라의 많은 역사 유물이 공원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 나라 사슴공원에서 쉬고 있는 사슴(위)과 토다이지 못 앞에서 장난하는 사슴들(아래)

 

♧ 신이 타고 온 동물, 사슴


 이 공원의 사슴들은 1957년에 이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오랫동안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래서 지금은 나라의 상징이 되어 가는 곳마다 사슴의 문양이나 장난감이 보인다. 사슴이 이렇게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이 일대의 권력을 쥐고 있던 후지와라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710년경 자신들의 씨신(氏神)을 모실 신사(神社)인 카스가따이샤를 세우고 카시마(鹿島) 신궁(神宮)에서 신을 모셔왔는데 신이 태우고 온 것이 흰사슴이라고 한다.


 이후 사슴은 신성한 존재로 숭앙을 받기 시작하여 후지와라 가문이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헤이안시대는 물론, 이후 1천년 정도 지속돼 에도시대에까지도 사슴을 죽인 사람을 참수 내지 생매장의 극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근대화 초기에 이르러 사슴이 농사를 망치게 되자 상황이 급변해 1871년에는 사살령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보호구역에 서식하는 38마리를 제외하고는 떼죽음을 당했다.

 

 

 * 먹을 것을 보고 달려드는 사슴(위)과 그 앞 식당에서 먹은 점심(아래)

 

♣ 나라 사슴들의 영욕의 세월   


 신도(神道)가 일본의 종교로 정착하면서 카스가따이샤의 비호 아래 사슴의 숫자가 늘어났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배고픈 주민들이 이들을 잡아먹기 시작해 1945년에는 79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1947년에 사슴애호회를 만들고 노력한 결과 지금은 1,100마리 수준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런데, 빈번한 교통사고로 해마다 100마리 정도 죽고, 음식 쓰레기를 잘못 먹고 죽는 경우도 있는데, 인근 녹원에서 태어나는 새끼로 보충한다.


 공원에 풀어놓는 시기는 7월부터고, 10월 중순에는 녹원에서 뿔 자르기 행사가 열리며 여기서 얻어지는 녹각으로는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판다. 이걸 보면서 제주의 산과 들에서 자라는 노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소목 사슴과의 동물이지만 사슴은 성질이 온순하여 이렇게 길들여 관광객들에게 다가서지만, 노루는 겁이 많아 도저히 그러지 못한다. 노루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당시 제주농고에서 순치(馴致)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 사슴공원 앞길의 사슴(위)과 토다이지 경내의 사슴들(아래)

 

♧ 노천명의 ‘사슴’을 낭송하며


 점심을 먹은 일행은 나오면서 가게에서 팔고 있는 사슴의 먹이를 사서 그들과 점심을 나누며 사진을 찍었다. 너무 이런 일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위협하듯 뺏어먹는 이들이 너무 가여웠다. 오름처럼 생긴 와까쿠사산(若草山)과 카스가산(春日山)의 산책로를 따라 올라보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는 일, 모처럼 10년 만에 사슴과 조우했던 기분을 되살리며, 토다이지(東大寺)로 가는 차중에서 노천명의 ‘사슴’을 낭송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에 제 그림자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 멀리서 본 남대문(위)과 가까이서 본 남대문(아래), 대화엄사 현판

 

♣ 유구한 역사의 산물 토다이지

 

 우리나라에 동대사(東大寺)로 알려진 일본의 토다이지는 높이 16.2m의 청동불상인 대불로도 유명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대불이 안치된 금당은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인데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본래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1709년에 재건된 것이 남아있다. 금당의 북서쪽에는 쇼소인(正倉院)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중요한 미술, 공예품, 각종 문서 등이 보존되어 있다.


 그밖에 쇼무천황의 유품, 당나라, 인도 및 페르시아의 공예품이 수납된 쇼소인, 당나라 중이 창건한 계단원등 긴 역사를 나타내는 문화재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752년에 대불전이 완성되어 대불의 개안공양(開眼供養)이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원록(元祿)시대에 재건된 현재의 대불전은 당초의 약 3분의 2의 규모지만, 그래도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으로 그 장대한 스케일은 보는 사람을 압도시킨다.

 

 

    * 멀리서 본 토다이지 대불전(위)과 그곳에 가기 전에 세워놓은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아래)

 

♧ 남대문의 8m를 넘는 금강역사상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중간쯤에서 남대문을 향해 걸어간다. 두 번째여서 그런지 그 뒤로 관심을 가져서 눈에 많이 익었다. 절의 정문인 난따이몬(南大門)은 1180년 전란으로 소실되어 13세기 초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중국 송나라의 천축(天竺) 양식을 도입해 재건했으며, 사악한 기운이 성스러운 경내로 침입하지 못하게 막는 2개의 목조 금강역사상(仁王像)이 문안에 세워져 있다.


 현판에는 대화엄사(大華嚴寺)라 되어 있고, 단청(丹靑)은 하지 않았다. 8m를 넘는 금강역사상은 섬세한 근육과 험상궂은 얼굴을 제대로 표현한 걸작인데, 1203년 20명의 불사(佛師)가 꼬박 69일이나 걸려서 만들었다고 하니, 보존 상태나 이들 기록을 남긴 일 모두가 놀랍다. 문을 지나 걸어가는데 커다란 바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라 새겨놓았다.  

 

 

 * 토다이지 대불전 앞의 연못(위)과 그 앞에 세워놓은 우리와 좀 다른 양식의 석등(아래)

 

♣ 옛날에는 엄청난 규모의 절


 오른쪽으로 커다란 못이 있고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어 나무를 심어놓았다. 주변을 맴돌던 사슴 둘이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문을 통과하지 않고 긴 회랑을 돌아 들어가고 나온다. 토다이지는 728년 쇼무 일왕이 왕자를 공양하기 위해 세운 콘슈지(金鐘寺)가 시초다.  745년에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절의 이름을 바꾸고 확장공사를 시작했다.


 다이부쯔덴(大佛殿)의 완공 이후 강당, 종루, 탑 등의 건물이 속속 세워져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사원으로 성장했는데, 대불전을 바라볼 때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한 대부분의 건물이 부속 사찰이었음을 감안하면 절의 규모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180년과 1567년의 전란으로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가 1692년에 이르러서 지금처럼 축소된 형태로 정비되었다.


 

   * 토다이지 대불전(위)과 그 앞의 금동팔각등룡(아래)

 

♧ 48m 높이의 건물에 15m나 되는 대불


 747년부터 시작해 260만 명의 연인원을 투입해 이 대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5년 만인 751년에야 완성을 보았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180년 타이라 평(平) 가문의 일으킨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으로 완벽히 재건되었다가, 1567년 또 다시 전란에 휘말려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1709년에 이르러 원래 크기의 3분의 1 정도 줄어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는데, 현재 건물의 크기는 너비 57m, 높이 48m다.


 내부에 모셔진 대불(大佛)의 크기는 높이 15m, 얼굴 크기 5m, 무게 380t을 자랑한다. 불교에 의해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던 쇼무 일왕이 전국의 구리 500t을 모아다 여덟 번의 주조와 26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역작이다. 불상 전체에 440kg의 금을 입혀 놓았는데, 도금 작업 당시 녹인 수은이 사용되면서 예기치 않은 수은 중독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 대불전을 가기 위해 왼쪽 회랑을 도는 일행(위)과 대불전 정문으로 가는 일행들(아래)

 

♣ 토다이지를 돌아 나오며


 대불전 앞의 금동팔각등룡은 창건 당시의 것이라 하며, 입구 오른쪽에는 구걸하는 사람처럼 나무로 된 빈주루존자가 앉았는데, 그 특이한 상호와 자세가 재미있으며, 자신의 아픈 부분이 있으면 그 불상의 같은 곳을 찾아 만지면 낫는다는 속신설이 있다. 대불 뒤로 돌아가면 그 크기에도 주눅이 들 정도의 금강역사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앞 한 나무 기둥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을 통과 하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바람에 일행 중 날씬한 아줌씨들이 그곳을 통과 하느라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경내에 홍매화가 벙글고 있으나 시간 관계상 그냥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왼쪽 산길로 가면 수많은 보물을 진열해놓은 니까즈도(二月堂)과 산가쯔도(三月堂)도 있고, 쇼무 일왕의 유품과 불교용품을 보관해놓은 쇼소인(正倉院)이 있으나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사람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그냥 불공을 드릴 정도의 크기면 그만인 것을, 큰 것을 지향하여 크면 클수록 믿음이 더 커지고 나라를 잘 지켜줄 것이라고 여겨 작은 사람들(倭)이 사는 나라에 이런 큰 건물을 지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편 우습기도 하다.  

 

 

  * 토다이지 대불전 안 대불 뒤 양쪽에 있는 금강역사상, 대불은 감히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했다.


♬ Ozaki Yutaka - Oh My Little Gi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