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눈 뜰 수 없이 황홀한 눈밭

김창집 2005. 2. 1. 20:52

* 한라산 설산 등반기 [2005. 1. 30.]

 

 

▲ 우여곡절 끝에 이른 어리목광장

 

 처음 한라산 등반을 계획했던 1월 넷째 주 일요일인 23일은 전날부터 비가 아침까지 와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그냥 오름 행을 택했는데, 1주일 연기된 30일도 전날부터 비나 눈이 오고 강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예보 때문에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야 가면 가고 말면 말아도 되겠지만 등산을 계획하고 진행해야 할 나로서는 무난히 행사를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가끔 일어나 창밖을 보니, 바람은 고요하고 비도 오는 기색이 없어 마음놓고 한 두어 시간 비몽사몽 헤매다 깨어 텔레비전을 켜고 4시 반에 일어나 밥을 먹은 후 세수를 하고 장비를 챙기며 시간을 보냈다. 카메라가 고장나 딸의 디카를 빌리긴 했는데 전혀 사용해 보지 않은 거라 내심 불행해 만져 보고 있는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의귀리의 오권실 씨에게서 5시경에 연락 전화가 와서 6시까지 오라 하고는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오바 앞에서 차를 세우고 여기저기 살피는데 벌써 3명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몇 사람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약속했던 6시가 되도록 기다리니 6명이 모여 처음 온 분이지만 도로관계상 권실 씨의 지프차로 가기로 하고 탑승하는 찰나 다시 오 선생 부부가 왔고, 5분만 더 기다리자는 의견에 따라 기다리는 동안 다시 2명이 더 와서, 할 수 없이 내 차를 동원해 5명씩 나눠 타고 한밝저수지로 향했다.

 

 

  YMCA 옆에 이르렀을 때 도로에 걸린 표지판에 '1100도로 결빙(結氷)'이라는 글이 비치며 타이어에 얼음이 감지되고 도로 양쪽에 잔설(殘雪)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밝저수지 검문소에서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대형 체인' '소형 통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먼저 온 차들에 분주히 체인을 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체인이 없는 내 차를 세우고 권실 씨의 지프차에 체인을 치고 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체인을 치는 동안 남자 3인방은 갈 때까지 걸어가자고 해서 앞장서 흰 입김을 불어넣으며 아무도 없는 미명의 눈길을 걸었다. 어제 오후에 통행이 자유로웠던 도로는 양쪽 눈이 녹아 흐르는 물과 밤에 살짝 내린 눈이 얼어 아주 미끄러웠다. 몇 대의 차가 올라갔는지 모르지만 제설차 한대만 눈에 띄었다. 한참을 기다려 차 한 대에 쭈그려 타고 미끄러워 버둥거리는 차를 의식하며 어리목에 도착해 보니, 이미 차는 여러 대 세워 있었으나 주차장은 여유가 있었다. 

 

 

▲ 난만(爛漫)한 숲의 설화(雪花)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어리목의 눈 풍경이었다. 눈이 너무 쌓여서 내려가 버렸는지 광장에 노루는 한 마리도 안 보이고 어줍지 않은 솜씨로 만든 눈사람만 커다란 광장을 지키고 있었다. 각반을 차고 아이젠을 신으며 완전무장한 다음 화장실을 거치고 나섰으나 너무나 포근하여 지금까지의 걱정을 씻어버리고 7시 25분에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다녔던 성판악 코스의 숲길과는 달리 대부분 낙엽수의 숲에는 눈이 고르게 쌓였고, 어젯밤 바람과 눈과 추위 때문인지 나무마다 눈이 얼어붙어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꼭 벚꽃이 난만한 나무 아래를 걷는 것 같았다. 모두들 신이 나서 오늘 이곳에 오늘 오지 못한 사람들은 억울해서 어떻게 살까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으며 계곡에 이르렀는데, 바위 위에 동그랗게 쌓인 눈이 그려내는 곡선이 너무 아름다워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정상 등반을 허용하고 나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은 성판악으로 올라 관음사로 내리는 코스만 선택했다. 성판악 코스로 정상까지 9.6km에 약 4시간 30분, 하산시 관음사 코스로 8.7km에 3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다 보니, 일부 회원들이 체력이 달려 참가를 꺼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분위기도 바꿀 겸 가벼운 코스를 택하노라 어리목 코스를 택했다. 이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으로 오르는 코스는 약 4.7km로 아무리 천천히 가도 2시간 반이면 족하다. 영실 ∼ 윗세오름 코스가 3.7km로 제일 짧아 2시간 정도 걸리지만 겨울철에는 차량 접근이 힘든 것이 흠이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족은드레오름이 너무나 의젓하여 전혀 이름답지 않게 우뚝한 자태를 경탄하면서 가다가 눈이 달라붙은 멋진 고목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가끔씩 노가리(주목)도 보였는데 온통 눈이 달라붙어 허옇게 쌓인 부분이 동물의 모습을 닮은 것이 많다. 숲을 거의 벗어날 즈음해서 먼저 올라간 분들이 하나씩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눈만 빼곡이 내밀었으나 눈가의 주름으로 흐뭇한 표정임을 읽을 수 있었다.

 


 

▲ 숲을 벗어나자 설국(雪國)이

 

 숲길을 벗어났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환상 그대로였다. 서쪽 하늘로 지지 않은 섣달 스무하룻달이 걸려있고 조금 벗어나 구름이 얇은 무늬로 펼쳐져 있는데, 때마침 솟아오르는 햇빛에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난다. 오른쪽 경사면에 쌓인 눈과 나무 위를 장식한 눈이 한꺼번에 어울리면서 지금까지의 장도를 축복이나 하는 듯이 뻗쳐오른다. 이 순백의 설원(雪原)에서 만난 풍경은 두고두고 내 머리에 기억되리라 생각하며 일행을 부추겼다.


 기념 사진을 찍고 나서 출발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기서부터는 급한 오르막은 없고 탁 트인 벌판에 비스듬한 경사뿐이니 그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게다가 바람도 한 점 없고 해는 아주 옅은 구름에 가려 딱 좋을 만큼만 비친다. 오른쪽 사제비동산으로 누가 올라갔는지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다. 조금 더 걸어갔을 때 지난여름에 들렸던 쳇망오름이 보인다. 간간이 비와 안개에 가리웠지만 그 때 그 오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이스렁오름 꼭대기가 보일 때쯤 지나온 길을 되돌아 북쪽 하늘을 돌아보니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쯤 시내에는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오름에 가기 위해 모인 회원들이 한라산으로 간 우리 일행을 걱정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Feel이 꽂혔는지 전화 신호가 울려 얼른 받아 본즉 구 박사다. 7명이 모여 오름으로 가고 있다는 전언(傳言)이다. 너무 반가워 이곳의 정황을 알리고 하산 후에 점심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기다란 만세동산을 바라보며 낙엽수 사이에 눈으로 둘러싸여 꽂혀 있는 듯 보이는 하얀 구상나무에 갈채를 보낸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간다는 구상나무 군락은 과거 이 벌판에도 널려 있었지만 이제는 많이 사라져 버리고, 성판악 코스나 관음사 코스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만세동산 자락 능선을 넘어설 때 눈으로 감싼 구상나무를 발견하고는 여러 번 셔터를 눌렀다.

 


 
▲ 부악 아래로 펼쳐진 윗세오름

 

 한라산 봉우리 백록담을 감싸고 있는 부분을 산사람들은 보통 부악(釜岳)이라 부른다. 특히 북서쪽으로 바라보면 왕관처럼 생긴 모습이 신비롭고 이곳을 눈이나 진달래꽃으로 장식할 때면 그 장엄함이 극에 달한다. 멀리서 부악의 모습이 보일 때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민대가리 저쪽 장구목에서 이어진 부악의 어깨 너머로 해가 떠 있어 마치 광배(光背)를 두른 불상(佛像)처럼 거룩해 보인다. 


 남쪽에서 보는 만세 동산은 나무 하나 없이 온통 눈으로 덮여 완연한 설산(雪山)을 이루고 윗세오름도 그를 닮아간다. 점점 다가서는 부악의 모습을 담기 위해 역광임에도 계속 셔터를 누르며 마지막 능선에 올랐을 때 눈앞에 대피소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위대한 자연 속에 인간이 이룩한 것이 저처럼 보잘것없는 것인 줄도 모르고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쉬지 않고 자연을 허무는 우를 범하고 인간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9시 25분. 딱 2시간 걸렸다면서 대피소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통해 스미는 라면 냄새를 어쩌지 못하고 사발면을 시켰다. 때맞춰 자리가 난 식탁을 차지하여 가지고 온 먹거리를 내놓았다. 아침 일찍이라 제대로 갖고 오지는 못했을 것이라 여기면서도 둘러보니, 김밥, 지짐, 된장국, 밥, 귤 등 그만하면 녹록하다. 무김치도 있고 배추김치도 있어 라면에 넣어 먹으니 맛이 배로 상승한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눈 위에서 특히 한라산 대피소에서 먹는 사발면 맛을 어디다 비할손가?


 어린이들이 들어 오길래 서둘러 자리를 내주고 나와서 주변 풍경을 스케치했다. 윗세오름이 아늑하여 산세가 그만이다. 더러는 영실로 내려가기도 했는데, 우리는 차 때문에 본래 계획한 대로 10시에 어리목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제법 올라오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나고 바람은 없지만 공기가 알싸해 기분이 그만이다. 이제 천천히 즐기면서 사진을 실컷 찍고 내려가도 되리라.

 


 

▲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하지만 곧 장애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엷은 구름에 가렸던 태양이 구름을 벗어나자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스키 타러 가면서 색안경을 쓰고 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다음부터는 배낭에 꼭 넣고 다니리라 다짐하며 반사하는 눈빛에 눈물을 쏟는다. 뛰고 뒹굴며 한참을 가다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져 견딜 만했다. 


 겅중겅중 뛰는 나의 모습을 보며 올라오는 사람들이 웃는다. 깃대에 온통 눈발이 붙고 깃발이 얼어붙어 버렸다. 올라올 때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유치환의 '깃발'을 암송했더니, 시 낭송에 일가견이 있는 조 여사가 남의 글을 낭송하지 말고 제 목소리를 내라 해서 웃었다. 북쪽 어승생악 쪽으로 자주 검은 구름과 안개가 몰려오는 것으로 보아 하산 후 어승생악 오르는 일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숲으로 들어가기 전 사방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나눠주는 초콜렛을 하나 받아먹고 출발이다. 일행은 비료부대를 못 가져왔다고 일반 비닐을 꺼내들고 썰매 타면서 내려갈 준비를 한다. 사람이 지나치거나 경사가 급하지 않은 곳에서는 눈 경치를 찍고 급경사를 만나면 엉덩이 썰매를 타면서 가다보니, 얼마 안 되어 아쉽게도 어리목에 도착해 버렸다. 11시 정각, 꼭 1시간 걸린 셈이다.  

 
 생각 같아서는 어승생악에 올라 우리가 다녀온 길을 찾아보고 싶지만 어승생악과 그 앞에 있는 족은드레오름 위로 계속해서 구름안개가 몰려왔다 몰려가기를 계속하고 있어 할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가 노루손이오름에 올라 아득히 흩어졌다 모이는 구름 너머를 응시하며 마음의 눈으로 발자취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세미오름에 오른 회원들과 연락이 닿아 고향바당에서 점심을 나누며 산행담을 즐겼다.


 ★ 이 난을 빌어 우리를 어리목까지 태워다 준 오권실 님께 감사 드린다.

 

'오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록의 숲길을 원 없이 걷다  (0) 2005.05.09
눈길을 따라 용궁에 다녀오다  (0) 2005.02.23
시오름의 단풍[2004. 11. 7.]  (0) 2004.11.08
노로오름과 단풍[2004. 10. 24.]  (0) 2004.10.26
제주 거린악엔 지금  (0) 200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