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교토의 이총과 국립박물관

김창집 2007. 7. 25. 22:29

 -- 탐문회 칸사이(關西) 지역 답사기 (10)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교토의 이총 


♧ 교토(京都, Kyoto)로 가는 길 

 

 2007년 2월 23일 금요일 비. 아침 7시에 출발을 하려는데 비가 온다. 우산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우산을 사고, 비옷들을 산다. 이미 준비해가지고 온 분들은 군사정권 시절에 많이 듣던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읊조린다. 일금 1천 엔을 주고 접는 우산 하나를 샀다. 가이드가 우리나라에는 세차를 해서 비가 오면 ‘헛고생을 했다’ 하는데, 이곳은 반대라고 한다. ‘세차하려 했는데, 잘 됐다.’라고. 아스콘은 물기를 흡수하게 돼있고 그만큼 먼지가 없단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교토(京都)는 교토부 남부 교토분지에 있는 고도(古都)로 교토부의 부청 소재지이다. 11개구(區)로 나누어지며, 시역(市域)은 교토분지와 분지를 동․서․북으로 둘러싼 산지에 걸쳐 있다. 교토분지 가운데 북쪽에서 동쪽에 걸친 지역은 가모가와강(鴨川)과 그 지류 다카노강(高野川), 시라카와강(白川) 등에 의해 형성된 선상지로 서쪽에서 남쪽에 걸친 지역은 그 강들에 의해 형성된 충적평야이다.


 여름에는 30℃를 넘는 날이 많아 몹시 무덥고, 겨울에는 1월 평균 최저기온이 영하 0.9℃로 아주 낮은 기온이 아닌데도 분지에 냉량다습(冷凉多濕)한 공기가 괴어 체감온도가 매우 낮다. 비는 주로 여름에 많이 내리며, 연평균 강수량은 1,579㎜이다. 교토분지는 주로 한반도 및 대륙에서 건너온 귀화인(歸化人)에 의해 일찍이 개발됨에 따라 토지의 개척, 관개에 의한 농업과 양잠, 견직 등의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794년 이곳에 새 도읍 헤이안경(平安京)을 조성하고 천도하였다. 그 후 400년에 걸친 헤이안시대에 국정의 중심지로 번영하였으나, 바쿠후(幕府) 정치의 시작과 더불어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는 정치의 중심이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겨짐에 따라 형식상의 수도로 전락하였다.

 

 

   * 교토의 청수사 인왕문(위)과 긴까꾸지(아래)

 

♧ 지금은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발전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더불어 도쿄로 천도할 때 이미 인구 50만의 대도시가 되었으며,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산업은 공업, 상업과 함께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공업은 전통 공업의 비중이 높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견직물 니시진직(西陣織)의 직조업과 가모가와강, 가쓰라가와강의 물을 이용한 유젠염(友禪染)이라고 하는 염색업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기요미즈도기(淸水燒), 쥘부채, 인형 등의 공업과 술, 과자류, 장아찌 등 전통적인 식품공업 등이 유명하다. 무로마치정(室町) 일대에는 전국 최대의 견직물 도매상가가 형성되었다. 전국적인 학술, 문화 도시로, 교토대학과 우리나라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외에 많은 대학과 박물관, 미술관, 국제회관 등 문화시설이 있다.


 관광 명소로는 옛 왕궁인 교토고쇼(京都御所)와 도쿠가와가(德川家)의 재경거관(在京居館)인 니조성(二條城), 가쓰라이궁[桂離宮:別宮]이 있고,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니시혼간지(西本願寺), 긴카쿠지(金閣寺), 긴카쿠지(銀閣寺), 난젠지(南禪寺), 도지(東寺), 고류지(廣隆寺), 류안지(龍安寺), 기요미즈지(淸水寺), 헤이안신궁(平安神宮) 등 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사찰과 신사가 2,000여 개 남아 있다.

 

 1시간쯤 걸려 처음 우리가 간 곳은 이총(耳塚)이었다. 차를 세운 곳은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념하는 도요쿠니(豊國) 신사 옆이다. 마치 그의 전리품인 양 정문 먼발치에 쌓아놓았다. 토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집권한 뒤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1880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신사 맞은편 호꼬지(方廣寺)에 가면 그 유명한 ‘국가안강의 종’이 있다.


 

  * 교토의 이총에서 분향 준비하는 모습(위)과 옆에 수줍게 서 있는 시미즈 할아버지(아래)


♧ 초라하게 앉아 있는 이총(耳塚)


 길을 건너 서쪽으로 가니, 둥그렇고 커다란 무덤인 이총(耳塚, 미미즈카)이 나타났다. 코무덤(鼻塚) 또는 머리무덤(首塚)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무덤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과를 보고하기 위해 조선인의 귀 또는 코를 베어다 묻어놓은 곳이다. 처음에는 목을 베어 본국으로 보냈으나, 나중에 수가 너무 많고 번거로워 귀나 코만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오시에게 헌상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들을 전리품으로 생각하여 마차에 싣고 전국을 순회했으며, 이후 이곳에 무덤을 만들어 그날의 승리를 기념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이 무덤에 맺힌 원혼들의 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이들을 모아보면 약 3,000~2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교토에는 4만여 명의 재일동포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일본 정부가 귀무덤 주변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도 이곳만 방치해놓은 것에 대해 성토했으나 막무가내란다.


 이 귀무덤은 1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교포들이 조화를 번갈아 가며 바꿔주고 있기 때문인데, 일본 정부나 우리 한국정부가 단 한 푼의 지원도 않는데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무덤을 관리하는 분이 계신데 바로 시미즈 할아버지다. 올해 83세이신 시미즈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 조상들이 많은 죄를 지은 것을 알고, 속죄의 마음으로 3대째 이 귀무덤을 보살펴 오고 있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수줍은 듯 말없이 문을 열어주며 분향을 권한다. 조선인의 후예가 아닌 일본인 혈통을 가진 시미즈 할아버지는 귀무덤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조상들의 죄를 용서하라"고 머리를 숙인다. 이제 나이가 들고 대를 물려 줄 사람이 없는 시미즈 할아버지 뒤를 이어 관리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 교토국립박물관 안에 옮겨놓은 탑(위)과 가운데 세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아래)


♧ 일본 3대 박물관의 하나인 ‘교토국립박물관’


 천년 도시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교토국립박물관은 도쿄, 나라 국립박물관과 함께 일본 3대 박물관이다. 1897년에 ‘제국교토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한 이 박물관은 이후 ‘교토황실박물관’, ‘은사교토박물관’이란 이름을 거쳐 1952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인 본관을 비롯하여 신관의 두 개의 진열관이 있으며, 본관건물은 주로 특별전의 전시관으로 사용된다.


 일본미술품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미술품, 역사적 유물, 공예품 등을 전시하며, 특히 빨간 벽돌 정문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있다. 2층의 중국대륙과 조선반도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전시실에는 ‘전시품 중 조선반도의 도자기는 도자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고려시대의 청자, 상감청자, 백자부터 이조시대의 분청사기, 백자, 청화자기, 철사(鐵砂)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공간의 제약으로 진열작품의 수가 한정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는 식으로 써 붙였다.


 그러나, 중국 도자기는 50여 개인데 반해 한국은 고려청자, 백자가 각 1개, 조선시대의 도자기 2개 등 모두 4개의 자기만 전시돼있다. 임진왜란과 강점기에 수많은 작품들을 가져갔을 터인데, 공간 제약으로 한정 진열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얼버무린 걸 보면 아무래도 냄새가 난다. 이상하게도 중국은 관대한데 우리나라는 인정을 않으려는 그 속 보이는 일은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남쪽 현관으로 1층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은 매점이고, 로비를 지나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제1~2실은 고고실인데, 제1실에는 일본 각지에서 출토된 구석기, 죠오몬(繩文), 야요이(彌生), 고분시대의 유물과 각 시대의 대표적 유적의 사징을 전시해놓았다. 2실에는 이곳 헤이안꼬우(平安京) 유적이나 절터, 경총(經冢)에서 출토된 나라(奈良)시대에서 헤이안시대까지의 고고 유물을 전시했다.

 

 

    * 일본 유일의 궁정 건축가가 설계한 교토국립박물관 구관(위)과 신관 입구(아래) 

 

♧ 2층에는 회화, 서적, 염직, 칠공예, 금공예 전시


 9시 방향에서 11시 방향까지는 제3~4실로 도자실이다. 제3실에는 일본의 나라에서 에도시대까지의 도기와 자기를 전시하며 각 가마터의 특징을 소개해 놓았다. 제4실에는 중국 한(漢)부터 당(唐)까지의 용(俑), 송(宋)과 원(元)의 청자와 텐모꾸(天目), 원(元)과 명(明)의 청화백자, 오채자기, 그리고 앞서 말한 그 우리나라 도자기를 전시해 놓았다.


 9시 방향에서 7시 방향, 그리고 가운데 부분의 5~7실에는 조각실로 제5실에는 인도, 간다라, 중국의 석불과 금동불 및 일본의 나라에서 헤이안 시대까지의 불상을 중심으로 전시해 놓았고, 제6실에는 작은 금동불과 가마쿠라(鎌倉)시대의 불상을 중심으로 전시했으며, 또 시기에 따라 코마이누(犬+白犬), 가면(假面) 등을, 그리고 가운데의 제7실에는 대형의 조각품과 불상을 전시했다.


 2층에 올라가면, 제8실~12실까지는 회화실로 11시 방향에서 7시 방향까지 반을 차지한다. 제8실은 불화, 제9실 수묵화, 제10실 에마끼(繪卷), 제11실 근세회화, 제12실에는 중국회화가 전시되었고 중간중간에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작품도 끼어 있다. 6시 방향의 제13실은 서적실로 일본과 중국의 서적과 경전, 고문서, 기록 등을 전시했다.


 5시 방향의 제14실은 염직실로 일본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염직품을 중심으로 염직 기술의 발달, 의장에 담겨진 의미 등 주제별로 전시했고, 4시 방향의 제15실은 칠공예실로 일본의 대표적 공예품인 마끼에를 비롯한 여러 칠공예품을 시대, 기법, 기종별, 또는 주제별로 전시되었다. 그리고 3시 방향의 제16실에는 불교사원의 의식, 장엄, 공양 등에 사용된 불구와 사사 봉납품으로서의 동경, 동판도금이나 칠보로 장식된 금구, 다도도구, 그리고 칼이나 갑주 등 무구류도 전시해 놓았다. 

 

 

    * 분수 너머로 보이는 국가중요기념물인  교토국립박물관 정문(위)과 금동등(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