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눈길을 따라 용궁에 다녀오다

김창집 2005. 2. 23. 09:20

△ 오름오름회 물찻오름 답사기(2005. 2. 20.)

 


 

▲ 늦겨울의 탁월한 선택

 

 출발하기 전 TV의 일기예보를 보니, 5.16도로와 1100도로는 '대형 체인' '소형 통제', 동서부 관광도로와 남조로는 '소형 체인'으로 나와 있어 모이는 장소로 가면서 줄곧 '오늘은 어디로 가면 좋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우 교장 선생님과 이 대장이 어제 불꽃 축제에서 돌아오면서 내일 눈이 온다면 눈길을 한껏 걸어 봤으면 하는 차원에서 물찻오름을 가자고 했는데 별 이의가 없어, 거길 가기로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딱이 짚이는 데도 없고 그것도 멋있겠다 싶어 행동을 통일하기로 결정하고 10명이서 차를 세워 놓고 시청 후문 앞 버스 정류소로 출발했다. 앞서 도착해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서귀포행 차가 와서 빨리 타라고 재촉한다. 재촉해 타고 보니 차 속에는 등산복 차림의 손님이 몇 명 있다. 내리는 눈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산천단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눈이 더 쏟아진다.

 

 골프장의 하얀 눈을 바라보며 올해는 무던히도 눈이 많아 영업을 망쳤겠구나 싶어 짚신장수와 나막신 장수를 생각해 보았다. 나만해도 올 겨울은 눈을 원 없이 밟으며 산을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한라산 어리목 설산 등반을 비롯해서 절물오름, 알밤, 웃밤 등등. 눈을 조금 맞은 것은 열거할 수도 없겠다. 교래 입구에서 내린 시간은 9시 20분.

 


 

 아름다운 길로 알려진 비자림로로 들어섰다. 양쪽으로 수없이 늘어선 삼나무 숲. 벌써 발길이 몇 개 찍혔다. 여기서 물찻오름에 오르는 사잇길까지는 어림잡아 2∼3km, 교래리로부터 오는 차와 걸어오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눈 덮인 숲과 쌓인 눈이 만들어내는 무정형의 작품들. 얼지 않고 폭신폭신하게 밟히는 눈의 촉감. 그리고, 춥지도 않는 날씨인데도 퍼뜰퍼뜰 내리는 함박눈. 오솔길로 접어들기도 전에 오늘의 선택은 탁월했다는 탄성이 쏟아진다.   
  

       
△ 이런 길은 하루종일 걸어도 좋겠다

 

저것이다! 내가 꿈속에선가 몇 천년
숲을 뒤지다가 그 숲이 끝날 즈음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꿈의 향연! ……
봄이 아닌데도, 떨어져 누워 며칠간씩
신음하고 있는 산벚꽃나무의 벚꽃이 아니라
몸 가벼워져 훨훨 날아다니는 저
천사의 깃털이 천사의 몸에서 빠져 나와
비로소 내 몸 받아 오늘은 강산(江山)을 떠도는구나
--- 서지원 '내리는 눈'의 일부

 


 

 사잇길로 접어들기 전 대구에서 온 관광객 세 분을 만났다. 한라산에 꼭 가고 싶었는데 못 가고 대신 이 눈길을 걷는다고 했다. 이 길로 실컷 걸어가서 교래리에서 소인국 테마 파크라도 구경하고 점심 먹고 가면 좋을 것이라고 안내하고는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이 숲길은 사시사철 어느 때도 좋다. 과거 표고 재배장이 많았던 이곳에는 삼나무가 비교적 적고 혼합림이 우거져 정취가 넘친다.

 

 엊그제 많은 비로 전에 내린 눈은 다 녹아버리고 새로 포근히 쌓인 눈이라서 미끄럽지도 않고 자갈을 다 묻어버려 골라 디딜 필요도 없다. 그저 푹신푹신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며 신나게 걸으면 그만이었다. 때로는 길옆에 쌓인 온갖 모양의 눈에 탄성을 보내며 저마다 무엇과 닮았는지 얘기하고는 즐거워한다. 방금 만났던 세 분이 뒤따라온다. 대구에서 온 분인데 50대의 부부와 제대를 앞둔 아들이다.

 

 자갈 더미에 소복이 쌓인 모습은 장난감 가게에 올록볼록 세워놓은 장난감 인형을 닮았고, 꽝꽝나무 같은 촘촘한 나무에 쌓인 눈은 동물원 우리에 갇힌 여러 가지 동물을 연상시킨다. 가끔 보이는 주목(노가리)은 눈의 무게에 눌려 저 정이품송 같은 낙락장송으로 보이고, 짧은 억새에 눈이 올라앉은 것은 커다란 설란(雪蘭)이라 불러 마땅하겠다. 어쨌든 온통 눈으로 덮인 순백(純白)의 세계를 걷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 은백의 숲길을 걷는 기분
 
 발을 가볍게 놀리다 보니 전혀 시리지도 않고, 눈보라가 휘날려도 볼도 시리지 않고 그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하여 무한한 감동의 연속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어떤 추함도 발견할 수 없고 죄를 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다. 그리고,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듯이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눈 내리는 오솔길 속에 멀리 앞장서 가는 일행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박수근 선생의 점점(點點) 그림이나 밀레에게서 느끼는 포근한….

 

 '순하고 여린 마음은 결 고운 어여쁨 들내지 않아 숨어 비틀거리다. 나르시즘에 갇힌 고고한 기품 자유(自由)에로의 함정에 쌓여 허우적이더니, 깊은 소용돌이 떨치고 나온, 너 안에 들어찬 젖은 눈빛은 창백한 울음 아닌, 화려하게 커다란 웃음소리 흩뿌리고 떠나가더라. 붙잡는 설움은 강기슭에 꽁꽁 묻어두고, 깊어진 병(病) 벗하여 평화로운 밤바다로 장렬히 투신(投身)하더라. 겨울비 사무치게 통곡하다 부르튼 바람에 휘-휘 돌아 하늘높이 용트림 칠 때, 그 때에 너는' --- 강대아의 '진눈깨비'

 

 하얗게 포장된 숲으로 난 길로 한없이 걷고 싶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돌아오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시간이 없어 끝까지 가보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는 관광객들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앞선 발자국도 줄어들었다. 한 남자가 트래킹 용으로 만든 커다란 바퀴를 단 작은 차를 배낭을 멘 채로 폼나게 타고 재빨리 지나간다. 한 번 타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만 오늘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모처럼 심어놓은 낙엽송이 눈 속에 이채롭다. 누군가가 고로쇠나무 수액(水液)을 빼려고 흰 플라스틱 통을 매달아 놓았다. 아직 제주도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 어떤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부터 철퇴를 내려 아예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비목나무의 봄눈이 제법 부풀었고, 질 수 있겠느냐는 듯 서어나무의 봄눈도 초록빛을 띠었다. 

 

△ 용궁의 세계로 들어선 느낌
 
 커다랗게 세워놓은 물찻오름 표지석에 이른 것이 10시 40분. 1시간 20분만에 날아온 것이다. 잠시 쉬며 인원을 점검하고 산으로 오를 채비를 한다. 땅이 얼지 않아 눈 때문에 보이지 않는 입구의 물웅덩이를 조심하면서 앞장서 길옆으로 바짝 붙여 걷는다. 눈 온 뒤로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얼마 안 가 소로로 접어들었는데, 이곳은 길을 엇갈리기 쉬운 곳이다.

 

 물찻오름은 가운데 분화구 말고 남서쪽으로도 능선이 길게 뻗었는데 계곡과 연계해서 보면 꼭 이쪽이 분화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따라서 바로 오르면 그 능선을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멀고 험해 힘들다. 그래서 오른 쪽으로 바로 오르지 말고 왼쪽으로 좀 내려가는 기분으로 가면 바로 물찻 분화구로 가는 지름길에 이른다. 숲을 지나고 사면(斜面)을 오르는데, 뿌리를 살짝 가린 눈에 가볍게 서너 번 미끄러졌다.

 


 

 작은 돌탑들은 안 보이고 큰 돌탑만 두 개 있어 그것을 찍고 바로 분화구가 보이는 능선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눈을 돌렸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경치…. 환상(幻像)인 듯 싶어 눈을 다시 한 번 비비고 들여다봐도 현실이었다. 올라오는 족족 누구하나 탄성 안 지르는 사람이 없다. 바람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고 많은 눈이 그대로 나무와 풀에 쌓이다 보니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아예 내려가는 길조차 없어져 버렸다. 한참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은 뒤 길을 찾으며 천천히 설경(雪景) 속으로 들어간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길을 멈출 수 없어 계속 누르며 못 가에 이르렀을 때, 이 기막힌 풍경을 어떻게 표현할 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인 사방의 온갖 풍정(風情)을 보며 할 말을 잊은 것이다. 결국 송순주(松荀酒) 한 잔이 들어가서야 온갖 백산호(白珊瑚)로 치장한 용궁(龍宮) 속에 들어와 앉아있음을 느꼈다.  
 
▲ 단숨에 주파한 30리 길

 

 '이제 돌아가도 되는가 씌어지지 않던 시 앞에서 오지 않던 어둠과 빛의 문 앞에서 눈발이 되어 휘날려도 되는가 걸어온 발자국이 길을 잃더라도 길을 물어온 죄 한번쯤 덮어도 되는가 눈을 날리는 사람 나를 용서하라 나무가 비워지고 하늘이 비워진 자리에 설국의 고요가 찾아들 것이니 밤길 멀리는 어둑한 불빛이 켜지고 들이며 산에는 불빛을 좇는 눈들이 몸을 뉠 때 돌아가도 되는가 내 안에다 눈물 흘려도 되는가 버리지 못해 그리운 것이 되고 그리움도 끝내는 아파서 무너져 내리는 것 육신이 없는 몸 형형한 색채의 밑 그리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때 모든 것의 단호한 정신으로 흩날리리라.'
---  양용직의 '눈이 내리네' 전문

 


 

 일생에 단 한 번 볼지 말지 모르는 풍경 앞에서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 하지만 위험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분들을 멀리서 내려 오라 더 권유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돌아가야만 했다. 다만 못 오는 분들은 인연이 안 닿는가 보다 생각할 수밖에. 나오면서도 안타까워 몇 번이나 되돌아보았다. 언뜻 용왕이 나와 눈발 속에서 다시 오라 손짓하는 것 같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어디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만 고즈넉하다.

 

 다시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나와 입가심을 하고 다시 동쪽 남조로 향해 길을 떠난 시각이 12시 40분. 다시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평소 같으면 지루했을 법도 하건만 누구하나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대구(大邱)의 세 사람도 한 번은 부부가, 한 번은 부자가, 다시 한 번은 모자가 번갈아 뒤에 쫓아오며 긴한 정을 나누는 모습이 너무 보기에 좋다. 한라산을 오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우리 제주에 사는 사람들도 한라산은 언제든 오르면 되지만 오늘 같은 정경은 다시는 만나기 힘들 것이다. 길가에 있는 무덤들도 하얀 솜이불을 덮고 편안한 잠자리에 든 것 같다. 나오는 길은 삼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차로도 넘기 힘든 거친 길은 끝까지 하얀 솜으로 포장되어 있어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30리가 넘는 길을 후딱 주파해 버렸다. 남조로에 이른 시각이 1시 50분. 조금 걷다보니 바로 버스가 달려든다. 제주시에서 식당을 고르며 헤매다 결국 예정치도 않았던 남일 회마트에 가서 회(膾)를 먹게 된 것도 결코 용궁행과 무관치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