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감(靈感)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간 오름
꿈이 아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득한 설원(雪原)의 삼나무 숲
어느덧 우리 다섯 사람은 북극 삼림(森林)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만인가?
수북히 쌓인 눈 위를 걸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 분명 아니었다.
이 따뜻한 남쪽나라 제주 땅 절물오름이 아닌가.
이 같은 우연이 또 있을까?
그 날 아침은 제주시에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려
이를 피해 저 남제주군 표선면 가세오름과 토산봉에서
봄 날씨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지막 코스는 동부산업도로변
산세미오름에 올라 눈이나 한 번 밟아 보자였다.
그러나, 산세미오름엔 눈이 없어
내 영감의 발현으로 무작정 절물오름으로 이끌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름에 다가갈수록 길목엔 거짓말처럼 눈이 쌓여
자동차가 미끄러지며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입구에 다가서면서 더 이상 차를 몰 수가 없었다.
△ 설국(雪國), 나를 마냥 설레게 하는
모두들 들떠 망아지처럼 내달린다. 허연 눈을 이고 있는
삼나무 숲길엔 바람까마귀가 날아 아늑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때맞춰 내리는 눈이 숲 사이를 날며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제주에 살면서 이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한 축복이랴.
저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처럼 눈밭을 겅중겅중 달리다가 눈
싸움도 해보다가 아무나 껴안고 뒹굴고 싶어진다. 첫눈 내리면
만나 둘이서 한없이 걷어보자던 첫사랑 연인에게 늦게나마
전화라도 넣어 볼까. 첫사랑이 아니면 어떠랴. 바로 앞에 걷는
여인에게 프로포즈라도 해도 좋을 분위기이다.
표고 696.9m의 큰대나*가 알프스보다도 높아 보인다. 광장
못 미쳐 양쪽으로 심어놓은 알맞은 크기의 구상나무엔 눈이
쌓여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었다. 노루 울음소리인가? 어디선가
자연이 연주하는 캐럴이 들려온다. 황금 연못은 조용히 내려
앉은 눈 위로 쉴새없이 은가루를 뿌려대고 있었다.
한바탕 꿈이라도 좋았다. 비고 147m의 오름은 온통 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제 삼나무 숲이 끝나고 잎이 다 져버린 앙상한
나무 사이를 뚫고 밧줄이 매어진 길을 오른다. 노루를 가두기
위한 철책 공사가 진행중이다. 저기에다 자유를 가두어 놓아서
어쩌자는 것인가. 간간이 송악과 줄사철나무만 푸르다.
우리는 지금 가고 있다.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고용인이 되고, 보증인이 되고, 회원이 되고,
납세자가 되고……. 얽히고 설킨 세상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것을
훨훨 떨어내고 아무런 속박이 없는 설국(雪國)으로. 팥배나무·
마가목·때죽나무·서어나무가 늘어선 길을 지나서.
*주 : 큰대나 - 이곳 절물오름 두 봉오리 중 큰 것의 이름. 작은 것은 족은대나.
△ 오름엔 다만 무한한 자연의 내리는 축복만이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늙어 허리가 꼬부라진 팥배나무 한 그루가
인사를 한다. 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이 나무는 필경 이 낙원의
수호신일진저. 그 옆에 이를 보좌하는 젊은 팽나무가 아는 체를 한다.
동쪽으로 조금 걸어 환히 트인 능선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민오름
·큰지그리·족은지그리·바농오름의 알현(謁見)을 받는다.
오른쪽으로 전망대, 광한전 짓는 공사가 시작되어 여덟 기둥이 내리는
눈발 위로 솟았다. 조릿대가 바스락거리고 꽝꽝나무도 푸른 모습으로
절개를 자랑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개오리오름[犬月岳]이 속세에서
보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다가선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과 아래서 올려다보는 모습이 판이하다.
저 한라산 쪽으로 오름이 그려내는 능선, 그 곡선의 취향은 산수화의
멋을 더해주는 화풍일 터. 어디서 바스락하고, 노루라도 한 마리 뛰어
나올 것만 같다. 옛 신선들은 저 백록담에서 흰사슴과 같이 놀았다지만
오늘 절물오름 분화구에는 이제야 눈이 그치며 윤곽이 드러난다. 물이
고여 있을 자리엔 눈이 쌓여 노루 발자국만 선연할 것이다.
남녘으로 족은대나도 잘 빚어놓은 분청사기 그릇처럼 단아한 모습을
하고 앉아 지난 여름에 올랐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온통
나무뿐이니 휴양림이 될 수밖에. 여름에 올라 삼림욕하며 즐기는 것도
한 멋이거니와 겨울에 이렇듯 눈을 맞으며 거니는 것도 또한 신선의
낙(樂)을 더함이니 표연히 속세를 떠난 듯 싶다.
내려와 다래덩굴 우거진 바위 아래 약수터에서 마시는 물 한 잔의 맛은
산벚나무·때죽나무·종가시나무·소나무·보리수나무가 우거져서가 아니라
내리는 눈발 아래여서 더욱 시원한 것일까? 약수암(藥水庵) 문밖에 방금
천왕문 속에서 튀어나온 금강 역사가 눈을 부라리며, 길가에 세워놓은 코 큰
눈사람을 어르고 있었다. [2001. 12. 23.]
<사진> 위는 휴양림인 한여름 절물오름 모습인데,
큰대나오름 분화구 건너 그 뒤로 족은대나오름이 보인다.
아래는 그냥 눈이 쌓인 벌판 모습.


꿈이 아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득한 설원(雪原)의 삼나무 숲
어느덧 우리 다섯 사람은 북극 삼림(森林)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만인가?
수북히 쌓인 눈 위를 걸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 분명 아니었다.
이 따뜻한 남쪽나라 제주 땅 절물오름이 아닌가.
이 같은 우연이 또 있을까?
그 날 아침은 제주시에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려
이를 피해 저 남제주군 표선면 가세오름과 토산봉에서
봄 날씨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지막 코스는 동부산업도로변
산세미오름에 올라 눈이나 한 번 밟아 보자였다.
그러나, 산세미오름엔 눈이 없어
내 영감의 발현으로 무작정 절물오름으로 이끌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름에 다가갈수록 길목엔 거짓말처럼 눈이 쌓여
자동차가 미끄러지며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입구에 다가서면서 더 이상 차를 몰 수가 없었다.
△ 설국(雪國), 나를 마냥 설레게 하는
모두들 들떠 망아지처럼 내달린다. 허연 눈을 이고 있는
삼나무 숲길엔 바람까마귀가 날아 아늑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때맞춰 내리는 눈이 숲 사이를 날며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제주에 살면서 이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한 축복이랴.
저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처럼 눈밭을 겅중겅중 달리다가 눈
싸움도 해보다가 아무나 껴안고 뒹굴고 싶어진다. 첫눈 내리면
만나 둘이서 한없이 걷어보자던 첫사랑 연인에게 늦게나마
전화라도 넣어 볼까. 첫사랑이 아니면 어떠랴. 바로 앞에 걷는
여인에게 프로포즈라도 해도 좋을 분위기이다.
표고 696.9m의 큰대나*가 알프스보다도 높아 보인다. 광장
못 미쳐 양쪽으로 심어놓은 알맞은 크기의 구상나무엔 눈이
쌓여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었다. 노루 울음소리인가? 어디선가
자연이 연주하는 캐럴이 들려온다. 황금 연못은 조용히 내려
앉은 눈 위로 쉴새없이 은가루를 뿌려대고 있었다.
한바탕 꿈이라도 좋았다. 비고 147m의 오름은 온통 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제 삼나무 숲이 끝나고 잎이 다 져버린 앙상한
나무 사이를 뚫고 밧줄이 매어진 길을 오른다. 노루를 가두기
위한 철책 공사가 진행중이다. 저기에다 자유를 가두어 놓아서
어쩌자는 것인가. 간간이 송악과 줄사철나무만 푸르다.
우리는 지금 가고 있다.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고용인이 되고, 보증인이 되고, 회원이 되고,
납세자가 되고……. 얽히고 설킨 세상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것을
훨훨 떨어내고 아무런 속박이 없는 설국(雪國)으로. 팥배나무·
마가목·때죽나무·서어나무가 늘어선 길을 지나서.
*주 : 큰대나 - 이곳 절물오름 두 봉오리 중 큰 것의 이름. 작은 것은 족은대나.
△ 오름엔 다만 무한한 자연의 내리는 축복만이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늙어 허리가 꼬부라진 팥배나무 한 그루가
인사를 한다. 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이 나무는 필경 이 낙원의
수호신일진저. 그 옆에 이를 보좌하는 젊은 팽나무가 아는 체를 한다.
동쪽으로 조금 걸어 환히 트인 능선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민오름
·큰지그리·족은지그리·바농오름의 알현(謁見)을 받는다.
오른쪽으로 전망대, 광한전 짓는 공사가 시작되어 여덟 기둥이 내리는
눈발 위로 솟았다. 조릿대가 바스락거리고 꽝꽝나무도 푸른 모습으로
절개를 자랑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개오리오름[犬月岳]이 속세에서
보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다가선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과 아래서 올려다보는 모습이 판이하다.
저 한라산 쪽으로 오름이 그려내는 능선, 그 곡선의 취향은 산수화의
멋을 더해주는 화풍일 터. 어디서 바스락하고, 노루라도 한 마리 뛰어
나올 것만 같다. 옛 신선들은 저 백록담에서 흰사슴과 같이 놀았다지만
오늘 절물오름 분화구에는 이제야 눈이 그치며 윤곽이 드러난다. 물이
고여 있을 자리엔 눈이 쌓여 노루 발자국만 선연할 것이다.
남녘으로 족은대나도 잘 빚어놓은 분청사기 그릇처럼 단아한 모습을
하고 앉아 지난 여름에 올랐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온통
나무뿐이니 휴양림이 될 수밖에. 여름에 올라 삼림욕하며 즐기는 것도
한 멋이거니와 겨울에 이렇듯 눈을 맞으며 거니는 것도 또한 신선의
낙(樂)을 더함이니 표연히 속세를 떠난 듯 싶다.
내려와 다래덩굴 우거진 바위 아래 약수터에서 마시는 물 한 잔의 맛은
산벚나무·때죽나무·종가시나무·소나무·보리수나무가 우거져서가 아니라
내리는 눈발 아래여서 더욱 시원한 것일까? 약수암(藥水庵) 문밖에 방금
천왕문 속에서 튀어나온 금강 역사가 눈을 부라리며, 길가에 세워놓은 코 큰
눈사람을 어르고 있었다. [2001. 12. 23.]
<사진> 위는 휴양림인 한여름 절물오름 모습인데,
큰대나오름 분화구 건너 그 뒤로 족은대나오름이 보인다.
아래는 그냥 눈이 쌓인 벌판 모습.


'오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산의 설경(雪景) (2) (0) | 2002.02.04 |
---|---|
한라산의 설경(雪景) (1) (0) | 2002.01.31 |
오름을 누비는 사진작가 서현열의 내가 사랑하는 제주> (0) | 2002.01.19 |
한라산 북쪽 지역 오름 사령관 - 어승생악 (0) | 2002.01.16 |
2002년 새해 첫날, 둔지봉 일출(日出) (0) | 2002.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