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 (23) 명월조점(明月操點)

김창집 2007. 10. 16. 13:37

* 이 글은 ‘제주시정소식’지에 실었던 것으로 내용의 복제 사용을 금합니다. 그리고, 일정기간 동안 링크가 안 되도록 했으니 양해바랍니다.

 

   * 탐라순력도 중 '명월조점' 부분

 

신탐라순력도 (23) 명월조점(明月操點)


▲ 명월대(明月臺)와 팽나무 군락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린 명월초등학교 앞 도로에서 커다란 팽나무 밑으로 흐르는 실개천 위에 새로 쌓은 다리를 건너 조심스레 명월대로 들어가 본다. 지금 사람들의 눈이 너무 높아져서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명월대 위에 앉으면 제법 아늑하고 고풍스럽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속에서 선인들이 시를 읊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팽나무는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갑옷처럼 콩짜개덩굴을 걸치고 있다. 개천을 따라 이곳 명월리 중동에서부터 저 아래 동네까지 팽나무 노거수 100여 그루가 늘어서서 옛 고향의 정취를 풍긴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해수에도 비교적 강하고 해충에도 잘 견뎌 과거 우리 제주 마을의 대표적 정자목으로 손색이 없었다.


 지금 도내에 산재해 있는 중산간 마을에 얼마간의 팽나무들이 남아 있으나, 많은 수의 나무들이 도로 확장과 주택 개량으로 베어져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그리고, 농약 과다 사용으로 내성이 강한 해충들이 팽나무로 번져 나무를 볼품없이 만드는 것이 안타깝다. 그런 의미에서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명월 팽나무 군락만이라도 온전하게 지켜 옛 제주 마을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 '명월대'에서 바라본 복원한 다리와 팽나무 군락


▲ 명월진성의 어제와 오늘


 지금은 교통난 해소를 위해 한림읍 수원리 입구에서 월령리까지 널찍하게 직행도로를 빼놓아 바로 명월진성 남문 밖으로 지나간다. 그 길을 닮아서일까? 새로 복원한 성의 각(角)이 예리하고 직선적이다. 얼마 전에 조천읍 북촌환해장성에서 옛 사람이 쌓은 그대로의 결 고운 돌담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을 본보기로 하여 쌓을 수는 없는지? 새로 세운 문루(門樓)도 어디 도성(都城)의 큰 대문을 연상시킨다. 그에 비해 실제로 남아 있는 부분이 너무 초라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이곳은 지역적으로 비양도와 가깝기 때문에 섬에 머물고 있으면서 자주 쳐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1510년(중종5)에 장림(張琳) 목사가 처음으로 여기에다 목성(木城)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시작되는 1592년(선조25)에 이경록(李慶祿) 목사에 의해 석성(石城)으로 개축했던 것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 기록된 성의 규모를 보면, 둘레가 3,500척이고 높이는 9척에 달하는데, 세 개의 문 위에 모두 초루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에 엮은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耽羅誌, 1653)에는 주위 3,020척에 높이가 8척이며, 동 서 남에 3개의 문이 있다고 했다. 또, 탐라지에는 이원진 목사가 성안의 객사(客舍)에 머물면서 쓴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저물녘에 고관에 들어 머무니/ 옛 수루 모습은 창망한데 탱자나무 가지는 평평하도다./ 도통사의 위엄에 바람이 바다를 거두고/ 시랑이 남긴 자취인 듯 달이 성벽에 비치도다./ 하늘이 갈석봉에 나직이 걸리니 음비가 모이었고/ 땅은 부상을 누르니 개인 아침해가 돌아오네./ 팔영 은후를 이제 보지 못하니/ 벽사통 아래 눈물이 갓끈을 적시도다.’

 

  * 복원된 명월진성 남문과 성벽의 모습

 

▲ 명월진의 군기를 점검하는 그림, 명월조점


 명월조점(明月操點)은 1702년(숙종 28) 11월 13일에 명월진(明月鎭) 성정군을 조점하는 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목사 일행은 이날 아침 대정현을 떠나기에 앞서 전 만호인 군관 유성서(柳星瑞)를 모슬진 점검을 위해 현지로 떠나보내고, 또 군관인 사과 홍우성(洪遇聖)을 차귀진 점검을 위해 현지로 보낸 후 명월진으로 온 것이다. 이곳 명월진성에서 이형상 목사는 지방관 겸 중군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과 함께 명월진 조방장인 강세건(姜世建) 이하, 성정군 412명, 목자와 보인 185명, 말 1,064필, 창고의 곡식 3,300여 석을 조점한 사실을 적고 있다.  


 그림을 보면, 명월진성 내 3분의 1쯤 되는 공간에 말을 들여놓고 가운데 원장과 사장을 설치하여 말을 점검하고 나머지 아래로 반쯤 되는 공간을 이용해 군을 검열하고 있다. 당시 명월진성의 구조를 보면 서문 쪽에 크게 서별창(西別倉)과 별고(別庫)를 두고, 북쪽 샘 동쪽으로 객사와 관아가 이웃해 자리잡았다. 동문으로 나가 위쪽 우둔촌(牛屯村)으로 돌면 느지리오름의 만조망(晩早望)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봉수에서는 서쪽으로 직선 거리 10.9㎞의 당산봉수(唐山烽燧), 동쪽으로 직선거리 6.4㎞의 도내봉수(道內烽燧)와 연락하였다.

 

   * 성 안에 남아 있는 여러 비석들

 

▲ 협재굴, 비양도를 비롯한 그 주변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수류천촌(水流川村)과 멀리 배령굴(排令窟)이 보이는데, 지금의 한림공원쯤인 것 같다. 지금의 협재굴은 황금굴, 소천굴(昭天窟)과 함께 제주도 용암동굴 지대 천연기념물 236호로 지정되었는데, 용암동굴이면서 석회암동굴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는 굴 위에 모래가 덮이면서 굴로 흘러들어 석회암동굴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서문 밖으로 협재의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아래 성 가까이엔 조그만 월계과원(月溪果園)이 자리 잡았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이 과원에 감자 3주, 산귤 3주, 지각 11주, 옻나무 34주, 닥나무 330주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비양도와 마주한 곳은 지금의 옹포리(瓮浦里) 포구인 독포(獨浦)다.  


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 좋은 명월천을 근원으로 하여 바다 쪽으로 논이 펼쳐지는데 그 이름은 사을포답(士乙包畓)이다. 그리고, 제일 왼쪽 아래의 마두연대(馬頭煙臺)는 명월진에 소속되었던 연대로 동쪽으로는 죽도연대(竹島烟臺), 서쪽으로 배령연대(盃令烟臺)와 교신하였으며, 별장(別將) 6인과 직군(直軍) 12인이 교대로 근무했던 곳이다.

 

   * 남문을 제외한 건물은 복원하지 않았고, 성 저쪽으로 보이는 비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