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 (21) 차귀점부(遮歸點簿)

김창집 2007. 10. 18. 22:08

* 이 글은 ‘제주시정소식’지에 실었던 것으로 내용의 복제 사용을 금합니다. 그리고, 일정기간 동안 링크가 안 되도록 했으니 양해바랍니다. 

 

     * 탐라순력도 중 '차귀점부'

  

신탐라순력도 (21) 차귀점부(遮歸點簿)

 

   * 차귀섬이 보이는 자구내 포구에서 한치를 널어 말리는 광경, 옆은 도댓불

 

▲ 굽만 조금 남아 있는 차귀진성

 

 중부 지방에 설화(雪禍)를 몰고 온 지난 3월 6일. 차창에 바로 내리꽂히는 눈보라 속을 독감(毒感) 초기의 몸살기를 느끼며 섬의 서쪽 끝 한경면 고산리(高山里)로 달렸다. 음력으로는 1702년 11월 13일이지만 양력으로 12월 31일, 그 독하다는 모슬포의 하늬바람을 뚫고 중산간 길을 통하여 대정현(大靜縣)에서 명월진(明月鎭)으로 오던 목사 일행들에게도 이런 눈보라가 휘날리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 속에 빠져본다.

 

 오다 개다를 반복하는 눈발 속 새로 잘 정비해 놓은 길을 이 날 목사 일행의 방향과는 역(逆)으로 달리며 새로 복원해놓은 명월진성을 스쳐 지나는데, 옆에 앉은 강 화백의 입에서 ‘이게 아닌데….’ 하는 자조 섞인 독백이 환청처럼 들린다. 그 뒤로도 한참을 달려서야 도착한 고산리. 우선 고산초등학교 초입에 차를 세우고 길을 가로질러 기독교장로회 고산교회를 찾았다. 교회 자리가 바로 성의 우물터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진이 철수되고 견고하던 성이 낡아질 무렵, 처음으로 두모리에서 수원 백씨가 성안에 들어 와서 설동(設洞)했는데, 1937년 지금의 고산초등학교를 신축하면서 운동장터의 논을 매립하기 위해 돌을 허물기 시작하자 인근에서 너도나도 울타리와 밭담으로 가져갔고, 4. 3 때 성을 쌓으면서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어느 집 울타리 밖에서 성굽으로 추정되는 몇 개의 돌덩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수맥을 끊어버리는 횡포를 부리고 돌아가는 호종단을 막은 전설의 섬 차귀도

 

▲ 작지만 견고했던 차귀진성


 2000년에 간행된 <제주 고산향토지>에 정리된 것을 보면, 이곳에 방호소(防護所)를 처음 세운 것은 세종 21년(1439) 제주도안무사 한승순(韓承舜)에 의해서라고 한다. 이후 효종 3년(1652) 봄 이원진(李元鎭) 목사가 앞 바다에 차귀도(당시 죽도)가 있으므로 진을 설치할 것을 아뢰어 차귀진을 설치하고 여수(旅帥)를 두었다. 그 해 가을에 태풍으로 남북 수구 홍문(虹門)이 쓸려가 버리자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수축 이듬해 봄 북수구 위에 공신정(拱宸亭)까지 세운다.

 

 이원진 목사가 구축했을 때의 진성의 규모는 둘레가 2,466척, 높이가 22척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기록이 거의 일치한다. 동서 양쪽에 문을 단 이 진의 우두머리는 조방장(助防將)이 맡았는데 이형상 목사 순력 4년 뒤인 숙종 32년(1706) 송정규(宋廷奎) 목사에 의해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가 10년 뒤인 숙종 42년(1716) 어사 황구하(黃龜河)에 의해 다시 조방장으로 격하된다. 결국 고종 43년(1906)에 이르러 조방장을 파(罷)하고 무기고를 없애면서 진성으로서의 생명이 끝나고 말았다.         

 

 성굽을 재확인하고는 자구내 포구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당산봉 바위들이 절경을 이루고 멀리로 옛 고산(高山)이었던 수월봉의 정자가 보인다. 오늘은 한치를 말리고 있지 않았으나 올 때마다 정취가 넘쳐나는 것은 아늑한 포구와 도대불이 지켜 서있는 때문일까? 아니면 저기 바다를 두르고 있는 섬들 때문일까? 한 폭 그림처럼 일렁이는 파도 너머의 정경을 사진기에 담고 애틋한 녹고물의 전설을 떠올리며 수월봉에 올랐다가 추위도 잊은 채 절경에 취해있는 강 화백을 채근하고 내려왔다.


   * 차귀진성 터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 차귀도가 있는 자구내로 가는 관문

 

▲ 신석기 초기 문화를 대표하는 고산리 선사유적


 오다가 들른 곳은 사적 제412호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先史遺蹟). 이 유적은 우리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을 대표한다. 사적지로 지정된 곳 말고도 유물 분포지역이 너무 광범한 경작지여서 유물 포함층이 불안정한 상태이다. 1977년 경지정리사업 때 유물층이 교란된 상태로 경작지에서 발견, 석기 9만9천여 점(성형석기 5천여 점, 박편 9만4천여 점)과 토기조각 1천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BC6000년경의 강원도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이 구석기 말기와 신석기 초기를 연결하는 자료를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한반도에 신, 구석기시대가 존재했었다는 근거를 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 시베리아, 연해주지방 등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초기 유물과 같은, BC 12000~10000년경의 눌러떼기 수법으로 만든 석기와 섬유질 토기가 이 유적에서 다량 출토되어 한반도에서도 구, 신석기시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됨을 입증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일본, 한반도 일대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초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를 제공하며, 한국의 신석기 초기 문화의 형성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고산리 주민들은 구석기 후기 말엽 수렵, 채집 집단의 석기 제작 전통을 계승하고,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생산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출토된 석기는 석재를 기초 원석으로 직접 타격에 의해 박편을 제작한 후 간접 타격 혹은 눌러떼기로 2차 가공하여 제작한 것이다. 토기는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 조각,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조각 등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는 ‘고산리식 토기’라고 불릴 수 있는, 한반도에서 특징적인 유일한 토기 형식이다.

 

    * 신석기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온 선사유적지와 앞 당산봉

 

▲ 차귀진의 군기를 점검하는 그림 ‘차귀점부’


 1702년(숙종 28) 11월 13일은 세 군데에서 점검이 이루어진 날이다. 목사 일행은 명월진성의 군기를 직접 점검했고, 모슬진은 전만호 유성서(柳成瑞)를 보내어 점검케 했으며, 이곳 차귀진성은 당시 군관(軍官)이었던 사과(司果) 홍우성(洪遇聖)을 보내어 점검시킨 후 사후 보고를 받았다. 이날 점검한 내용은 차귀진 조방장 김국준(金國俊) 이하 방군(防軍) 기병(騎兵) 보병(步兵) 등 모두 20명의 훈련 상태와 아울러 군기도 포함된다.

 

 이 그림에는 진이 너무 작기 때문에 차귀진을 포함한 해변 모습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동문과 서문이 있는 성안에는 객사(客舍)와 병고(兵庫)가 그려져 있고, 성 남쪽으로 우자장(宇字場) 목장과 모동(毛同)의 삼나무 밭의 삼나무가 빽빽하다. 오른쪽에는 고산(高山)이 그려지고 아래로 조그만 코지(串), 그 아래로 지금의 자구내인 사귀포(蛇歸浦), 당산악, 차귀진소속의 당산봉수(堂山烽燧). 밑으로 미포(尾浦)와 우두연대(牛頭煙臺)가 나와 있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당산봉과 차귀도 앞 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