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 (24) 명월시사(明月試射)

김창집 2007. 10. 17. 00:39

* 이 글은 ‘제주시정소식’지에 실었던 것으로 내용의 복제 사용을 금합니다. 그리고, 일정기간 동안 링크가 안 되도록 했으니 양해바랍니다.

 

    * 탐라순력도 중 '명월시사' 그림 

 

신탐라순력도 (24) 명월시사(明月試射)

 

   * 만조봉수가 있었던 느지리오름(지금도 봉수시설의 자취가 남아 있다)


▲ 만조봉수가 있던 느지리오름


 명월조점이나 명월시사 그림을 보면 왼쪽 위에 커다란 봉수를 그려 넣고 있다. 이름하여 ‘만조망(晩早望)’이라 했으니, 만조(晩早)는 오름이 소재한 곳의 옛 이름인 느지리의 한자 표기이다. 혹 봉수대의 흔적이나 있을까 하여 오름에 올라본다. 명월진성 윗길을 따라가다가 협재로 통하는 길과 마주치는 곳에서 남서쪽 월림리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서면 바로 눈앞에 오름이 보인다.

 

 넓히면서 심하게 깎아버린 서쪽 길을 지나 오름으로 통하는 세거리길에 차를 세우고 정상에 오른다. 무덤 옆을 지나는 길은 많은 오름인들의 왕래로 정상 산불감시초소까지 뚜렷하다. 왼쪽 소나무 숲 아래에 자생란을 복원했다는 표지가 있고 애기범부채가 붉게 빛난다. 여기저기 비자나무도 심어놓았다.   

 

 북제주군 한림읍 상명리 소재 느지리오름은 해발 225m, 비고 85m, 둘레 2,609m으로 깔때기 모양의 분화구가 두 개다. 제법 나이가 든 자생 호랑가시나무 옆을 지나 정상에 오르니, 산불감시초소 주위에 봉수대가 윤곽만 남았다. 이 만조봉수는 원래 판포악에서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동쪽으로 도내봉수 서쪽으로 당산봉수와 교신하였다.

 

  * 옛 명월진성 자리는 밭으로 변했고, 멀리 명월과 한림 마을이 펼쳐져 있다.

 

▲ 행정과 교육의 중심지였던 명월리


 ‘제주의 마을’ 홈페이지를 보면, 고려 충렬왕 26년(1300) 제주에 동서현을 설치하면서 이곳에 명월현을 두게 되는데, 1608년 현촌제를 폐지하고 방리제가 설치되어 명월은 우면 소재지로 지금의 한경면, 한림읍, 애월읍을 관장하게 되었고, 도약정에서 풍헌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다가 1623년에 금악리, 1732년에는 옹포리가 독립해 나갔다.

 

 1879년에는 우면이 신우면(현 애월읍)과 구우면(현 한림읍과 한경면)으로 분할되는데 명월은 구우면 소재지가 된다. 풍헌 시대에는 풍헌 자택에서 집무하다가 면장제로 바꾸어지게 되면서 명월성내의 사환곡창 일부를 면사무소로 썼었다. 1928년 임창현 면장이 면사무소를 옹포리로 이전하였으며, 1936년에는 김창우 면장이 한림리로 옮겼으니, 명월리는 사실상 오랜 세월 동안 제주 서부 행정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명월은 교육 문화의 본산이었다. 일찍이 인종 원년(1545)에 박형수(朴亨秀) 목사가 명월성 서쪽에 월계정사(月溪精舍)를 건립하여 근처에 거주하는 자제들을 모아 교육시켰고, 1831년에는 이예연(李禮延) 목사에 의해 우학당(右學堂)이 세워져 제주 서쪽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했다.

 

  * 만호 명단을 새겨놓은 비와 남은 비들 

 

▲ 지형이 만들어낸 군사요새지


 적이 점령하여 교두보(橋頭堡)로 활용할 수 있는 섬 비양도와 상륙하기 쉬운 협재 모래밭과 옹포 포구, 그리고 명월천의 풍부한 물…. 명월은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으로 적이 접근을 노리는 곳이기 때문에 그를 막아내기 위한 강력한 방어시설이 필요했다.

 

 삼별초란 때는 삼별초군이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 여몽연합군과 공방전을 벌였는데 고려 원종 11년(1270)에 삼별초의 위장 이문경이 명월포에 상륙하여 관군과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 있고, 공민왕 23년(1374) 원(元)의 목자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최영 장군이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천명을 이끌고 이곳 명월포로 상륙하여 토벌 후 다시 귀환하기도 했다.

 

 그렇게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명월진에는 대대로 만호(萬戶)를 두었는데, 수군의 만호(萬戶)는 육군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와 같이 종4품 무관직이었다. 지금 복원된 명월진성 남문 옆 옛길로 통하는 성안에는 만호 고덕비 5기와 조선 영조 때인 1764년부터 고종 32년까지 131년 동안 명월진 만호를 거친 112인의 명단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 복원해놓은 성과 그 너머로 보이는 밭들 

 

▲ 병사들의 활쏘기를 시취한 그림 ‘명월시사’


 명월진성에서 하루를 묵은 이형상 목사는 이튿날인 1702년 11월 14일 병사들의 활쏘기 솜씨를 점검하는데, 그 행사의 모습을 담은 것이 명월시사(明月試射)다. 이 날은 우면의 교사장(敎射長) 17명과 사원(射員) 141명이 참가하였다.

 

 시사(試射)란 활쏘기를 장려하기 위해 시행하는 활쏘기 시험으로 교사장은 활쏘기를 가르치는 교관이며, 사원은 활쏘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시험장에 모인 사람들이다.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당시 이형상 목사가 활쏘기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컸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본도 백성들은 본디부터 무예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으나 가난하고 부역이 번거로워 연습할 겨를이 없었다. 하물며 무과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벼슬할 가망이 없으므로 모두 무예를 포기해 스스로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세 고을에 영을 내려 교사장을 각 리에서 차출하게 했더니, 제주 50명, 정의 7명, 대정 5명이었다. 이들로 하여금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모두 연습시켜 초하루 보름으로 표적지를 관아에 바치게 하여 상벌을 시행하였다.

 

 뽑힌 사원(射員)은 제주가 1,170여 명, 정의가 350여 명, 대정이 160여 명이었는데, 모두가 앞을 다투어 활쏘기 시험을 할 때에는 몰기(沒技), 즉 유엽전(柳葉箭, 살촉이 버들잎과 같은 화살), 편전(片箭, 짧고 작은 화살), 기추(騎芻,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쏨) 등의 정한 시수(矢數)를 다 맞히는 부류가 많았다. 대체로 그들의 재주와 품격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연이어 활을 쏘아 맞히는 기예에 매우 능했다.’

 

  탐라순력도 전체를 보면 이형상 목사는 활쏘기를 중시하여 진(鎭)을 갈 때는 꼭 강사(講射)나 시사(試射)를 시행하게 하여 지켜봤다. 부기(附記)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그림으로 보아 전날 조점(操點)에 참가했던 지방관겸 중군 제주판관인 이태현(李泰顯)과 명월진 조방장인 강세건(姜世建)과 함께 활쏘기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다.

 

   * 새로 복원한 부분과 이어진 남아 있는 옛 성벽의 모양